[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26) 단호사~마산 봉수·대소원

단호사

충렬사를 나서서 보물 제512호로 지정된 쇠부처를 모시고 있는 도로 맞은쪽의 단호사(丹湖寺)에 들렀습니다. 이곳 단호사 철불은 양식적으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소 무서워 보이는 얼굴 표현과 도식적이고 두꺼운 옷 주름 처리 등은 충주 지역에 전하는 다른 철불과 닮아 있어 이곳의 지역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삼층석탑 1기가 대웅전 앞뜰의 소나무 아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절이 융성했던 시기를 일러줍니다.

달천나루 가는 길

충주 시내로 이르는 옛길은 경작지에 매몰되어 버렸는데, 이 일대는 충주 팔경으로 꼽히는 모사래들(모랫들의 이곳 말)입니다. 예전에는 겨울철이면 이곳 모래들판에 연출된 평사낙안(平沙落雁)을 그리 보았나 봅니다.

이 들을 지나면 주막이 있던 원달천에 이르고, 옛길은 게서 충주 읍내로 이르지 않고 서쪽으로 달천(達川)을 건넙니다. 지금도 달천진(達川津)이 있던 강변에는 충주목사를 지낸 이들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어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 달천 나루에서 강을 오갔는데, <대동지지>에 '서남 8리이며, 서울에서 영남대로(嶺南大路)를 통한다. 가물 때는 다리를 가설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충주 달천(達川)

달천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산천에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고 하며, <임원경제지> 상택지에 나오는 전국의 이름난 샘에도 실릴 정도로 물맛이 좋았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호서 괴산군 서쪽에 위치한 달천은 괴강(槐江)의 하류 지역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물을 마셔보고 물맛이 여산(廬山:중국 강서성 북쪽에 있는 명산)의 물맛과 같다고 하였다'고 전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달천이 남한강에 몸을 섞는 곳은 금천(金遷)인데, 예전에는 근처의 물화가 모이는 큰 나루였습니다.

   

달천은 북쪽을 이르는 우리말 달의 소리와 내를 이르는 천의 뜻을 빌려 그리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창원시 의창구 북면의 달천(達川)과 통영로 노정의 개령 감천(甘川:북천)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달천(獺川)이라고 써서 수달(水獺)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물론 옛 충주의 특산으로 수달이 나오기도 했지만, 달이 북쪽을 가리키는 우리말임을 망각한데서 비롯된 오류라 여겨집니다. 이와 같은 대표적인 오류가 바로 달천·달내를 달래강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달내를 달래강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는 '달래나 보지' 유형의 전설이 있을 법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자료를 찾아보니 정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검단점(黔丹店)

달천을 건너면, 사공들이 살았다는 상용두 마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옛길은 요도천(堯渡(夭桃)川) 북쪽 기슭을 따라 열려 있습니다만, 그보다 한 세기 정도 앞서 만든 <여지도서>에 실린 충원(忠原) 지도에는 요도천의 남쪽에 그려 두었습니다. 최근에 나온 <영남대로 답사기>와 <영남대로>등에서는 모두 요도천의 남안으로 길을 잡았고, 우리도 이 길을 따라 걷습니다. 참샘백이를 지나면 요도천 건너편으로 검단점(黔丹店)이 있던 검단리가 보입니다.

<영남대로답사기>에는 <대동지지>에 용안역(用安驛)에서 20리에 검단점이란 지명이 보인다고 했는데, 이는 <대동여지도> 14-3에 묘사된 이수를 그리 헤아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조선도> 권16에도 그렇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산 봉수와 대소원

이곳을 지나 대소원에 들기 전 그 남서쪽 봉화산은 마산 봉수대가 있던 곳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 봉수에 '마산봉수는 동쪽으로 대림산과 심항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음성현 가섭산에 응한다'고 하였고, <여지도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이곳 마산 봉수는 부산시 금정구 다대포 응봉(鷹峰)에서 비롯한 제2거 봉수로와 경남의 거제 등지에서 초기한 간봉이 만나는 거점 봉수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는 이곳에 봉수 표시가 없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봉화산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3번 국도를 버리고 옛 지방도를 따르면 원이 있던 대소원 마을에 듭니다. 대소원 자리는 조선시대 후기에 만든 지지와 고지도에 실려 있지 않아 일찍이 그 쓰임이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소원은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지금도 국도와 지방도가 지나는 가촌을 형성하고 있어 길손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할 밥집이 여럿 있습니다. 마침 이곳을 지날 즈음이 중화참이어서 우리는 예서 오랜만에 손맛 좋은 시골 아낙이 지어 온 정식으로 넉넉히 배를 불리고 길을 나섭니다. 대소교를 지나 요도천 북안으로 난 길을 따라 방죽안을 지나 장록개에서 길을 잘못 잡아 북쪽으로 솔고개까지 적잖은 거리를 헛걸음을 하게 됩니다. 마음을 다잡지 못했으니 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결국 오늘 오후 여정은 <대학>의 정심(正心) 편을 다시 한 번 값진 교훈으로 새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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