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기념일을 맞아 815 그릇의 국수가 푸짐히 준비된 토지마을은 변덕스럽게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비에도 고즈넉했다.

비 내리는 초가지붕 아래에서 먹는 국수는 맛보다는 멋이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공짜 점심에 다들 조금은 횡재한 기분으로 장터로 모여 들었다. 요란한 고명은 없었지만 소박한 국수 한 그릇과 후식으로 마신 시원한 냉 녹차 한 잔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점심 식사를 마치니 어느새 햇살이 환해졌다. 비 그친 여름의 초록은 선명하고 거침이 없었다. 산도 들도 나무도 온통 초록. 그 가운데 압권은 거지가 들어오면 석 달은 내쫓지 않는다는 인심이 나오게 했던 악양 너른 들판의 무르익은 초록이었다.

경남대학교 청년작가 아카데미의 여름캠프 참석차 하동 악양에 갔다. 갓 스무 살 안팎의 작가 지망생들이 선배 작가의 강의를 듣고 글도 쓰면서 보내는 3박 4일의 캠프는 젊음과 열정으로 풋풋하고 치열했다. 그 아이들의 모습 위로 스무 살 무렵의 내 얼굴이 겹친다.

고교 3학년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학력고사가 끝나고 곧바로 소설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워낙 이야기의 구성이 방대하고 인물도 다양해서 처음엔 노트에 등장인물들을 정리하며 읽어 내려갔다. 이야기에 빠져서 순식간에 책을 다 읽고 다음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멈춘 듯 지루했다. 책 속 수많은 인물이 살아가고 사랑하는 생생한 이야기를 보며 나도 언젠가 훌륭한 작가가 되어 이런 명작을 남기리라 비장한 각오를 하기도 했다. 그런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채워지지 않는 원고지에 절망하며 꼬박 뜬 눈으로 새웠던 젊은 날이 몇 밤이나 되었던지.

〈토지〉는 사람들이 살며 사랑하여 역사를 만들어간 이야기이다. 대단하다는 한 마디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비록 박경리의 고향은 아니나 〈토지〉의 무대가 된 이곳에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긴 일제 치하를 끝내고 광복을 맞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소설의 상황처럼 우리들도 함께 소설 속의 인물인 양 광복을 기념하며 기꺼이 잔치에 동참하게 된 것이 귀한 인연처럼 느껴졌다.

책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무척 달라진다.

열아홉 살 처녀의 관심사는 당연히 사랑이었을 터. 하여 당시에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책 속 인물 용이와 월선에게 단숨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사랑하면서도 운명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진 두 사람, 그 애틋한 엇갈림에 가슴을 앓으며 책을 읽었다. 그래서 내게 〈토지〉는 서희와 길상이 아니라 용이와 월선이 주인공인 책이었다. 토지마을이 조성되고 처음 이 곳을 방문했을 때도 나의 관심은 고래등 같은 최참판댁 기와집이 아니라 작고 초라한 용이네 집과 월선네 주막이었다.

지금의 나는 초라한 초가 대신 고래등 기와집을 주저없이 덥석 집어 들고 '사랑이 밥 먹여 주냐' 하고 외칠 속물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내 스무 살의 가장 뜨거운 표지판이었던 소설 〈토지〉의 무대에서 새삼스레 되돌아보게 된다.

비 내리는 악양에서 나는 그 젊은 날의 열정을 광복하고 싶었다.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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