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건물에 들어서면 늘 익숙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진다. 출근길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멋진 세레모니다. 경비실 아저씨 중 한 분이 음악을 무척 좋아하시는 분이라, 이런 혜택을 입는다. 특히 전날 과음이라도 했을라치면 아침에 다가오는 음악 소리가 더 정겹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다. 귓전으로 흘려듣는 정도를 벗어나면 클래식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대번에 싫증을 내고 만다.

몇 달 전 음악공부를 하는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피아노 신성(新星)’이라며 임현정을 들어보라고 했다. 젊은 나이를 무색케 하는 감성, 여성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강력한 타건(打鍵), 명인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테크닉 등등. 가히 신성-근데 나만 늦게 알았나?-이라고 일컬을 만했다. 잘 알려진 베토벤 ‘월광’을 들으며 아! 또 무서운 친구가 등장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몇 곡 더 들어보니, 금세 싫증이 났다.

왜 그럴까? 원래 한 가지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규정하는 일관된 형식이 쉬이 날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곧잘 듣게 되는 비발디의 ‘사계’를 보라. ‘ 장자라장장’ 하며 규칙적으로 등장하는 곡조가 그리 싫을 수 없다. 이런 곡을 들을 때면 흡사 내가 목각인형인 것처럼 느껴진다.

엄청난 스펙트럼…그래서 좋다

반면 재즈는 제멋대로(?)다. 오만가지 형식이 진짜 오만가지 감성으로 다가온다. 물론 재즈를 지탱하는 문법 또한 일정한 규칙을 가지지만, 큰 틀 속에서 자유롭게 오감을 자극하는 건 클래식 문법에 비할 바 아니다.

john mclaughlin

1969년 발표된 앨범 <Bitches Brew>는 록 재즈 퓨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음반이다. 다들 이 음반이 가지는 역사성과 탁월함을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지만, 고전이 늘 그렇듯 잘 듣지는 않는다. 나 또한 여기서 그 음악성을 찬양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단지 기타리스트 존 매클러플린(John Mclaughlin)이 들려주는 살 떨리는 기타연주만큼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정통 재즈 스타일이나 록음악 속주 스타일을 훌쩍 뛰어넘는 ‘긴장과 변주’는 재즈가 지닌 확장성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피아니스트 레이 브라이언트(Ray Bryant)는 피아노 한 대로 유서깊은 몽트뢰(Montreux) 재즈 페스티벌을 들썩이게 한 사람이다. 1972년에 발매된 솔로 라이브 앨범은 블루스와 스윙이 피아노라는 악기를 통해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반이다. 수록곡 중 <Rockin' Chair>를 80년대 말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처음 들었을 때다. 서정적인 블루스가 재즈 박자에 실려 넘실대는 느낌에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감동이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애비 링컨(Abbey Lincoln)은 또 어떤가? 지금도 <Blue Monk>를 들을라치면 ‘풍상(風霜)과 달관(達觀)’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요컨대 재즈는 엄청난 스펙트럼을 지닌 장르다. 수천 개 문(門)이 저마다 다른 색깔로 존재하는 요지경이다. 이럴 땐 이런 음악을, 저럴 땐 저런 음악을 입맛대로 고르면 된다.

원래 재즈는 과잉과 절제를 양 극단으로 삼고, 그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는 분야다. 비밥으로 대표되는 모던재즈는 ‘Sheets of Sound’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음을 어지럽게 내뿜는다. 즉흥(Improvization)이란 말에서 청자들은 날개 달린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텔로니어스 몽크(Thelonius Monk)로 대표되는 일군의 아티스트들은 이런 과잉을 절제라는 미학으로 끌어당긴다. 존 스코필드(John Scofield)는 그런 점에서 탁월한 기타리스트다. 버브 레이블에서 그가 녹음한 앨범 <Quiet>는 지금도 종종 듣는 애창 앨범이다. 스트링 반주에 맞춰 나일론 줄 기타를 느리게 더 느리게, 그것도 비틀거리는 박자로 연주한다. 잘못 들으면 언뜻 재즈 기타 초심자가 치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 필링은 가멸차다. 고수(高手)의 품격이 알알이 전해진다.

술을 즐겨 마시는 나는 한 집에서 오래 죽치지 못한다. 겉으로는 ‘지역경제를 살리려면 골고루 팔아줘야지’하며 너스레를 떨지만 본심은 어느 가게든 금세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걸리나 소주 한잔을 걸쳤다 하면 곧잘 시원한 맥줏집으로 이동하기 일쑤다. 다른 주종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마다하지 않는다. 음악도 그런 게 아닐까? 재즈는 하위형식과 질감이 너무나 다양하다. 입맛대로 골라 들을 수 있다. 해서 나에겐 알콜 취향이 곧 재즈 취향이 된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한 사람이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다양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팝 음악도 그렇잖아요!” 일리 있게 들린다. 팝 음악이야말로 다양한 스타일을 구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런 지적은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팝 음악은 외피는 다양하지만 음악 문법은 대동소이하다. R&B라는 말이 처음 유행을 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자.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가 멜로디를 심하게 굴릴 때만 해도 R&B는 나름 장르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음을 굴리지 않는 가수가 없다. 그래서 R&B라는 단어 또한 발라드에 그렇고 그런 ‘음 굴리기’를 보탠, 뻔한 유행이 되고 말았다.

다양성이란 그 인자들이 각기 개성 있는 음악 문법과 필링을 지니고 있을 때 쓸 수 있는 단어다. 이런 말이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한 사람이 아니다.” 무슨 말일까? 거장은 1949년에 쿨재즈 탄생을 알린 <Birth of the Cool>에 이어 1959년에 모달재즈 선구작인 <Kind of Blue>를 발매한다. 그 10년 후에는 앞에서 언급한 <Bitches Brew>로 세상을 놀라게 한다. 한 사람이 이토록 다양한 옷을 갈아입으며 이토록 박수를 받은 적이 있었을까? 그래서 마일스는 가장 재즈 아티스트다운 재즈 아티스트로 불린다. 말년에 남긴 앨범 연작이 노추(老醜)로 표현될 만큼 비난을 받고 있지만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생명의 다양성>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라틴아메리카의 한 나방종이 호주에서 선인장 과다성장을 막아 목초지를 구했다. 로지 페리윙클(열대우림 식물)은 호지킨병과 소아백혈병 치료약을 제공했으며, 주목(珠)의 나무껍질은 난소암과 유방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또 거머리 침에서 나온 화학 성분이 수술 중 혈전을 용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음악 세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풍성한 종(種) 다양성이 생물세계를 윤택하게 해주듯, 음악장르 또한 다양성에 의지해 생명력을 넓혀 나간다. 재즈는 그 정점에 있는 장르다. 물론 내가 지닌 변덕을 가장 잘 들어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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