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낮엔 사원으로, 밤에는 사장으로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붉은색 구두 한 짝이 그려져 있었고, ‘Director Aeri Jung’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매력 있고 독특한 명함이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도 잠시, 나머지 두 장의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건네받은 세 장의 명함을 손에 쥐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고민하고 있으니, 그는 자신을‘정애리’라고 소개했다.

잘나가는 쇼핑몰 사장인가? 아니면 들어가기 어렵다던 대기업 사원? 그것도 아니면 번듯하게 자기 가게가 있는 사장일까… 많은 의문이 머릿속에 뒤섞였지만, 그가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사회 초년시절,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타국으로 떠날 정도로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세 가지 직업으로 살아가는 정애리 씨. 아그라 타지마할 앞에서.
올해 서른이 된 정애리 씨는 구두, 소품 등 물건을 국외사람들에게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무역 업무를 하며, 경쟁력 있다고 생각한 미용산업에도 뛰어들었다. 무역 일과 미용산업,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일을 정 씨는 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그는 대범하지만 조금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수평선이던 인생그래프, 곡선을 그리다

정 씨는 의류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 의류학과를 전공하고, 남들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곧잘 받은 성적 덕에 전공을 살려 내수 의류 브랜드 회사에 취직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는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 잔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저 수평선만이 있는 그의 인생그래프에 변화가 온 것은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할 때쯤이었다.

“대학교 졸업 후 의류를 수출하고 수입하는 무역회사에 들어갔어요. 물건을 사는 사람은 홍콩에 있고 공장은 동남아에 있어 계속 영어로 대화하고 조율해야 했는데, 외국인 구매자와 영어로 계속 말하려고 하니 너무 두렵더라고요. 하는 일도 적성에 맞지 않았고요.”

세 가지 직업으로 살아가는 정애리 씨. 로마 바닷가에서.

그는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자 뒤늦게 어학연수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이 아니면 못 간다는 생각과 길게 봤을 때 어학연수를 갔다 오면 인생에 도움이 되겠다는 확신이 들어서다. 더 잘 될 것이라는 자신감은 자연히 따라왔다. 그렇게 그는 지금까지 그려 온 수평선 인생그래프에서 이탈해 홀연히 호주로 떠났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호주에서 그는 각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공부하고, 노는 법을 제대로 배웠다. 호주에서의 1년 3개월이라는 시간이 그를 잘 놀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정 씨는 자신이 무엇을 하면 재밌고 즐거운지, 뒤늦은 유학생활을 통해 먼 타국에서 알게 되었다.

“전 세계에 희소성 있는 물건 팔고 싶어”

세 가지 직업으로 살아가는 정애리 씨. 런던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신세가 막막했지만 이내 ‘신발을 국외로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터넷이 발달한 한국은 가격비교가 심해 조금만 검색해도 물건 가격이 나오지만, 외국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그는 구두에 관심이 많은 친구와 함께 외국 오픈마켓 사이트에서 물건을 올려놓고 팔기 시작했다.

“첫 물건을 주문받았을 때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요. 미국사람이 송아지 털로 만든 핑크색 샌들을 주문했는데, 첫 주문이라 포장도 정성스럽게 하고, 첫 주문 기념으로 샌들 사진도 찍었어요.”

세 가지 직업으로 살아가는 정애리 씨. 런던 2층 버스 안에서.

대부분 미국사람이 물건을 주문하지만, 간혹 아프리카에서 샌들을 주문하기도 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나라에서 그에게 물건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주문한 곳이 어디인지 그는 세계지도를 펴서 확인하고, 지구 저편 새로운 곳을 눈으로 새겼다.

“물건 취향이 제일 독특한 나라는 아무래도 미국이에요. 우리나라에서 3000 원 줘도 안 사갈 물건을 몇만 원씩 주고 사가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쁘다 하는 것은 오히려 덜 사가고요. 인구가 많으니 취향도 다양하구나… 새삼 느꼈죠.”

세 가지 직업으로 살아가는 정애리 씨. 치앙마이 선데이마켓에서 치마를 고르는 모습.
처음 이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그는 물건이 잘 안 팔려 애를 먹었다. 홍보와 광고를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데, 그때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때부터 그는 저렴하고 빠르게 국외로 물건을 배송하는 법부터 각 나라 취향까지 다방면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고객 만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고객 만족은 생각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물건을 조금 더 예쁘게 포장해서 보내고 싶었어요. 제가 배송하는 물건이니만큼, 리본이라도 하나 더 묶는 등 나만의 색을 지닌 포장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포장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죠.”

한 달에 판매되는 물건이 소품, 신발 등 300개 남짓이다. 지금까지 정 씨가 택배를 보낸 나라만 해도 20군 대가 넘었다.

그럭저럭 잘 되는 편이지만 정 씨는 안주하지 않고 남들이 팔지 않는 희소성 있는 아이템을 세계에 내어 놓고 싶어 끊임없이 아이템 고민을 하고 있다.

“이 일은 기회의 직업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없는 것을 사와 팔 수도 있고, 또 우리나라에 있는 것을 다른 나라에 팔 수도 있잖아요. 망하든 아니든 계속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를 사귀거나 나의 발전을 위해서도 괜찮은 것 같고요.”

   

사실, 이 일을 하며 이윤은 얼마 안 남는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돈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 이 일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돈을 포기하면 자연히 많은 시간이 따라와서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돈을 버는 대신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한 달씩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그는 20곳이 넘는 타국에 자기 흔적을 남겼다.

“뭐든 상상하는 대로 이뤄지는 것 같아요”

세 가지 직업으로 살아가는 정애리 씨.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렇게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중 함께 하던 친구는 디자이너를 하고 싶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정 씨는 창원에 있는 대기업 계약직에 합격해 창원으로 오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홀로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오픈마켓 일을 하게 되었다. 정 씨 집 한쪽에는 아직 발송하지 않은 택배 상자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창원으로 온 그는 이번만큼은 회사생활을 오래 하고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사회 초년생일 때에는 자신이 목표한 것을 이루고자 회사를 그만뒀지만, 서른이 된 지금 또다시 같은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면 무엇하나 오래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열심히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열심히 놀고… 그런 생활도 좋지만, 한국에 살고 있으면 그런 부분은 어느 정도 포기하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 걸 지금 배우는 중입니다.”

정 씨는 회사에서는 수출 관련 일을 맡아 칠레에 있는 구매자와 연락하고, 기자재 납품관리를 하고 있다. 회사 입사 초기 정 씨는 무역 관련 용어가 생소해 어려움을 겪었는데, 원활하게 일을 하고자 지금은 짬짬이 무역 공부도 하고 있다.

대부분 직장인은 회사에 다녀온 후 피로에 지쳐 무엇하나를 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정 씨는 생각하는 족족 하는 편이었다. 덕분에 정 씨는 지금 회사 일과 오픈마켓 일을 하며 미용실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는 사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남자친구가 헤어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데, 옆에서 보니 미용 산업이 괜찮다 싶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죠.”

세 가지 직업으로 살아가는 정애리 씨/김유화 기자

남들이 지나치는, 사소한 것을 집어내는 능력이 그녀에게 있는 걸까. 평일 낮에는 회사 사원으로 밤에는 오픈마켓 사업으로 정신없이 보내고, 주말에는 버젓한 미용실 사장으로 생활하는 그였다. 지금은 미용실에서 단순히 매장관리를 하고 있지만, 조만간 미용기술도 배워 볼 생각이다.

정 씨는 “창원에서 미용실을 3개 정도 운영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단시간에는 안 되더라도 천천히 키워나가야죠. 미용공부도 체계적으로 해 미용전문가를 양성하는 미용학원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다고 웃어넘겼다. 미용실 이야기와 함께 오프라인 매장을 열고 싶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세 가지 직업으로 살아가는 정애리 씨.

“중국에 가면 동대문보다 훨씬 큰 도매 상가로 이루어진 도시가 있어요. 그곳에 가서 제가 물건을 사고, 그 물건을 오프라인에서도 팔고 싶어요.”

많은 일을 하는 정 씨였기에 ‘휴일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무심할 정도로 정 씨는 틈틈이 빵 굽는 법을 배우고 꽃꽂이를 배우는 등 남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있었다. 대학 시절 의류학을 전공하며 색감을 공부해서일까. 그는 제법 그럴듯하게 색감이 나오는 꽃을 보면 그저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꽃꽂이에 집중하면 할수록 마음이 안정된다는 그에게 꽃꽂이는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다.

   
정말 10년 뒤 정 씨 모습이 궁금했다.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함으로 무엇이든 척척 해낼 것 같았다.

“언젠가 인도에 가고 싶은 마음을 다잡은 적이 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인도에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하나씩 정리하고 인도로 간 거죠. 무엇을 상상하면 상상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것 같아요. 못해 본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10년 뒤에는 어떤 것에 꽂혀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저도 모르겠어요. 단순히, 조금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서 어디를 가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물론 지금도 그렇지 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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