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 박희상·웬티 옥 진 부부

2008년 어느 날, 37살 노총각 박희상 씨에게 친구가 늘 하던 닦달을 한다. 결혼해라! 결혼해라! 결혼해라! 그리고 사진을 한 장 건넨다. 사진에는 어여쁜 베트남 처녀 한 명이 웃고 있었다. 희상 씨는 그저 멍하니 꽂히고 만다.

"친구가 결혼업체 부장이었어요. 평소 결혼이 늦다고 구박을 많이 했지요. 그러다가 사진을 보여 주는데 그냥 마음이 가더라고요."

마침 사진 속 주인공 언니가 3년 전부터 한국에 살고 있었다. 희상 씨는 훗날 처형이 될 분을 먼저 만나 다른 사진도 보게 된다. 마음을 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희상 씨는 바로 다음날 베트남행 비행기에 오른다.

"부모님께 여행도 시켜드릴 겸 같이 갔지요. 저도 그렇지만 부모님이 더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김해공항에서 베트남 호찌민까지 5시간, 호찌민에서 다시 5시간을 더 들어간 동네에서 만난 웬티 옥 진 씨는 19살 풋풋함이 온몸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사진보다 더 예쁘더라고요. 외모도 한국 사람처럼 보였고, 오히려 제가 더 베트남 사람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서로 낯선 게 덜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결혼업체를 통한 만남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서로 마음에 들면 바로 일을 진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서는 게 규칙이었다. 희상 씨 마음은 쉽게 결정이 됐지만, 웬티 옥 진 씨는 아무래도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낯선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내가 처음에는 무서웠다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나이도 많고…. 이쪽에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한국에 시집가는 경우가 있는 만큼 아내도 준비를 했는데 막상 마음 정하기가 쉽지는 않았겠지요."

서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 다음 날 결혼식은 진행됐다. 그리고 희상 씨가 베트남에서 지내는 시간까지가 신혼여행이었다. 며칠 뒤 희상 씨는 한국으로 먼저 돌아온다. 이 역시 업체를 통한 만남에서 정해진 규칙이라고 한다.

"결혼식을 해도 바로 한국으로 함께 오지는 않아요. 신부는 4개월 동안 한국 문화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되지요. 그 사이 관계 당국과 인터뷰도 합니다. 진짜 결혼인지 위장 결혼인지 확인하지요. 그 사이 저도 한 번 더 베트남을 갔고요.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면 신부는 일주일 정도 처가에서 더 지냅니다."

웬티 옥 진 씨가 한국에 온 것은 2009년 1월쯤, 신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 그저 처음에는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사전 인터뷰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 것인지, 따로 살 것인지를 묻는다고 하더라고요. 아내는 부모님과 함께 살기를 원했고 저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요."

웬티 옥 진 씨는 시어머니와 함께 다문화센터에 다니면서 한국 적응을 시작한다. 다문화센터에서는 먼저 한국에 적응한 베트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웬티 옥 진 씨가 낯선 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고, 희상 씨와 가족들이 웬티 옥 진 씨에게 적응하는 것을 또 거들었다.

"다문화센터에 계시는 선생님이 집에 종종 방문해 의사소통을 거들었어요. 우리끼리 있을 때는 손짓, 발짓에 책을 펴놓고 맞춰가며 대화하기도 했고요. 다행스럽게도 아내가 한국말을 빨리 배우는 편이었어요."

서로 알기 전에 결혼부터 한 사이였다. 신혼보다는 연애가 더 급한 부부였다. 건설업체에서 일하는 희상 씨는 즐겼던 술자리도 하나씩 포기하며 퇴근하기 무섭게 아내에게 갔다. 낯선 곳에서 의지할 곳 없는 아내에게 희상 씨가 해야 할 최소한 의무이기도 했다.

"아내가 처음에는 음식 적응을 잘 못했어요. 그래서 주로 베트남 음식점에 가는 게 데이트였지요. 그리고 쇼핑하는 것을 좋아해서 함께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드라이브도 하고 그렇게 했지요."

서로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던 부부가 의사소통이 한층 수월해지기까지는 6개월 정도 걸렸다.

희상 씨가 베트남 말에 능숙해진 것도 아니고, 웬티 옥 진 씨 한국어 실력이 부쩍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부부는 서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이해하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상대가 하는 말을, 마음을 알아들으려고 다가설수록 착오는 점점 줄었다. 상대 마음을 먼저 알고자 애쓰는 사람끼리 언어는 큰 걸림돌이 아니었다.

웬티 옥 진 씨는 적응하기 어려웠던 한국 음식을 이제는 곧잘 만들어 낸다. 희상 씨도 처음에는 좀처럼 입에 맞지 않던 베트남 음식에 제법 익숙해졌다.

아내는 남편을 '오빠', 남편은 아내를 '자기야' 또는 '진아'라고 부르며 이들은 서로에게 더욱 다가서고 있다.

"좀 여유가 있으면 처가에 한 번씩 같이 가거나 보내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제일 미안해요. 아내도 많이 섭섭할 텐데 그렇게 표를 내지 않는 게 고맙기도 하고요."

아직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다. 어서 2~3명 정도 낳아서 북적북적 사는 일상은 희상 씨 희망이기도 하다.

아내에게 평소 앞에서 못했던 얘기 한마디를 부탁했다.

"여보! 앞으로 쭉 사랑하고 열심히 노력할 테니 힘들어도 참고, 돈도 많이 모아서 베트남에도 갑시다. 여보 사랑해!"

전화기 너머로 야유인지 부러움인지 알 수 없는 직장 동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혼 기사를 매주 월요일 6면에 게재하고 있습니다.

사연을 알리고 싶은 분은 이승환 기자(010 3593 5214)에게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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