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맥을 찾아서 - 한국 대표 탈춤놀이 고성 오광대

고성오광대는 경남 고성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가면극이다. 가면극은 우리가 흔히 탈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탈을 쓰고 춤을 추며 재담을 하는 오래된 우리 공연예술로 5과장으로 구성돼 있다.

오광대라는 뜻은 다섯 마당(5과장)으로 놀아지기 때문이라는 말과 다섯 명의 광대가 나와서 노는 놀음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 가운데 5과장으로 구성된 것은 고성의 경우이고 다른 지역은 다르게 구성되기도 해 경남 일대의 모든 탈놀이 이름으로 설명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동서남북 중앙의 다섯 방위(오방)를 상징하는 다섯 광대가 나와서 하는 놀이가 주가 되었기에 오광대라는 이름으로 두루 쓰이게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성오광대의 역사는 조선 말 고종 30년(1893년) 고성의 부사로 부임한 오횡목이 음력 12월 30일 제석을 맞아 읍내에서 벌어진 세시행사를 목격하고 이 광경을 고성 총쇄록에 기술하고 있다.

고성오광대 공연 모습/양창호 기자

난 1920년 정화경·이윤희 등의 명인이 나오고 이들은 김창후·홍성락·천세봉 명인에게 예능을 대물림했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 식민지 상황이었다. 백성의 생활상은 일제의 수탈로 점차 피폐해져 갔다. 해방이 되자 곧 세 명인은 오광대 모임을 규합하고자 빠른 행보를 했다. 그 첫 열매가 이듬해인 1946년에 있었다. 당시에 최신식 건물로 가야극장이 개관했는데 낙성식 기념공연으로 고성오광대 놀이를 공연했다.

해방 후 탈놀이가 복원돼, 빠른 것이 대략 1950년대 후반 이후인 것을 고려하면 고성의 1946년 공연은 가면극 부흥의 시대를 앞당긴 매우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탈춤으로 현존하는 영남형 탈춤 중 가장 그 원형에 가깝게 전승되고 있다.

제1과장 문둥북춤

고성오광대 공연 모습/양창호 기자
불구의 문둥광대가 굿거리장단에 문둥탈을 쓰고 등장하여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통곡한다. 이는 조상이 지은 죄로 자손이 문둥이가 되었다는 인과응보의 상황으로 처음에는 좌절과 절망으로(대사 없이 춤으로 진행)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병마의 고통을 춤으로 표현하다가 후반부로 가면 내면의 고통을 참고 극복하며 다시 일어나 새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 과정을 춤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제2과장 오광대놀이

문둥광대가 퇴장하면 공연마당에 둥글게 앉아 있던 양반 광대들이 덧보기 장단에 맞추어 원양반을 선두로 동시에 마당 안으로 뛰어들면서 군무를 춘다. 말뚝이와 원양반이 번갈아 원안에서 배김새를 하고 원양반 그리고 말뚝이가 개인무를 추며 재담을 나누며 놀다가 나중에 비비가 등장해 양반들을 몰아내는 과장이다. 2과장의 내용은 봉건 사회에 있어 권세로 일반 평민들을 멸시하며 천대하고 괴롭히는 그 시대 양반의 추악상을 말뚝이라는 민중의 대표를 내세워 신랄하게 비판하고 조롱하는 과장이다.

제3과장 비비과장

2과장에서 여러 양반이 한창 흥겹게 놀고 있을 때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다 잡아먹는 괴물 비비가 나타나면 양반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친다. 그 중 한 양반을 붙들고 마음대로 놀려대며 혼을 내는 이 과장은 비비가 갖은 횡포로 평민들을 괴롭히는 양반을 위협, 조롱하면서 양반들의 등쌀에 쌓였던 울분을 풀리게 하는 마당이다.

제4과장 승무과장

입산수도하는 스님이 속세의 연정에 이끌려 기생의 유혹에 빠져 놀아나는 파계승을 풍자한 과장으로 제자 각시가 요염한 춤으로 교태를 부리자 마음이 동한 스님이 제자각시를 유인하고자 춤을 추면서 접근해 같이 어울려 둘을 어깨에 끼고 퇴장한다. 이는 서민들의 정신적 지주여야 할 종교의 올바른 구도의 길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잘못된 종교를 개선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제5과장 제밀주과장

고성오광대 공연 모습/양창호 기자

작은 어미 놀음으로 시골양반이 집을 나가 첩을 얻어 놀아나고 있는데 영감을 찾아 팔도강산을 헤매던 큰어미와 영감이 서로 만나게 된다. 이때 작은 어미가 해산기가 있는데 황봉사가 경문을 읽더니 이윽고 아들을 순산한다. 그 아이를 받아 큰어미가 품에 안고 어르나 작은 어미와 아이 쟁탈을 벌이다 결국 아이를 떨어뜨려 죽이고 만다.

이에 울분을 느낀 작은 어미에게 큰어미 또한 죽임을 당한다. 이 과장은 처첩 관계에서 빚어지는 가정비극과 죽음에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린 마당이다. 이 과장은 춤보다는 연극적인 면이 강하며 그 춤사위가 일반 생활의 춤과 흡사하고 또한 비극으로 끝맺음하지만 인간은 평등하다는 내용을 엿볼 수 있다.

고성오광대 보존회

“소중한 전통문화, 보다 널리 알려야”

이윤석 고성오광대 보존회 이사장/양창호 기자
고성오광대 보존회(이사장 이윤석·63·사진)는 1946년 고성 오광대놀이 재현을 시작으로 1956년 고성오광대 추진위를 발족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고 나서 사단법인 고성오광대보존회를 구성해 활동, 지난 1973년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 지난 1974년에는 대통령상을 받았다.

고성오광대보존회에서 매년 개최하는 학생전수는 1970년부터 현재까지 전국 4만여 명의 대학생과 일반인에게 고성오광대 놀이를 전수했으며, 이는 전국 무형문화재 중 가장 오랜 역사와 숫자를 자랑한다. 현재 매년 정기공연과 기획공연을 비롯해 2001년 9월 일본 야마구치현 공연을 개최했다.

같은 해 11월 미국 뉴욕을 비롯한 6개 주 순회공연을 했으며, 2002년 5월 16일부터 20일까지 월드컵 축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돔 극장 공연, 오사카 민족학 박물관 연구공연을 했고, 월드컵 축하 상설공연, 아시안 게임 축하공연, 2003년 5월 오사카 국제 교류 센터에서도 공연을 했다.

2005년 후하훗트 세계민속축제 공연, 2006년 경남 고성공룡세계엑스포 공연,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07년 체코스트라니치 국제민속축제, 2008년 스페인 세비야 축제, 2009년 태국 람팡 드럼축제, 2010년 미국 LA한인축제, 2011년 말레이시아 말라카 드럼축제 등 지금까지 800여 회의 국내외 각종 공연에 참가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탈춤단체이다.

현재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에 전수회관이 있으며 보유자와 이수자 등 30여 명의 전수자로 구성돼 있다.
이윤석 이사장은 “돌이켜보면 우리 고성오광대는 많은 사람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힘든 시절도, 즐거운 활동도, 또 헤어짐의 슬픔과 새로운 만남, 그리고 창의적 도전 등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 탈을 손질하며 짚신을 조이고 패랭이를 쓰는 심정으로 우리 고성오광대는 조상이 남겨주신 소중한 문화를 지켜나가겠다”라고 밝혔다.

한편, 고성오광대 전승자로는 고(故) 김창후(원양반)·홍성락(문둥북춤)·천세봉(승무)·배갑문(원양반)·남상국(악사)·최규일(비비양반)·박진학(젓광대)·이금수(악사)·이윤순(악사)·허판세(원양반) 선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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