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25) 수안보~충주

지난 여정에서 제주 유배시절 홍윤애와 지순한 사랑을 나눈 조정철의 무덤이 있는 조산의 돌고개를 넘어 수안보에서 길을 접었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대표적 온천 휴양지의 한 곳인 이곳 수안보에서 충주를 향해 길을 잡아 수회리-갈마고개-단월역에 이르는 구간을 걷습니다.

수회리 가는 길

수안보에서 수회리로 이르는 길모퉁이에는 성황당과 옛길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성황당을 지나서 고개를 돌아 넘어가니 지금은 폐쇄된 유스호스텔이 있는데, 예서부터 길은 감입곡류(嵌入曲流)하는 하천을 따라 열려 있어 꺾임이 심합니다.

오산마을을 지나 봉화뚝마을을 거쳐 마당바위를 지나면서 우리 일행은 길가 노점에 들러 이곳의 명물인 충주 복숭아를 사서 허기를 달랩니다. 이곳에 있는 '패랭이번던'이라고도 불리는 마당바위는 옛길을 일러주는 표지이며, 게서 수회리로 약간 더 가면 바위에 '현감서공유돈선정불망비(縣監徐公有惇善政不忘碑)'라 새긴 마애비가 있어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줍니다.

물이 돌아드는 곳이라 수회리(水廻里)라 이름 붙은 이곳은 옛 주막거리이자 수회참(水回站)이 있던 곳인데, 충주와 오가던 길목이라 교통의 요충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착각을 일으켜 국도 3호선이 지나는 갈마고개(갈마현:渴馬峴)에서 길을 되짚어 와서 엉뚱하게도 장고개를 넘고 말았습니다.

갈마고개

   

갈마고개는 충주의 남쪽에 있는 고개라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옛적에 이 고개는 충주와 연풍의 경계를 이루는 남쪽 토계(土界)였던 것입니다. <여지도서> 충원 도로에 '관아로부터 동남쪽으로 연풍부와의 경계에 이르는 갈마현대로(渴馬峴大路)는 30리다'고 했으니 이곳이 지경(地境) 고개였음을 알 수 있고, 그 길은 동래로(東萊路)와 통영로(統營路)가 지나는 대로였던 것입니다.

갈마고개에서 수회리로 돌아오니 마을 회관에는 영조 37년 신사(1761)에 현감 정의하를 기려 세운 '현감정후의하청덕선정비(縣監鄭侯義河淸德善政碑)'를 볼 수 있었는데, 이 또한 길의 지시자입니다. 이때가 마침 중화참인지라 경찰학교와 가까운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날은 일진이 사나우려고 그랬는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장고개를 향해 길을 잡았는데, 중간에 과수원이 들어서면서 길이 사라져 물어물어 이 고개 저 고개 오르느라 땀 깨나 흘렸습니다. 마을 이름이 수회리라 그랬을까 물이 돈 게 아니라 우리가 멀쩡한 한낮에 링반데룽(Ringwanderung:환상방랑)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새술막

어렵사리 고개를 내려서니 점말과 새술막 사이로 길이 나옵니다. 그날 우리가 이곳으로 내려섰을 때 마침 길가 하우스에는 고미술품 즉석경매가 열리고 있어 호기심에 잠깐 들렀더니 나그네의 걸음을 붙잡아 세울 정도는 못됩니다. 내처 길을 잡아 새술막에 드니 여기는 예전에 마방(馬房)이 있던 곳이라 전합니다. 마을 이름으로 보자면, 이곳에는 길손들을 위한 주막이 있었을 터이니, <여지도서> 방리 살미면에 나오는 신주막리(新酒幕里)가 바로 이 마을입니다. 북쪽으로 조금 더 가니 원이 있던 원터마을이 나오고, 그 위는 좌수(座首) 노릇을 한 구실아치가 살았던 좌수동입니다. 예서부터는 골이 깊어지는데, 소향산 마을을 지나면 도로와 나란히 흐르던 내가 달천(達川)에 섞입니다.

대림산성과 봉수

이즈음에서 만나게 되는 산이 충주의 진산인 대림산(大林山)입니다. 이곳에는 산성과 봉수가 있었는데, 대림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고적으로 분류되어 있어 오래 전에 그 쓰임이 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림산봉수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대림산 봉수(大林山 烽燧)는 관아의 남쪽 10리에 있다. 남쪽으로 연풍의 주정산(周井山)으로부터 신호를 받아서 서쪽으로 마산(馬山)에 신호를 전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곳에서 달천과 나란하게 열렸던 옛길은 강가 바위벼랑을 깎아 낸 잔도(棧道)였습니다만, 지금은 이리로 3번 국도가 열리면서 옛길의 자취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옛 비리길을 덮어쓴 길가에는 물에 떠내려 온 씨앗이 온통 박꽃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길손의 마음을 밝게 해 주고, 저물녘 달천 안 바위섬에는 왜가리가 떼 지어 앉아 날개를 쉬던 모습이 은빛 물결에 비쳐 흔들리는 실루엣으로 다가옵니다.

단월역 가는 길

이제 충주가 멀지 않습니다. 길손들의 발걸음이 어느새 단월역(丹月驛)이 있던 충주 들머리의 유주막(柳酒幕)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술막의 이름에 유(柳)가 붙은 것은 400여 년 전 월봉(月蓬) 유영길(柳英吉)이 이곳에 내려와 터를 잡았을 때, 그의 동생인 유영경을 비롯한 많은 유씨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즈음에 있던 단월역은 연원도(連源道)에 딸린 역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예전 단월부곡의 땅인데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지도서>에는 '연원역에 속한다.

관아의 남쪽 10리에 있다'고 했고, <대동지지>에는 '본래 단월부곡이며, 남쪽 10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는 지금의 유주막 마을의 취수장 일원으로 헤아려집니다. 그런데 일본인 도도로키 히로시의 <영남대로 답사기>에 "<대동지지>에는 '단월역(달천도)에서 10리, 일운 유주막'이라 쓰여 있으며"라 했는데 어디서 전거를 구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월역이 있던 단월동은 역이 있어 역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이 왜군을 막기 위해 병사 8000을 주둔시킨 곳이라 전해집니다만, 이 전쟁에 앞서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충주의 형승은 '남쪽 방면의 인후(咽喉)에 자리 잡고 있는 땅이다'고 한 점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었습니다. 그랬었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되뇌며, 충열사를 향해 난 옛길을 따라 길을 잡아 걷습니다.

   

옛길은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와 충열사 사이 낮은 구릉의 남쪽 비탈에 연해 있는데, 지금도 옛 길가에는 정려각과 경주이씨효행비(慶州李氏孝行碑)가 남아 있어 이곳이 옛길임을 일러줍니다. 하지만 충열사로 이르는 길은 만만찮습니다.

옛길은 최근 조성되고 있는 주택단지에 의해 소멸되었고, 충열사 일원은 사적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어 외곽에 쇠로 만든 울타리를 둘렀기 때문입니다. 충열사(忠烈祠:사적 189호)는 이곳 대림산(大林山) 자락에서 난 인조 임금 때의 명장 임경업(林慶業)을 기리기 위해 숙종 23년(1697)에 세운 사당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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