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공무원] (47) 통영시 행복나눔과 이유국 씨

19년 전, 그는 통영시 한산면사무소에서 쌀 되를 되고 있었다. 매월 20일이 소위 '배급날'이었다. 줄을 쭉 서면 식구 수대로 되를 되어 줬다.

"쌀과 보리를 되로 나눠주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이니까 나눠주다 보면 주관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필요한 양식이고 어떤 사람에겐 술로 바꿔먹는 쌀이 되기도 했다. 그땐 공무원에게 재량이란 게 있었다. 절박한 사람에게 더 주고 싶은…." 그는 웃었다.

한산도에서 용호도·죽도 등 관할 섬으로 출장가면 숙박을 하고 오던 시절, 그는 그 시절 복지직으로 일하던 때를 생각했다. 94년 4월 이후 그는 줄곧 통영시 사회복지직 공무원으로 살았다. 복지직이 "천직"이라고 말한 그는 그의 직에 진지했다.

   

이름은 이유국(44). 고향은 경북 봉화. 재훈(15)·금미(10)의 아버지고 이양경(43)의 남편으로 살아가고 있다. 통영시 46명의 사회복지직 중 한 명이고 통영 복지직공무원 모임인 사회복지행정연구회 회장이다. 야간 대학을 나와 복지 정책 등을 알려주고 싶어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그는 통영시 행복나눔과에서 육아보육 업무를 맡고 있다. 더 젊어 그는 일용 노동자로 삼천포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복지공무원에 응시하면서 지금까지 공무원으로 살고 있다.

통영시 도천동에서 근무 당시인 2005년, 도천동사무소를 찾아온 기초생활수급자인 남자는 조용히 그리고 조곤조곤 이야기했다고 했다.

"좀 올려달라!"

남자는 책상 위에 돌돌 만 신문지를 놓고 상담 중이었다. 기초생활수급비, 즉 생활비를 올려달라는 부탁에 그는 규정을 들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남자는 말린 신문지를 폈다. 무쇠 칼이 신문지에서 나왔고 그는 기겁했다.

"교도소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분이 있었다. 교정시설과 연계해 3개월 생계비 지원을 위해 임신한 여직원과 함께 현장에 나갔다. 단칸방인데 부엌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갔고 신발을 벗지 않고 방안에서 쪼그려 앉아 상담했다. 그 사람이 우리가 공무원이라고 출소 후 전세금 빼 도망간 아내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출소자가 방안에 있던 유리를 들고 여직원을 찌르려 했다. 내가 몸으로 막으려 했는데 얼마나 아찔했는지 모른다."

삶이 갑갑한 사람들의 돌발행동은 언제 어떻게 터져 나올지 몰랐다. 이럴 때마다 그는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소위 트라우마였다.

또 이런 사람들이 사무실을 찾아오면 본능적으로 취했는지를 살피고 다음은 손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남자 복지직이 이러한데 여직원은 오죽하겠나. 이런 것과 같이 복지직엔 안전 보호 장치가 없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대부분 시민들은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했다. 복지직은 도움을 주는 업무라 수급자에게 감정적 골이 생기지 않는 한 대부분 고마워한다고 했다. 복지직의 매력은 이런 거였다.

그는 인간적 상담을 하기 위해 기꺼이 낮술에 취한 이와 함께 한 잔 하기도 했고, 명절 때 기탁된 쌀을 등짐 져 가져다 주기도 했다. 때론 기다리고 때론 다시 찾으며 그는 현장을 중시했다. 그렇게 그는 19년을 복지직으로 일했다.

"고맙다고 할 때."

그는 이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현재 업무인 보육직에 대해 그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통영시 110개 어린이집 4600여 명 영유아를 지원하는 통영시 공무원 3명 중 한 명이다. 주로 어린이집 위생·급식·안전 아동학대 등의 지도·점검·관리를 맡고 있다.

"늘어나는 업무에 비해 인원이 적고 업무 자체가 열악한 게 현실이다."

그는 "보육업무는 무상교육으로 가고 있다. 전액 국가가 지원한다는 것이다"며 "어린이집에는 막대한 예산이 지원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맡기는 부모의 입장에서 서비스 질 향상을 못 느낀다는 것도 문제다. 자주 나가고 자주 접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했다.

현장을 중시한다는 그는 "앞 담당자보다 2배를 더 다니고 더 열심히 하려 한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장을 알아야 민원인이 원하는 답을 할 수 있고 일에 대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복지직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자기 직업을 "천직"이라고 몇 번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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