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하이델베르크와 일본 교토에는 각각 '철학자의길'이라는 관광 명소가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경우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헤겔·야스퍼스·괴테 등 유명 철학자들의 사색 코스였다 해서, 교토의 경우는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자였던 니시다 기타로 교수가 즐겨 걷던 길이라 해서 '철학자의길'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었다.

관광객들은 이 길만 걸으면 뭔가 대단한 철학적 성찰을 얻을까 싶어 다리품을 팔며 일부러 찾지만, 정작 그렇게 찾아간 길은 이정표 하나 덜렁 있을 뿐 초라하기 그지없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하이델베르크와 교토의 역사와 전통이 아니라면, '철학자의길'은 그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조금 호젓하고 아름다운 길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걷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인데 우리는 항상 그 이상을 요구한다.

'철학자의길'이 정작 매력적인 것은 바로 초라함이라는 역설(逆說)에 있다. 사람들은 길을 향해 사색과 명상이라는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한다. 하지만 사색과 명상은 걷기라는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 길이 있어 저절로 사색과 명상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의미심장하고 화려한 길은 오히려 의식을 분산시킬 뿐이다.

도심 속 골목길은 사람의 걸음을 더디게 하지만 지나치게 감성을 자극한다. 이름난 해안길과 산길은 주변의 풍광에 눈이 머문다. 비어 있으되 적막하지 않고, 함께 걷되 말하지 않아도 좋을 길. 그래서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고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라면 어디든 '철학자의길'이 될 수 있다.

집에서 20분쯤 걸어가면 제주도 올레나 지리산 둘레길 못지않은 근사한 길이 있다. 울창한 소나무숲과 바다의 경계 사이에 놓인 길이다. 바다가 지척인데 숲에 가려 정작 바다는 잘 보이지 않는다. 숲에서 듣는 파도 소리가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 10여 년 전부터 이 길을 수도 없이 걸었다. 적어도 내게는 하이델베르크나 교토 못지않은 사색과 명상의 길이었다. 철학자가 되고 못되고는 내 탓이지 길 탓이 아니었다.

한데 언제부턴가 이 길에 국적불명의 이름이 붙더니 끊어진 길을 이어 붙이고 이정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위한 벤치도 하나 둘씩 늘어났다. 야간에도 걷게 해달라는 민원을 핑계로 보안등까지 설치됐다. 급기야는 시야를 확보한답시고 소나무를 베어내고 전망대까지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어쩌다 지인들이 오면 관광삼아 안내할 뿐 더이상 그 길을 걷지 않는다. 어차피 내 땅이 아니기에 관광객에게 그깟 길 좀 양보하는 것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마구 파헤치는 바람에 비가 오면 군데군데 토사가 흘러내려 물길이 생기고, 소나무 뿌리가 드러나고, 주말이면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꼴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민다.

우리는 늘 이런 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염치가 기본이듯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염치란 게 있어야 마땅하다. 인간이 자연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걷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인데 항상 그 이상을 요구한다. 명상과 치유를 한답시고 자연에 생채기를 내는 몰염치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걸을 때마다 미안해 죽겠는데 사색은 개뿔.

/박상현(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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