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안타까운 순간] 납북어부 이상철 씨 '간첩 누명' 언제까지(하)

간첩 누명을 벗기 위한 이상철 씨 유족의 법정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2010년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으로 유족들은 다시 법에게 물었다. '이제는 진실을 밝혀달라고'.

재심사건을 맡은 창원지법은 2011년 10월 "간첩 혐의를 인정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이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또 바뀌었지만, 2012년 8월 지금까지 이 사건은 진행형이다.

◇"간첩 혐의 이렇게 조작됐다"

이 씨는 1971년 9월 납북돼 1년 만에 돌아왔다. 72년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의 성과였다.

'납북어부'라는 꼬리표 탓에 뱃일을 하기 어려워진 그는 일거리를 찾아 76년에 거제로 왔다. 거제에서 콘크리트공·페인트상을 거쳐 대우조선 시설관리부 하청업체 토목반장으로 일하게 된 그는 83년 11월, 느닷없이 보안부대 수사관에게 끌려갔다.

제502보안대 지하실에서 그는 갖은 고문과 협박을 받았다. 보안대는 이 씨가 납북 기간 정치학습과 지하당 조직방법·통신조직 및 연락방법·공작원 접선 방법 등을 교육 받아 돌아온 뒤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조서를 작성했다.

검찰에 사건이 송치될 때까지 이 씨는 38일 간 가족뿐 아니라 변호인 면회가 금지되는 등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당시 마산지검은 불법구금 사실이 확인됐는데도 아무런 시정 조치를 하지 않았고, 검사 조사 때도 보안부대 수사관들이 동행했다.

결국 이 씨는 1975년 서울·강릉KBS 라디오방송인 〈오후의 교차로〉에 노래를 신청해 사업 착수(간첩 활동)를 알렸고, 거제에서 국가 기간산업체인 대우조선소 시설에 관한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했다는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또 동료들에게 '이북에는 탁아·유치원·인민학교 시설이 잘 돼 있고 무료로 공부시켜 줘 무식자가 없다. 누구나 직장을 보장해줘 실업자나 거지가 없다'는 등 말을 해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우월성을 찬양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검찰의 항소 이유

검찰 기소로 14년 간 옥살이를 하고 98년 출소한 이 씨는 "형제와 자식들에게 더는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출가해 스님이 됐다. 2007년 2월, 57세 나이로 숨질 때까지 반평생을 간첩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씨 사망 이후에야 과거사위원회가 '가혹행위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위법한 확정 판결'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검찰은 재심사건 항소 이유에서 '502보안부대에서 이 씨를 조사할 당시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가혹행위 등으로 임의성(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진술) 없는 피고인의 심리상태가 검사 조사단계에서도 지속되었다고 볼 만한 구체적·객관적 자료가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또 '재심대상사건 제2차 공판조서 가운데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모두 자백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데, 이를 간과한 채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사실 오인 내지 법리오해의 위법을 범했다'며 항소했다.

◇재판부 "검사 주장 이유 없다"

그러나 부산고법 창원재판부는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이 씨가 제502보안부대 조사단계에서 불법 구금과 고문 등 가혹행위로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된 상태에서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이 씨가 공소사실을 자백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나, 공판 당시에도 불법구금과 고문 등 가혹행위로 말미암아 억압된 심리상태가 계속된 가운데 검사 질문에 대해 단순히 "예"라고만 답한 것으로 보이므로 자백에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검사의 항소는 이유없다"고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최근 2심 결과에 불복해 상고했다.

이 씨 동생 상수 씨는 "뒤늦게나마 누명을 벗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빨리 조카들이 아버지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아버지에 대한 아픔을 잊길 바란다"고 했다.

이 씨는 살아 생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소연했다. "이 못난 형은 저 들판의 잡초처럼 짓밟히고 쓰러져도 일어나서 이 몸, 땅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맺히고 맺힌 한을 풀어야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는가."(97년 3월 2일)

이상철 씨는 아직 눈 감지 못했다.

<이상철 씨 사건·재판 일지>

-1971. 9. 26 북한 경비정에 피랍

-1972. 9. 7 귀환

-1976. 5. 거제 정착

-1983. 11. 15 제502보안수사대 연행

-1983. 12. 17 구속영장 발부

-1983. 12. 22 마산지방검찰청 사건 송치

-1984. 5. 2 마산지방법원 징역 17년 선고

-1984. 10. 12 대구고법 항소 기각

-1985. 1. 22 대법원 상고 기각

-1998. 8. 15 안동교도소 출소

-2006. 10. 18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진실규명 신청

-2007. 2. 25 이상철 씨 사망

-2008. 4. 22 과거사위원회 조사 개시 의결

-2010. 1. 12 진실규명 결정

-2010. 2. 12 이 씨 유족 재심 청구

-2010. 8. 30 재심 개시 결정

-2011. 10. 20 창원지법 1심 무죄 선고

-2012.7. 27 부산고법 창원재판부 2심 무죄 선고

-2012.7. 31 창원지검 상고장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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