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민원해결이 정치 시작…농민 권리 정치에서 제대로 찾고 만다"

서봉석(51) 씨. 30대 초반에 자신의 고향으로 들어가 농사지으며 농민운동 하다가 35살에 산청군 지방선거에 출마, 두 번 째인 1998년 군의원으로 당선, 2002년 재선까지 성공, 2006년 도의원 선거에서 낙선, 2008년 다시 산청군농협조합장으로 출마해서 낙선, 지금 내년 있을 농협조합장 선거를 준비 중이다. 그는 농민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정치에 진출, 농업정책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봉석 씨 같은 사람이 창원 쪽에 있어야 되는데…. 그래야 좀 더 일을 많이 하고 지역으로서는 이득인데.”

그를 아는 창원지역 사람들의 애정 어린 한 마디이다.

“물불 안 가리고 열심이지, 기획력 있지, 주민들 현장밑바닥까지 샅샅이 훑고 다니지. 참 드문 사람이다. 근데 산청골짜기에서 안 나오네.”

남의 칭찬이 귀한 요즘, 한 사람을 두고 기꺼이 칭찬하고 아까워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서봉석 씨, 더욱 궁금하다.

서봉석 지리산덕산개발회 대표./권영란 기자

서봉석 씨는 지리산 중산리로 가는 길목인 산청군 시천면에서 20년여를 살고 있다. 이곳은 지리산 곶감으로 유명한 곳이다. 매년 1월 중순이면 눈발이 희긋희긋 날리는 이 깊은 골짜기에서 곶감 축제가 열려 외지인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늦은 저녁이면 이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택배 차량의 불빛이 줄을 잇는 곳이다.

서봉석 씨의 집은 천평마을 평평하고 넓은 들판, 줄줄이 늘어선 비닐하우스와 곶감막 사이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입구에는 시천면 친환경로 ‘고운명가’라는 문패가 달려있다.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는 앞마당 나무와 꽃들 사이 장독이 한 가득이다. 지금 그의 공식 직함은 지리산덕산개발회 대표이사이다. 그의 부인 강정숙(47) 씨는 이웃 반천체험마을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다. 부부는 2정 반의 감밭 농사와 매년 3동의 곶감을 하고, 감식초, 발효차, 된장간장도 조금 만들고 있다. 거기에다 그는 요즘 틈틈이 시천면지를 쓰고 있다.

다음은 서봉석 씨가 구술한 것을 발췌, 정리하여 옮겼다.

농사지으며 산청농민회 조직 준비

전공이 지역사회개발학이었는데 졸업하고 노동운동하려고 서울 성수동에 갔지만 백기완 선대본 등이 생기고 당시 노동운동판에 들어간 사람들이 워낙 많았다. 고민을 많이 한 끝에 우리 지역으로 내려오겠다는 결정 내렸다. 어른들 때문에 우리 산청동네로 바로 못 오고 잠시 사천에 가있었다. 88년 당시 강기갑(현 통합진보당 대표) 씨가 맡고 있는 사천한겨레지국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다시 산청으로 들어왔다. 내가 있을 곳은 산청이고, 내가 할 일도 산청에 있는데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농사를 하면서 산청 지역에 있는 신념이 굳은 사람을 만나갔다. 농민회 조직이 목적이었다. 89년 초 지역 조사속에 인물리스트를 뽑았다. 정통야당 인물, 한겨레신문을 보는 사람들 등을 중심으로 엮어나갔다. 핵심 인물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가 문제였던 것 같다. 3개월 후 단성농민회관서 산청농민회 준비위를 만들었다. 전국농민회 가입하려면 50명 정도여야 되는데, 35명이었다. 경찰, 행정에서 방해가 심했다. 경찰서 정보과, 산업계 담당자들이 문 앞에 진을 치는데 우리와 비슷한 숫자였다.

89년 수입개방 당시 10월 전교조투쟁 있었는데 연행됐다. 집시법, 화염병 소지 등의 죄목이었던 것 같다. 11월 산청농민대회를 앞두고 연행되는 바람에 그 행사가 무산됐다. 한 달 반돼서 풀려났다. 90년 2.13 농민대회 후 4월 각 도연맹의 인준을 거쳐 전국농민회가 조직됐다. 김종석 씨가 초대의장이었고, 그때 나는 전농 도연맹 간사로 일했다. 91년도 면 지회 만들고 조직 확산을 했다. 산청군농민회 준비였다.

/권영란 기자

나는 청원소개의원,
진주검찰청 제출 탄원서만 일 년에 10건 이상

91년부터 지방자치제 시작됐는데, 반쪽짜리였다. 단체장 선출이 없었다. 95년도부터 단체장을 뽑았다. 95년도 6월 지방선거에 군의원으로 출마했다. 개인적으로는 도전이었다. 5명 중에 4등 했다. 당시 어떤 재미있는 얘기가 나왔냐면, 문중이 작아서 쟤가 꼴등할 거다,

또 장날 가면 사람들이 모이면 갸가 기탁금을 받을 것인가 못받을 것인가 등 점을 치는 패들도 있었다. 그때가 35살이었다. 네 명의 후보들이 나를 공격할 때는 다 같은 목소리였다. “아직 젊으니 다음에 찍어줘라.” 진짜 정책이니 인물검증이니 이런 게 필요 없었다. 그때 나는 후보들의 공동의 적이었다. 투표결과, 3등하고 차이는 50표였다. 91년 군의원했던 사람이 이번에 군의장이 되겠다하더라. “뭔 소리냐 여적지 못한 걸 이번에 우찌 한다고 믿지마라”고 대응했던 게 기억난다. 사실 당선을 염두에 둔 게 아니었다. 다음 시기를 두고 전략을 세운 거다. 다음 선거에서 내가 상대하기 쉬운 상대로, 그가 그 선거에서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선거가 끝난 후 다시 주민들을 조직하고 싸우는 일을 시작했다. 산청군 양수발전소 싸움이 시작이었다. 95,96,97년 방방 날아다녔다. 주민들의 크고 작은 불편사항에서부터 민원문제가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도로를 만들어 횡단보도 선을 긋는 문제부터, 터널공사하는 데… 수도 없다. 진주검찰청에 내가 탄원서 쓴 것만 해도 일 년에 10건 이상 되는 것 같다. 그렇게 현역 군의원이 의회를 들락거리는 동안 나는 주민들과 생활현장에서 같이 하면서 신뢰를 쌓아나갔다.

서봉석 지리산덕산개발회 대표./권영란 기자

8년 동안 했던 의원 시절에도 솔직히 나는 청원소개 의원이었다. 주민들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것이 청원이지 않나. 대신 싸워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공무원에게 보낼 건의서 있으면 의회 사무국에 보내달라 그러면 내가 보고 대신 청원소위 만들어서 공식화 만들어 담당자들에게 책임 묻는 거다.

의원이 제일 잘 하는 게 조례다. 하지만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청원 건은 주민들의 직접적인 요구를 일상적으로 들어줄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일이다. 이건 최소 3명의 동료의원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소위를 구성할 수 있다. 의원들은 청원을 귀찮아하는데, 싸움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청원은 재미있는 거다.

늘 주민들 민원 해결하느라 뛰어다녔다. 의회에 있는 시간보다 동네에, 지역구 주민들을 찾아다녔다. 틈틈이 농사도 지어야 하고. 정치라는 게 사람을 만나고 관계 짓는 것에서 시작되니 지금도 그렇지만 경조사비가 1년 800만원 아니, 1000만 원 이상이다.

민간인학살사건은 우리 동네 일
군의회 조사특위 만들고 진상규명 활동하기도

98년 선거 때는 38살이었다. 현역 의원을 더블스코어로 이겼다. 군수, 과장 등 난리가 났더라. 서봉석이 의회 들어오면 큰일난다는 거였다. 이것저것 물고 늘어질 걸 생각했던지. 하지만 내가 큰 틀에서 지역발전 방향을 잡자하니 군수하고 공무원들이 오히려 마음을 달리 하더라. 아주 조금은 진심이 통한 것이었는지도.

의정활동 하면서 기억에 남는 건 98년 산청군의회 내에 민간인학살조사특위를 만든 거다. 삼장면에서 위령제 비슷한 제사를 지냈는데, 제례비도 못 받더라. 근거가 없어서 못 준다고 해서, 근거를 만들면 되지 않나. 그래서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제수비를 주더라. 그것도 1년 안에 이뤄졌다. 유족들이 10년 간 싸워왔던 일이었다.

한국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문제기도 하지만 내가 사는 동네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외공리, 삼장면 등 학살현장이 있다. 시천삼장민간인학살유족회와 외공리 진상규명대책위에서 일했다. 현수막 붙이고 진실화해진상규명위 등이 생길 때도 유족들은 겁나서 나서지 못하더라. 지금도 그런 어려움이 있다. 집안에 공무원이 있으면 그 사람이 불이익을 당할 까봐 접수 못하고, 인우보증을 설 만한 사람도 없고, 내 대에서 그치면 되지라는 생각이 많다.

외공리 소정골은 280명 정도 추정하는데 아무도 접수를 안하더라. 조사는 다 됐는데 유족이 없더라. 민간인학살 인원은 전국 100만 명 추정한다. 바다에 수장된 것도 얼마나 많겠나. 언젠가 대마도 지사가 거제도에 “대마도에 제발 시체 좀 떠내려오지 않도록 해라”는 하소연이 들어왔을 정도였다더라. 충남을 기준으로 이남으로는 학살지가 너무 많다.

2000~2010년 김대중 정부때 2001년 10년 국토계획 완성을 완성했다. 그때 ‘지리산통합문화권’을 제안했다. 또 국립공원 사무소 설치를 두고 다른 지역이 거론되고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산청에다 설치할 것인가를 두고 일했던 게 생각난다.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쓰는데 그냥 쓰면 안될 것 같았다. 읽지도 않고 던져질 게 뻔했다. 그래서 첫부분부터 성질 돋우는, 화나게 하는 진정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식 선생의 단성소처럼 말이다. 당시 권순영 군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대통령을 움직이려면 그렇게 써야 한다고 설득했다. 보내고 난 뒤 1주일 후 발표가 났다. 결과는 산청으로.

한나라당 입당, 산청군 농협조합장선거 준비

솔직히 선거패배 휴우증이 컸다. 2008년까지 사람이 멍해지고 우울증이 생겼다. 먹고 사는 것도 걱정되지만, 이 정치구도를 어떻게 깰 것인가가 문제였다. 물론 이건 지금도 고민이다.

2009년 말 12월 말 농협조합장 선거에 나갔는데 또 깨졌다. 아, 이거 안되는 구나. 조합원만 투표하는데, 결국 돈으로 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 엄청나게 돈의 영향을 받더라. 어떻게 깨야 할지 정말 대책이 안서더라.

내 경제력과 우리 집안으로는 6개 면을 넘어서기 힘들더라. 남부지역만으로도 힘들더라. 안됐지만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되더라. 결국은 당적을 바꿔야 하더라.

그래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주변 사람들은 “당신의 결정에 대해서는 이해가 된다. 몸조심은 해라”고 당부하더라. 처음에는 솔직히 양쪽에서 욕도 마이 들었다. 믿어보자는 측, 아이다, 저 아는 인자 틀렸다는 측. 하지만 내가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서봉석 지리산덕산개발회 대표./권영란 기자

자본주의든 민주주의든 경제활동의 정점은 정치이다. 현재 정치하는 사람들은 귀찮으니까 자꾸 정치와 괴리를 시키는데, 모르고 무조건 동의하는 건 안 된다. 나라도 동의하면 안 된다. 의회 권한을 잡으면 효율성이 있다. 당신이 쌀값 결정하고 당신의 하는 일을 결정할 수 있어야지 않냐, 5대농산물 가격결정권을 우리 농민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산청군민이 잘 살고 우리 동네 주민들이 잘 살기를 지금도 바란다. 나락싸움, 댐싸움도 마찬가지다, 너그의 행복을 위해서 바꿀 수 없다. 열정도 거기서 나온다. 50살이 넘으니 통찰력이 필요하더라. 효과적으로 우리 지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지 않나는 고민도 하고 있다.

농협조합장 역할도 마찬가지다. 조합원의 권리부터 알리고 자신의 부를 어떻게 늘리고 가격결정권을 쥘 수 있는지를 알려야 한다. 지금까지 농산물 가격은 국가가 통제하는 도매시장에 의해서 일방적이었다. 당신이 가격결정권을 가지지 못하면 진정한 농민이 아니다. 왜 당하고 있는지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정치훈련을 시키고 싶다. 억울하면 둘이 되라. 조직을 만들어라. 그리고 사무실 만들고 적지의 시스템 중 약한 고리를 끊어라. 하지만 잘 안한다.

기초수급자 제도가 김대중 정부때 만들어졌는데, 수혜받는 사람이 김대중 욕을 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그걸 듣고 집에 와서 욕하더라. “아이고, 저 바보 병신겉은 것들. 지가 누구 때문에 나라에서 돈 받아묵는디 누굴 욕하노” 이러더라. 대중(주민)들의 정치단련이 중요하다.

산청곶감 효율성 높아 ‘돈 된다’

산청도 체험마을이 꾸려졌다. 근데 돈이 걸리니까 사람들이 너무 급하더라. 지역사회개발에는 다 같이 어떻게 먹고 살릴 것인가가 문제다. 균등하게 이뤄져야 한다. 다섯 골짜기에서 벌어 우리 면에서 쓴다는 게 원칙이다. 지역 밖을 어떻게 끌어모을 것인가 문제는 시장을 좀 더 키우려고 했다.

곶감축제는 생산자들이 돈을 절반 이상 대니까 민간 단위에서 이뤄지도록 했다. 친환경으로 하면서 산청군 곶감작목반을 통합했다. 작목반 반장일 때가 2010년이다. 3회부터 곶감축제를 주도했는데, 형식과 내용은 전혀 달랐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크다. 국가사업 본 따서 했다. 지역 내에 품목발전기금을 마련했다. 50:50으로, 지 돈 내어 지 사업을 해보자고 싶었다. 애기유기나방을 없애기 위해 유황합제 시설을 만들었다. 시천면 700, 삼장 300 농가다. 소득이 균등하게 배분되는 구조가 이뤄져야 한다. 지금 작목반 회장이 곶감수출연구회를 준비 중이다.

서봉석 지리산덕산개발회 대표./권영란 기자

농업 점유율을 시장 브랜드 가치로만 볼 것이 아니더라. 모두 소농이니까 수익 수치률를 올려주는 게 가장 잘 하는 정책이다. 산청은 특징이 소농이다. 소농이어서 못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소농을 오히려 살리는 게 살 길이다. 전국에서 곶감을 많이 하는 지역은 상주이다 하지만 상주는 대부분 대농이다. 피해가 그만큼 크다, 위험분산이 크다. 소농들이라는 산청 특징을 살리고 역사성, 기술성, 보편성 이 세 가지가 산청의 이미지,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품목 중에 효율성을 높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올 때 그는 마지막으로 강조했다.

“누구든지 자기 권리를 위해서 고민하고 일해야 한다. 뜻을 말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권리를 누가 지켜주지 않는다.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 무임승차는 별 의미가 없다. 내가 지켜야 한다. 예전에는 농민이 가장 비정치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소외됐다. 그동안 소외될만큼 소외됐으니 이제 농민도 자기 권리를 갖기 위해 정치로 나가야 한다.”

그가 농촌에 사는 이유, 그가 정치인이고자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권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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