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거제를 예술의 섬으로 만들 것"

거제 극단 예도 <선녀씨 이야기>가 지난 6월 5일부터 23일까지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제30회 전국연극제에서 대상과 연출상(이삼우), 희곡상(이삼우), 최우수연기상(고현주), 연기상(김진홍)을 석권하며 5관왕 위업을 달성했다. 이로써 경남은 지난해 사천 극단 장자번덕 <바리, 서천 꽃 그늘 아래>에 이어 전국연극제에서 2년 연속 대상인 대통령상을 차지하며, 명실상부 전국 최고 수준의 연극 고장임을 알렸다. 더불어 이번 예도의 ‘전국연극제 5관왕’은 전국연극제 30년 역사에 있어 전무한 기록이다. 이러한 극단 예도가 가진 숨은 힘은 무엇일까? 극단 예도 최태황(57) 대표를 통해 그 이유를 알아봤다.

인터뷰를 약속한 지난 8일 최태황 대표는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로 연극인이자 이번 제30회 전국연극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윤조병(75) 극작가가 통영연극예술축제에 들른 김에 평소 구상해 둔 글감을 찾으려고 거제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최태황 대표는 윤 극작가와 지난 2007년 거제에서 열린 전국연극제에서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때에도 윤 극작가가 심사위원으로 왔었다. 이 인연은 올해 3월 경남연극제 심사위원장, 6월 전국연극제 심사위원장으로 이어지며 더욱 공고해졌다. 윤 극작가는 이번에 거제 예도가 대상을 받은 이유를 ‘새로운 실험 정신이 투철’하기 때문이라고 정의했다. 윤 극작가는 이번 <선녀씨 이야기>에 대해 “사실주의 연극이 득세하는 현재 연극 세태에 비사실주의 판타지적 요소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창작기법 개발, 다양한 실험 정신 등을 발휘한 데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대상을 준 배경을 설명했다. 더불어 “예도는 항상 낯섦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을 통해 새로운 창작 정신을 잉태시켜왔다”고 평가했다.

윤조병 극작가와 최태황 대표./김두천 기자

“대상, 연극이 좋아 무대서 뛰는 단원들 몫”

이러한 평가에 대해 최태황 대표는 “단원들 모두가 열심히 한 덕”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단원들이 목표를 높게 잡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 예도는 이번 대회에 나가기 전 이미 세 번 전국연극제(2007, 2009, 2010년)에 나갔는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늘 작품이 참 좋다고 이야기를 들어왔어요. 하지만, 매번 금상 두 번에 은상 한 번을 받아 아쉬움을 뒤로 했죠. 그래서 이번에는 꼭 대상에 올라 지난번 아쉬움을 털자고 의지를 다진 결과가 이번 대상으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작품에는 특히 ‘신구조화’가 잘 이뤄졌다.

“아쉬움이 큰 만큼 결속력도 강해졌습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는 1989년 창립 단원들의 활약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 친구들이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자녀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다시 극단에 돌아와 작품을 뛰고, 또 어린 단원들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이런 신구조화가 잘 어우러져서 작품에 임하면서 단원들 사기는 높아지고, 배우, 스태프, 연출, 대표 모두 똘똘 뭉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네요.”

극단 예도 <선녀씨 이야기>공연 장면./극단 예도 제공

여느 극단 보다 단원이 많은 것도 도움이 됐다.

“우리 단원이 30여 명 정도 되는데요. 이번 작품에는 20여명이 배우와 스텝으로 나섰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극에 몰입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이번 작품은 쉬고, 이들이 시간이 나면 다시 합류하고 또 몇몇은 빠지고, 이렇게 두 라인으로 단원들 로테이션이 되는 것 역시 큰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특히, 예도에는 이삼우 연출, 황지영, 김현수 단원 말고는 전업연극인이 없다. 다들 시청 공무원, 컴퓨터 전문 기사 겸 정수기 영업 사원, 주부, 대우조선해양 직원, 자동차 판매 사원, 대학생 등 직업인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금전적인 문제, 보수 유무를 떠나 연극을 좋아하는 신심으로 작품에 참여하다보니 다른 극단들보다 유대와 결속이 더 좋은 점도 이번 대상 수상의 주요 요인으로 분석된다.

극단 예도 <선녀씨 이야기>공연 장면./제30회 경남연극제 집행위원회 제공

서울 미술 청년, 거제로 간 사연

예도 최태황 대표는 1956년 서울 출생으로 본업은 거제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이다. 최 대표가 서울 사람임은 물이 흐르는 듯 이어지는 부드러운 말씨를 들으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부드럽고 유려한 말씨지만, 입을 통해 전달되는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뚜렷한 주관과 명징한 생각이 묻어나온다. 이 ‘온화한 카리스마’ 때문에 단원들은 최 대표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단원들 가운데 최 대표 제자들도 많다.

최 대표는 1984년 거제에 왔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이 많던 청년 최태황은 예술인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이 먹고 사는 길은 미술밖에 없다는 생각에 전공을 ‘미술교육’으로 정했다. 입시에서 경희대 미술교육과를 1지망 했지만 고배를 마신 후 경남대 미술교육과에 2지망해 합격했다.

경남대 입학 후 학내 ‘극예술연구회’ 창단 멤버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극예술연구회보다는 성인극단인 ‘불씨촌’에서 배우 생활을 더 많이 했다. 이렇게 맺은 연극과의 인연은 1983년 2월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됐다. 평소 최 대표 활동을 눈여겨 본 당시 통영 극단 벅수골 장현(작고) 대표가 그를 통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연극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믿은 최 대표는 벅수골에서 몇몇 작품들을 연출했다.

벅수골 데뷔작 <알>에서 무대감독 겸 조연출로 참여해 초대 경남연극제 대상을 수상하고,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전국연극제 무대를 밟기도 했다. 이 밖에도 <철부지들>, <족보> 등을 연출했다. 이후 이듬해인 1984년 이교탁(작고) 배우, 이상철 연출과 함께 <은하수를 아시나요>를 제작하던 중 거제고등학교 교사 공모에 합격하면서 통영을 떠나 거제로 가게 됐다.

최태황 대표./김두천 기자

거제를 예도(藝島)로 만들다

최태황 대표의 연극 열정은 거제에 가서도 식지 않았다. 때마침 대우조선 등 조선소가 들면서 노동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거제에서 최 대표의 연극 경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지역에서 이른바 사회지도층으로 불리는 이들이 최 대표에게 극단 창단을 제안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1986년 창단된 ‘극단 마당’이다. 상임연출가 자리를 반갑게 받아들인 최 대표. 그러나 이내 실망을 하게 된다. 마당을 창립한 이들은 모두 대학에서 이른바 ‘운동물’을 좀 먹은 사람들로, 연극을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선전·선동하는 도구로 활용하려한 것이다. 대학에서 정통극을 배운 최 대표로서는 연극 작업에 대한 지향점이 이들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사단은 극단 창단 작품을 준비할 때부터 났다. 최 대표는 정통극 <용감한 사형수>를 선정해 연출하고 있었는데, 창립 주체들은 이에 반발해 몇 안 되는 단원을 쪼개 김지하 작 <밥>을 연습시킨 것이다. 최 대표는 이에 격분해 마당에서 퇴단한다. 퇴단 이후 최 대표는 전공인 미술 분야의 지역 내 활성화를 위해 거제 내 미술전공자들을 모아 1989년 ‘장승포 미술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는다. 이제 본격적인 지역 내 미술 부흥을 구상하던 중이었다. 이러는 차에 당시 거제신문의 한 기자가 최 대표를 찾아왔다. 거제를 위해 제대로 된 극단을 하나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연극을 전혀 모르지만, 연극을 하자고 하면 할 사람들이 6~7명 정도는 있다고도 했다. 잠시 망설인 최 대표는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생각으로 이들을 만났다. 현재 극단 예도 창단 멤버들이었다. 아직은 앳된 10대 후반, 20대 초반 친구들이 연극을 하겠고 나선 것이 기특했다. 또 하나 당시 거제중학교에는 최 대표와 대학에서 연극을 함께한 후배 정효영(작고)이 수학선생님으로 부임해 있었다. 정효영 상임 연출, 배우, 대표. 이 삼박자가 맞으니 극단을 하나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9년 10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극단 예도(藝島)다.

최태황 대표./김두천 기자

예도는 1991년 이근삼 작·정효영 연출로 자체 창단 공연 <일요일의 불청객>을 옥포극장에 올리며 도내 연극계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예도의 출발은 연일 ‘승승장구’였다. 지역 내에 호응도 좋았고, 거제 내 기업의 지원을 받아 옥수동에 넓은 연습실을 마련하기도 했다. 최 대표는 이때를 가장 재미있게 연극을 했던 때라고 회상한다.

1993년에는 연극협회에 정식 가입을 하면서 처음 경남연극제에 참가했다. <언챙이 곡마단>이라는 작품으로 참가하자마자 우수상이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즈음 옥포에 소극장도 마련했다. 전세 20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이었다. 당시 최 대표 월급이 85만 원에서 90만 원 사이였으니 월세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매년 소극장 축제를 열어 10년을 이어왔다. 매년 적자였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곧 시련이 찾아왔다. 정효영 상임연출이 건강상의 문제로 요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연출이 없으니 배우들의 연기가 나아지지 않았다 작품의 질을 나날이 떨어져갔고, 거제는 경남연극계에서도 ‘변방’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은 실로 거제 연극의 암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남연극제에 매번 출전했지만, 장려상 이상 상을 타지 못했다. 늘 타 지역 극단들은 예도를 보고 아마추어라 평가했고, 최 대표는 다른 연극인들을 만나 울분을 토하는 날이 잦아졌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이에 서울로 유학을 간 극단 출신 이삼우 배우를 거제로 끌어내렸다. 이삼우를 중심으로 극단을 재정비 하고 작품에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초보 연출이다 보니 욕심만 앞섰고, 경남연극제에 나가도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 아픔이 오히려 단원들을 똘똘 뭉치게 하고, 서로 신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3년 거제문화예술회관이 문을 열었다. 거제문화예술회관 개관은 거제 촌사람들이 각종 무대장치와 예술경영에 대한 마인드를 심게 된 계기가 됐다. 여기에 사천 극단 장자번덕에서 활동하던 심봉석 연출가가 거제문화예술회관에 취직하면서 예도는 작품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삼우가 가진 독특한 연기와 이야기 소재 그리고 심봉석이 가진 정통 연출 이론이 만나면서 허황된 이상을 하나의 질서로 만들어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이 가능해졌다. 이를 계기로 예도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2007년부터는 경남을 넘어 전국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극단이 되었다.

“정말 23년 동안 아픔이 많았죠. 하지만, 진짜 좋았던 것은 단원들이 연극을 하겠다는 마음, 정신력, 그리고 믿어주는 연출가와 대표 등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 오늘의 예도를 있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러한 열성적인 활동 덕에 거제 문화예술은 최 대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제에는 1970년대까지 문인협회 말고는 문화예술인 단체가 없었다. 최 대표는 1980년대 중반 1990년대 초반 미술과 연극 활동을 통해 1993년 연극협회, 1994년 미술협회 탄생을 이끌었다. 이들은 이후 거제예총 탄생의 기반이 됐다.

“거제만의 새로운 연극제 만들 것”

전국연극제 대상은 지역 극단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목표다. 도내 극단 가운데서는 전국연극제 이후 목표를 잃고 침체기를 겪은 극단도 많다. 따라서 앞으로 예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문화예술의 도시 거제의 지역성을 살린 진짜 좋은 작품을 계속 생산하고 무대에 올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폐왕성>, <거제도> 등 거제의 지역성을 담은 작품을 거제를 찾는 손님들에게 언제 어디서든지 보여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이렇게 예도의 작품을 거제만의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최태황 대표./김두천 기자

새로운 연극 축제에 대한 구상도 밝혔다.

“욕심이 있다면 우리가 지난 2008년 거제희극페스티벌의 아주 성공적으로 잘 치렀지만, 이게 1년만 하고 끝나버렸습니다. 이를 복원시키는 방안을 모색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거제 지역 기업들의 지원을 받아 참가 극단, 상금 규모에 있어 전국연극제 이상 가는 연극 경연제를 만드는 것도 구상중입니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더 큰 꿈을 꾸는 최태황 대표. 거제 문화예술 부흥을 위한 그의 새로운 도전은 또 어떤 모습으로 발현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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