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집안에서 여성이 더 설쳐야 한다"

유별난 부부다. ‘말수 많은 아내와 말수 적은 남편’이다. 때로는 여자가 말수 많고 나선다는 건 만으로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남편, 전혀 개의치 않는다. 개인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 아니니 더 설치라고 은근 부채질하는 듯하다.

지난 7월 7일 제 17회 여성주간 마지막 날, 대책 없이 요란하기만한 행사들이 각 시군별, 단체별 열리는 가운데 이들 부부를 만나보았다.

이 부부, 진주지역 시민단체 행사장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띈다. 환경운동연합 후원의 밤, 인권학교, 경남여성인대회 등 나란히 보이는 얼굴이다.

심국보(51) 서소연(46) 부부. 소연 씨는 언제나 밝고 쾌활하다. 그녀가 들어설 때면 순식간에 자리가 요란해진다. 그녀의 입담과 웃음 때문이다. 그런 부인을 든든히 바라보고 부인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귀 기울이는 건 옆에 앉은 국보 씨이다.

심국보·서소연 부부./권영란 기자

서소연 씨는 지난 4·11총선 때 진주시(을) 선거구에 민주당 국회의원 예비후보로 나섰다가 야권단일화에 힘입어 흔쾌히 사퇴를 하고 야권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으로 들어갔다.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된 야권단일화 과정의 모습이었다. 서소연 씨의 지금 공식적인 직함은 민주당 진주시(을)지구 지역위원장이다. 심국보 씨는 오래전부터 진주참여연대에서 중심적인 일을 하면서 지금은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6년부터의 정치적 진출이 눈에 띈다. 그 전에 시민단체 활동만 하다가 정치적 진출을 결심한 이유가 있나.

서소연 90년대 중반이후 여성민우회, 참교육진주지회, 참여연대, 진주생협 등 15년 정도 시민운동활동 하였다. 정치적 진출의 구체적 계기는 진주여성민우회 활동을 통해서였다.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였다. 가부장적 제도 아래서 여성이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는 조금씩 변화되고 있었지만 오히려 정치권 안에서 여성은 배제되고 있었다. 여성이 정치세력화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누군가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민운동으로서의 활동에 한계도 느꼈다. 여성의 정치 활동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걸 절감한 때였다. 2006년 지방선거 때는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나갔다. 그때는 꼭 선출이 아니더라도 의회에 들어가자는 식이었다.

왜 민주통합당인가.

서소연 정치적 지향에 적극 동의한다. 2006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후보였다. 지역분권, 지역균형발전 등 경남에서도 소외지역인 서부경남에 사는 시민으로서 많이 와 닿았다. 민주당과 통합되면서 그대로 있었다. 정당 안에서 혁신을 도모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지난 번 나의 슬로건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생활정치 실천, 시민생활 정책전문가 서소연’이었다. 정당이나 지향점이 나타났다고 본다.

심국보·서소연 부부./권영란 기자

대학은 서울서 다닌 걸로 아는데 어떻게 다시 왔나.

서소연 대학갈 무렵 진주가 갑갑해서 서울로 갔다. 다시 온 것은 직장이 계기가 됐다. 도서관학과를 전공하고 사회학을 부전공했는데, 경상대도서관에서 사서공개채용이 있어 왔다. 그때가 졸업해 89년 6월이었다. 2년 뒤 91년 10월 26일에 결혼했고, 지금 세 아이를 두고 있다.

심국보 진주에 내려온 건 89년 정도이다. 노동상담소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처음에 붙인 이름이 나눔터였다. 진주지역민주노동조합연합과 함께 준비했다. 당시 진주지역에도 노동운동이 확산되고 있었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동조합교육이 필요했다. 노동현장 소식지를 내고 단체연합교육 등을 주로 했다.

진주오기 전에는 부천 선풍기 망을 만드는 일, 5·3사태때 잠시 잡혀 들어갔다가 고생하고 그 이후로 안산, 성수동에 많이 있었다. 인쇄일, 자동차 문 제작하는 일이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때는 성수동 현장에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내려왔다. 진주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니까 눌러 앉았다.

왜 노동운동이었나?

심국보 시작은 단순했다. 넘들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재미없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아는 친구들 따라 같이 모여서 다니다 그리 된 것이다. 하지만 정말 열정적으로 하게 된 것은 고문당하고 그러면서 오히려 오기가 생긴 거다. 학생운동 전력 드러난 것이 없이 기소유예로 풀려나왔는데, 검사가 반성문을 쓰면 내보내준다고 하더라. 당시 전두환 정권이 한창 ‘정의사회’를 외칠 때였다. 반성문 썼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하지만 전두환이 얘기하는 ‘정의로운’과 나의 ‘정의’는 달랐다.

다시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다. 작업은 힘들지 않았고 즐거웠다. 다행히 일을 잘 해서 안 들키고 안 쫓겨났다. 부서이동을 많이 했다. 그래서 모든 부서를 통달했다. 작은 공장 정도는 운영할 것 같았다.하하. 당시 마찌꼬바 다른 공장서 스카웃 제의도 들어왔다. 당시 현장 하루 일당이 1300원이었다. 88년 하반기 해고당시 2500원이었다. 그래도 1년 사이 많이 올라간 것이다.

결혼은 어떻게 했나. ‘기 센 사람들끼리’.

서소연 사촌 시누가 소개했다. 한참 직장생활이 즐거울 때였는데 결혼했다. 여러 가지 상황 있었지만 떠밀려서 간 부분도 있었다. 나와 평생을 같이 가야 하는 사람의 조건은 ‘개연성’이었다. 당시 내 눈에는 국보 씨가 보수적 억압적이지 않은 데에 호감을 가졌다. 그 부분은 지금도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억압적이었더라면 나는 기질이 오히려 오기가 생기고 튕길 수 있는데. 딸 하나 아들 둘인데, 아이들은 ‘자기 식대로’ 잘 자라고 있다. 열성적으로 키울 때도 있었지만 자신의 의사결정권을 누른 적은 한 번도 없다. 물론 그에 따른 책임도 자신이 짊어지는 걸로.

심국보·서소연 부부./권영란 기자

시민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정치활동을 더 활발히 하는데, 계기가 있나.

서소연 96년 민우회 창립 당시부터다. 당시 삼일 유치원 성폭력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데, 그 사건을 보면서 이 사회의 약한 고리가 여성문제이고 여성이 정치에서도 소외되고 있다는 걸 절감했다. 그래서 약자가 권익을 주장하려면 먼저 정치적이어야 하고 많은 여성들이 정치적 진출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 때 정신대연구소 했던 교수를 통해 역사문제를 다시 인식했다. 역사·정치·경제 등이 현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이후 상황인식이 달라졌다. 노동현장 권유를 많이 받기도 했지만 당시 결단을 내리기엔 무리였다. 그게 마음의 빚이기도 했는데, 지금 정치활동으로 대신 한다 여긴다.

지난 4·11 총선 진주(을)지구 예비후보 출마 계기는.

서소연 출마 권유는 실제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당원들로부터 받았다. 여성의 정치세력화에 쭉 고민해왔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민주당 후보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더욱이 여성은 없었다. 여성도 국회의원 출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중들에게 알릴 필요도 있었다. 여성은 정치와 멀다는 인식을 먼저 깨나갈 필요가 있었다. ‘여성의 정치적 관심, 여성의 정치진출’을 심어나가는 작업이었다.

예비후보 선언하고 지역 주민들을 만나는데, 출마자 배우인 줄 알고 있더라. 여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시민단체에 들어가는 게 정치적 불신을 부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게 크게 다른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시민단체 활동과 정치를 떼지 않았다. 단체 회원들은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었다. 공식적인 직함이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 보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시민운동과 정치를 연장선상에 두고 있다.

총선 출마선언 사진.

부인의 정치 활동을 어떻게 생각하나.

심국보 나는 따로 정당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다. 민주노동당 과정도 잘 알고 있지만 관망하는 정도다. 결혼하고 나서 여성학에 대해 많이 배웠다. 90년대 초반 ‘또 하나의 문화’ 보면서 많이 인식이 달라졌다. 경상도가 사회운동을 하더라도 남성위주였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성해방이라는 겉모습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차근차근 변하는 게 중요했다. 동학 공부도 깊이 했는데, 여성학에서 내세우는 것과 동학에서 배우는 게 같았다. 명절, 차례의식 등이 비슷했다. 동학에서는 가부장적인 틀이 완전히 깨져 있었다. 잘 아는 의사부부가 이혼했는데, 결정적 계기가 시댁 제사였다. 똑 같이 근무하는데, 여자여서 월차내고 제사준비 하러 가야 했다. 아주 부당하다. 부인은 알지도 못하는 시댁 조상을 챙겨야 하고 남편은 일마치고 오고…. 당연하다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한 게 아니었다.

남 보기엔 ‘외조하는 남편’ 이다. 실제는 어떤가.

심국보 실제로는 많은 도움을 못 주고 있다. 지지하고 지켜본다는 정도이다. ‘외조’까지는 아닌 것 같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에서 언젠가부터 ‘암탉이 울면 새벽이 온다’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고 말하지 않나. 이제는 거꾸로 인식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불편한 건 없다. 단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진주가 대구 다음으로 보수지역인데 이 지역에서 아내가 나서는 게 부담스러울 까봐, 힘들까봐 그게 걱정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없다. 그게 걱정이지.

정치활동하고, 또 선거 출마하려면 먼저 집 안에서 얘기돼야 할 것 한다. 자녀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의 반응은 어떻나.

총선 유세 사진.

서소연 집안에서 의논한다. 사람마다 성향이 있다. 이제는 이해한다. 집안에 최소한의 민폐도 끼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지난 4·11때 진주 기초의회보궐선거로 당선된 서은애 시의원 이 조카된다. 내가 고모이다. 우리 집 여자들이 좀 센가보다. 근데 이게 유별난 게 아니다. 다른 집에서도 여자들이 설치면 좋겠다. 우리 집 세 아이들에게도 “엄마는 어떤 형태로는 정치를 할 거다”는 의지 밝혔다.

정치에 나서면 다들 집안 경제력이 좋은 줄 안다. 더욱이 부인이. 돈이 많나.

심국보 돈으로 정치하고 선거 출마하는 관행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지 않은가. 내가 빵빵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도 집안에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 아이 키우며 그럭저럭 생활하는 정도이다. 경제활동도 아내가 할 때는 내가 다른 활동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지금은 내가 잠시 쉬면서 공부하고 아내가 경제활동 맡아하고 있다. 아내와 나의 역할은 일반적이지 않다. 서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책임성있게 해나갈 뿐이다. 가족 모두가 조력자의 역할에서 각자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아내가 4·11 총선 예비후보로 나가있는 2달 동안, 6천만 원 정도 썼다. 아내는 인생의 저축을 한 거라고 말한다. 행복한 공부를 한 거다. 지금 열심히 메우고 있다.

서소연 가정경제가 마이너스 되면 신념을 버릴 수도 있지 않나. 그래서 생업도 열심히 한다. 목적 없이 목표만 이루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정치이지 않나. 명분과 원칙을 생활에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게 남편과 나의 소신이다.

현재 활동중인 여성 정치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서소연 2006년 비례대표 후보를 거치면서 어차피 조직과 재정을 예로 드는데, 절로 얻어먹는 걸로 생각하는데, 현장에서 주민요구를 듣고 뛰는 게 제도나 정책에 편승하는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의존하다보면 새 판을 짜지 못하고 결국 끼어들기 식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구색 맞추기는 넌더리가 난다. 하지만 여성들이 현장에서 직접 뛰어들기에는 아직 벽이 크다. 그것에 대한 지원을 당내에서 해야 하고 요청하는 게 여성 정치인의 역할이고 현실이다. 서울보다 지역의 여성이 정치를 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 경남은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다. 총선 출마자도 없었다. 야권연대에서 조차도 여성에 대한 배려와 인식이 없었다. 중요한 정치 결정에는 여성이 빠져 있었다. 인권, 소수자에 대한 정책이 제대로 일 수 없다. 구색 맞추기거나 아예 빠져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인터뷰 마지막에 심국보 씨는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다. 집안마다 여성이 더 설쳐야 한다”고 말했다. 서소연 씨는 “앞으로도 선거 계속 출마할 계획”이라 말했다. 자신이 출마하지 않더라도 후보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실질적인 일을 해나가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이 나서서 육아, 장애인, 노인 등 전반에 걸친 문제는 생활 속 정책을 제대로 세워나감으로써 그 고리를 풀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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