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 창원 동마산시장 얼음장수 이태균 씨

창원시 마산회원구 합성동 동마산시장에는 40년째 한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이태균(80) 씨가 살고 있다. 철판에 손 글씨로 쓴 '대구상회' 간판이 40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붉은 글씨로 적혀있는 얼음 팻말도 정겹다. 합판과 각목으로 덧대 얼기설기 지어진 이 씨의 가게는 비좁고 조악했지만 집안 가득 이 씨의 손때묻은 가재도구들이 가득했다.

"요즘은 휴가철이라 얼음 장사를 주로 한다. 한 달에 100만 원 남짓한 돈이 남는데 월세를 주고 각종 생활비를 빼고 나면 딱 맞다. 냉장고가 없을 때는 한창 재미를 봤는데 요즘은 예전보다 매상이 10분의 1밖에 안된다."

이 씨는 얼음 이외에 강정도 직접 만들어 팔고 있다. 하지만, 요즘은 기온이 높아 엿이 녹아버려 제조를 못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씨는 7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나서부터 혼자서 생활하고 있다.

동마산시장에서 얼음을 팔고 있는 이태균 씨. /신정윤 기자

"아내는 참 건강했는데 산행을 다녀와서는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 몇 년 병시중을 들고 해볼 겨를도 없이 말야."

이 씨는 아내 없이도 거뜬하게 생활을 해내고 있다. 여든을 넘긴 나이지만 120kg짜리 얼음을 전기톱으로 직접 자르고 맨눈으로 신문도 읽을 만큼 정정하다. 얼음은 마산어시장에 있는 수협 제빙공장에서 떼어 따로 운반 삯을 치르고 가져 온다. 얼음 한 동은 여덟 개로 자르는데, 한 개에 6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영천 소년, 배고픈 시절을 넘다 = 1932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이 씨는 소년 시절 일본에서 생활했던 기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당시를 회상하는 노인의 기억은 뚜렷했다.

"부산항에서 연락선을 타고 일본 후쿠오카 기타큐슈에 가서 살았지. 조선 사람들은 요즘 말로 막노동을 했고 어머니들은 공장에 다녔어. B-29라고 아나? 미군폭격기인데 하도 폭격을 해서 조선사람들끼리 시내 외곽에 모여 살았다." 이 씨는 해방 후에 고향에 돌아와 농사도 지어보고 중화요리 가게도 운영해 봤다.

"영천이 워낙 인구가 적고 요리사에게 월급을 주고 나면 돈을 모을 정도까지는 안 되더라. 그래서 보따리 싸고 딸이 살던 마산으로 왔지."

◇마산에서 과일장사로 일군 가정 = 이 씨는 처음에 천막 하나에 의지한 채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고향이 영천이지만 대구가 유명하니까 대구상회라고 이름을 지었어."

몇 년 후 땅 주인은 이 씨에게 지금의 가게 터에 집을 지어줬다. 지금 사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단골손님도 꽤 많았다. "한 사람 두 사람 잘해준다 싶으면 단골은 자연스럽게 생겨 있다."

이 씨는 과일장사 하나로 슬하에 아들 셋 딸 하나를 키워냈다. "무슨 일이든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크게 특별한 일도 없었고 무난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 싫은 부모 = 이 씨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요즘은 오토바이를 타고 약수를 떠 오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한다. "이 나이 먹어서 아직도 장사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이 씨는 자녀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다.

"아비로서 돈 내라는 소리를 못하겠고 자녀들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을 하고 있다.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하는 거지. 아픈 데 없고 아프더라도 자고 나면 괜찮고 해서 한다."

취재를 끝마치면서 또 다른 동네 사람이 얼음을 사러왔다.

"할아버지, 얼음 얼마예요? 돈을 집에 두고 왔는데…"

"그냥 가져가라, 얼음 녹겠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동네할아버지 이태균 씨. 이 씨는 취재를 끝마치고 자리를 떠나는 기자에게 덕담도 잊지않았다.

"허허허, 예전에 비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참 좋은 세상을 만났다. 더운데 돈 버느라 고생이 많구먼."

그렇다. 이 씨는 평범한 동네사람이자 우리네 아버지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