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24)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드디어 지난 길 걷기에서 새재 마루에 올랐습니다. 오르는 걸음걸음마다 어느 하나 허투루 지나칠 것이 없으리만치 고갯길에 깃든 많은 이야기와 그것을 품은 역사는 매번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이렇듯 문경 새재 옛길은 마음을 기울여 살펴야 할 게 많은 그야말로 길의 박물관이라 할 만합니다.

새재 마루에 서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한 옛말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산은 물을 나누는 고개라는 뜻입니다만, 나아가 산은 물을 건널 수 없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니, 우리 국토의 근간을 이루는 산하에 대한 전통적 지리관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지요.

이제 우리 여정도 백두대간의 새재를 넘으면, 지금껏 걸었던 낙동강을 벗어나 한강 유역으로 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새재 마루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한강으로 이르는 여정을 같이 떠나 볼까요.

신혜원(新惠院)

새재를 뒤로하고 고개를 내려서면, 충북도가 운영하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을 지나 고사리마을에 들게 됩니다. 내리막길이라 힘은 훨씬 덜하지만, 지금까지 걸었던 푹신한 느낌의 흙길은 사라지고 포장도로를 따라 걸으려니 흥취를 느낄 수 없어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저로서야 이 구간도 옛길이 복원되어 걸음이들이 새재를 사이에 두고 흙길을 오르내릴 수 있기를 바라지만, 휴양림을 찾는 이들의 편의도 무시할 수 없을 테니 그러기가 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휴양림을 지나 조금 더 내려서니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 마방터란 이름을 단 민박이 나옵니다. 이곳은 고사점(古沙店)이 있던 고사리(古沙里)입니다. 조금 더 내려서면 신혜원인데, 우리는 이 마을에서 다리품을 쉴 겸 길가 음식점에서 내놓은 평상에 앉아 파전에 막걸리로 목을 축입니다.

예전 길손들도 주막에서 휴식과 활력을 얻었을 테지요. 바로 이곳은 신혜원이 있던 자리인데, 최영준의 <영남대로>에는 신혜원에서 주흘관을 지나는 비탈길에는 박석(薄石)을 깔아 노면을 정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조곡관 근처 응암(鷹巖)에서 보았듯 전 구간에 걸쳐 박석을 깐 것은 아니고 주요 지점에만 설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1872년에 제작된 연풍 일대의 지방지도에는 이 부근에 고사점과 판교점(板橋店)이 있다고 표시해 두었으니 이 시기에 이르러 주막이 원을 대신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이곳은 옛 신혜원과 판교점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350살이 넘은 소나무 당목이 있고, 그 아래에는 고사리면(古沙里面)에서 세운 □□□애민선정불망비(愛民善政不忘碑)가 부러진 채 귀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 있는 마을자랑비에는 신혜원이 널다리가 놓여 있어 판교점(板橋店)이라고 했다고도 나옵니다.

신혜원 옛터를 지나 내려오는 길에 돌아본 조령산은 흰 구름 점점이 떠 있는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산을 덮은 녹음 사이로 흰 바위 벼랑이 모습을 드러내며 비경을 연출합니다. 이화여대 수련원을 지난 길은 이화령(伊火嶺)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 작은 새재 소조령(小鳥嶺:330m)을 넘으면, 충주시 수안보면에 듭니다. 비슷한 높이의 산자락을 따라 난 길을 걷다가 토종닭을 조리하는 음식점에서 내놓은 평상에 올라 다리를 뻗습니다.

오늘은 일행이 많아서인지 더위 탓인지 쉴만한 장소만 나오면 쉬게 됩니다. 조금 더 걸으면 찬물내기(냉천동)라고도 하는 사시동에 이르는데, 예전에 주막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에는 이즈음에서 주막을 만나지 못하면 탈진할 듯한데, 아주 기가 막힌 입지라 여겨집니다.

안부역(安富驛)

사시말을 지나 안부역에 이르는 뇌실마을 길모퉁이에는 수령이 350년이 더 된 늙은 느티나무가 길손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리품을 쉬면서 얼음과자로 더위를 식힙니다. 예서 안부역이 있던 대안보 마을까지는 15분 걸음이라고 이정표에 나와 있습니다. 뇌실에서 수안보로 가는 작은 고개는 새고개라 불립니다. 문경에서 충주로 이르는 길에는 '새'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고개가 여럿 흩어져 있음을 길을 걸으면서 보게 됩니다. 그 방향이 모두 충주의 동쪽인 것은 지난번에 살폈듯이 새재를 어느 곳의 동쪽에 있는 고개라 볼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곱씹어 봅니다.

돌고개(장고개)에서 내려다 본 안부역 옛터. 멀리 새재가 보인다. /최헌섭

고개랄 것도 없는 모퉁이를 돌면 바로 눈에 드는 마을이 안부역이 있던 대안보 마을입니다. 지금도 마을에 드는 다리 앞에는 선정비(善政碑)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어서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어김없는 길의 경제학을 담고 있으니, 안부역이 이곳에 자리한 것은 새재와 이화령, 하늘재로 이르는 길이 갈라지는 교차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부역(安富驛)은 단월역(丹月驛)과 함께 고려시대에는 광주도(廣州道)에 딸린 역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연원도(連源道)에 배속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연풍현(延豊縣) 역원에 "안부역(安富驛)은 현 북쪽 28리에 있다"고 했고, <여지도서> 충청도 연풍현 역원에 "안보역(安保驛)은 연원도(連源道)에 속한다. 관아의 북쪽 25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이로써 역의 이름이 조선 후기에 안보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부역에서 수안보로 이르는 옛길은 대안보 마을을 거쳐 대안보 1길을 따라 고개를 넘습니다. 고개를 내려서니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에 들게 됩니다. 옛적 길손들도 이곳 온천에서 여정을 마무리하고 노곤한 심신을 달랬을 터, 오늘은 예서 길을 접습니다.

죽음으로 지킨 사랑…조정철과 홍윤애

돌고개와 이어지는 구릉을 이곳에서는 조산(趙山)이라 하는데, 고개 남서쪽 자락에 있는 조정철(趙貞喆)의 무덤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무덤의 주인공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답니다. 그 존재를 처음 드러낸 것은 1994년 충주대학교(현 한국교통대학교) 박물관에서 수행한 지표조사였습니다. 당시 조사에서는 대안보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박석(薄石) 고개 왼쪽에 치장이 잘된 무덤 셋이 있는데, 경상감사를 지낸 조감사(趙監司)의 묘라 전한다고 했습니다. 뒤에 양주조씨대종회의 검증으로 순조(純祖) 때 충청감사를 지낸 조정철의 무덤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제 무덤의 주인공을 알았으니 조정철을 중심으로 제주 유배지에서 펼쳐진 홍윤애(洪允愛)와의 지순한 사랑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그는 1751년 양주 조씨 17세손으로 태어나 영조(英祖) 55년(177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섭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정조(正祖) 1년(1777)에 정조 시해 사건에 주동 역할을 한 장인의 역모죄에 연좌되어 제주 유배형에 처해지고, 머잖아 부인 홍씨가 자진하기에 이릅니다. 적소(謫所)에서의 처지는 모든 면에서 어렵기 그지없었으나, 이웃에 살던 스무살 처녀 홍윤애가 삯바느질을 하면서 뒤를 돌봐주게 됩니다.

   
  돌고개 남서쪽 조산 자락의 조정철 묘역./최헌섭
 

그녀의 정성어린 돌봄은 서로의 마음에 사랑을 싹 틔워 희망으로 자라게 했으나, 정조 5년 3월 반대 정파의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그들을 광풍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조정철을 매로 쳐 죽일 작정으로 관아로 불러들여 초주검을 만들어 내보내었습니다. 이때 문 밖에서 기다리던 홍랑(洪娘)이 거두어 살려내니 김시구는 그녀를 잡아들이게 합니다. 관가로 끌려가기 전 홍 여인은 두 달밖에 안된 어린 딸을 언니에게 안겨 절로 보내고, 조정철에게는 '그대를 살리는 길은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관가로 끌려온 홍 여인이 갖은 문초에도 굴하지 않자 목사는 홍윤애를 목매어 죽입니다.

이후 오랜 유배와 이배를 거쳐 풀려난 조정철은 1811년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를 자청하여 다시 제주를 찾습니다. 목사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곧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단장하고 손수 '홍의녀지비(洪義女之碑)'라 쓴 빗돌을 세워 죽음으로 지킨 그녀의 사랑을 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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