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오동동 이야기] 창동예술촌 '꿀단지 고서방' 김영철 사장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당장 눈앞에 이익이 없어도, 세상을 위해, 후대를 위한 사명감으로 일하는 이들을 우리는 종종 만난다. 마산 창동예술촌 '꿀단지 고서방'을 지키는 김영철(53) 사장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월요일 점심 느닷없이 고서방을 찾았을 때, 김 사장은 다소 퉁명스러웠다. 양손에 목장갑을 끼고 곧 있을 영화포스터 전시회를 한창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가 진행되면서 그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사명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전 이 자료의 주인이 아닙니다. 소장자 자격으로 잠시 보관하고 있는 거지요. 창동에 자리 잡은 것도 그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명백한 주인이 스스로 자리를 부정한다. 자기는 그저 잠시 머물다 떠날 뿐이고, 소장품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청지기 사상이다. 공공재산마저도 자기 것인 양 휘두르는 사람이 나라의 높은 자리를 죄다 꿰차는 마당에, 자기 재산마저 인류의 재산으로 여기고 잠시 맡아둔다는 사람을 마산 창동 한복판에서 만나다니…….

   

자리를 옮겨 몇 가지 소장품을 보여준다. 첫 번째가 천상병 시인 시집인데, 날개를 펼쳐보니 '조현욱님 혜존'이라는 빼뚤빼뚤한 천 시인 친필 사인이 쓰여 있다. 그리고 창가에 붙어 있는 작은 안내문 하나. 1970년 5월 22일 오전 10시 마산시 오동동 159의 20 경남은행 본점에서 열린 '경남은행 개업식' 초청장이다. 이 자료는 경남은행에서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선반을 헤집더니 〈화보, 근대 백 년사〉라는 일본자료를 집어든다. 그가 펼쳐든 페이지에는 옛날 중앙청, 그러니까 조선총독부 사진이 올라와 있었고, 그 옆에 '군사기지조선'이라는 타이틀이 굵은 글씨체로 박혀 있다.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다. 그리고 이 책에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금메달 사진도 수록돼 있었다. 월계수 화분을 가슴에 깊숙이 품은 채로 고개 숙인 바로 그 모습.

   

김 사장은 자료수집광이다. 그중에서도 근현대사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렇게 모은 자료는 지금 고서방에 전시된 거에 스무 배 가깝다고 한다. 최소 500평 정도의 공간은 있어야 창고 안에 있는 자료를 펼쳐보일 수 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부모님이 마산에서 서점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자랐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며 11년 정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회사원 생활을 했다. 그러나 피는 못 속인다고, 잘 다니던 직장을 접고 1998년 창원 상남동에 서점을 내기에 이른다.

그때만 해도 서점운영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수집욕'이었다. 돈을 버는 족족 자료를 사들이는데 썼다. 서점 운영이 어려워지면서는 서울에 있던 집도 처분했고, 수차례 대출도 받았다고 한다. 생활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환멸을 느낄 때가 잦죠. 자료를 수집하는 게 도박과 마약이랑 똑같아요. 좋은 자료를 발견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집하고야 말거든요. 하지만, 관리도 힘들고, 돈이 회전되지도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본잠식이 일어납니다."

김 사장이 현재 처한 상황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환멸'이라는 극한 단어를 쓰는 걸 보면 어느 정도 후회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자식 키우는 사람에게 육아이야기가 가장 재밌듯, 김 사장에겐 자료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한탄은 이미 뒤로하고, 그는 우리 문화에 대한 비전을 그리고 있었다.

"문화는 잘 지켜야 합니다.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를 너무 소홀히 다뤘잖아요.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최근에 많은데, 대부분 개인자격이에요. 이건 좀 문제가 있지 않나요?"

   

오랫동안 직접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해본 사람이라서 그럴까? 그의 신념은 웬만한 학자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자기의 일생을 걸고 모은 자료가 '재산'이 아니라 '문화'라는 철학도 확고했다.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자료를 기증하고 싶어 한다.

그 제안도 구체적이다. 으리으리한 대리석 건물 지을 욕심만 포기하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심지어 조립식 건물이라도 수긍할 수 있다고 한다. 건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료를 모으고 보관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타까워한다. 자기처럼 자료를 아끼고 모았던 어르신들이 오늘도 어디선가에서 세상을 등질 수 있는데, 그 순간 그 자료들은 문화가 될 기회를 놓치고 폐지로 전락한다는 거다. 그 자체가 문화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라는 게 김 사장의 주장이다.

"제가 시간과 재산을 투자해서 하는 데까진 해봤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문화를 지키고 후대에 물려주는 일을 개인에게만 맡기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요?"

그는 문화를 이해하는 지도자가 하루빨리 등장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보도블록 교체하는 것만큼 자료 수집에 관심을 기울이는 지도자를 바라고 있다. 그날이 오면 그는 흔쾌히 모든 자료를 내놓겠다고 한다. 그 대가로 그가 바라는 건 자료관의 '수위 자리'라며 허허롭게 웃는다. 일생을 문화 수집에 매달린 사람으로서 최소한 품위만 세워주면 충분하다는 뜻일 테다.

/글·사진 김태훈(지역스토리텔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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