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것일까.

긴 장마 중에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언제라도 어지러이 피워대는 이 일상의 아지랑이에 아스라이 내가 소진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면, 꼭 찾아야지 하는 생각이 어김없는 기약이 되는 그 곳. 내 두 번째 고향 통영.

십사 년 전에 첫 교직발령을 받아 몇 년 동안의 삶을 꾸리게도 했던 그곳은 익숙함과 낯섦이 묘하게 공존하는 곳이다. 아마도 그건 먼 기억과 지금의 시간이 나와 함께 엉겨 붙어 앓고 있어서라 말할 수 있을 테다.

그렇다면 통영여행은 언제나 '시간'기행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이번에는 무엇보다 처음으로 방문하는 윤이상 생가 기념관과 세병관 덕분으로 그 혼란함의 교차가 더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윤이상 생가에 갓 지은 기념관에서 받은 '새끈'한 느낌은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을까. 그 한쪽 구석에서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지는 윤이상 음악을 배경으로 하루 종일 누군가의 새 연애소설을 읽었다.

글을 읽다가 하나로 맺어지지 못한 감정의 끝은 다시 세병관의 너렁청한 대청마루에 드러누운 낯을 건드는 바람의 감촉으로 이어졌다. 그래, '시간'이란, '기다림'이란 이런 거지.

작은 나로서는 그 폭을 잴 수 없는 널따란 대청마루와 아름드리 크나큰 기둥에 새겨진 시간의 기다림, 쩍쩍 갈라진 나무틈새 결의 고통을 쓸어 만지며 드는 생각이었다. 나는 기어이 이번에도 '기다림'의 여행을, '시간'의 공부를 하고 있었던 거다.

기다림이 그득하게 담겨 있는 물 컵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했던 나는 지금까지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왔다. 다른 기다림의 새 물을 털어 부어 원래 물 컵의 물이 와락 쏟아져버리도록 말이다.

그건 나 자신이 정직하게 시간을, 기다림을 버텨낸 것이라기보다 그들을 저만치 멀리 두고 나 혼자 비겁하게 도망쳐 나온 기만에 가깝다. 그러나 진짜 기다림이란 시간이란, 그 기다림과 시간이 나와 둘둘 함께 감겨 끙끙 앓아내게 하는 천형 같은 것이지 않을까.

도량의 끝을 알 길 없는 세병관 대청마루의 갈라진 틈새의 고통처럼, 시간과 기다림이 그 몸과 함께 엉겨 붙은 그 대청마루의 오래된 고통처럼 말이다.

   

통영을 떠나오며 들른 박경리 묘소에서 마침 시간을 기다리고 앓아낸 사마천을 노래한 박경리의 시가 눈에 띄었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공부 중이다, 기다림과 시간에 대한.

분명한 건 여행이 끝난 후 장마도 끝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끝'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닐지.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