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맥을 찾아서] 김극천 통영 장석 무형문화재 보유자

나비 문양이 희미하게 그려진 황동판이 있다. 김극천(62·사진) 두석장은 실톱을 들고 있다. 장석을 만드는 장인이 두석장(豆錫匠)이다.
슥슥- 실톱 미는 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황동판은 애초, 구리와 니켈을 1800도에서 2000도 사이에서 녹인 쇠막대기였다. 이 막대기를 불에 달구고 물에 식혀 망치로 쳤고 납작하게 폈다. 판의 두께는 2㎜ 정도다. 망치로 두들긴 시간만 몇 시간이다.

그의 증조부가 두석장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두석장이었고 이 물림이 지금 아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5대가 내리 가구 장석을 만드는 두석장이다. 김극천 선생은 4대 두석장이고 64호 중요무형문화재인 아버지 뒤를 이어 1980년 11월 그도 역시 제64호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

마님 고무신 두 켤레는 닳아야 만들어져…

   
 

두석장·나전칠기·소목장·염장(대발)·누비장·갓 등, 통영엔 임진왜란 당시 이런 12개의 공방이란 게 있었다. 이 전통이 남아 통영 두석장 5대가 탄생했다.

김극천 (두석장 문화재)보유자가 쥔 실톱에 장석 원판인 황동판이 차르르- 떨린다. 팽팽한 실톱이 나선형 선을 따라간다. 만든 문양의 흠을 수정하고 자르고 펴고, 쇳가루를 불며 다듬고 또 다듬는다.

밋밋한 가구에 화려한 꽃을 다는 일, 두석장의 일이다. 장석은 목가구의 약한 부분을 보충한다. 가구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미화하는 소품이 장석이다. 고가의 사치품이고 가구를 예술품으로 바꾸는 일, 그는 말없이 일하고 있다.

1970년대 초엔 이랬다. 통영에 나전칠기 공방이 100군데가 넘을 정도였다. 두석공방도 번성했다. 부잣집에서 가구를 주문하고 소목장은 가구를 만들고 두석장은 장석을 시작한다. 애기장·문갑·화장대·반닫이·궤·농 주문도 다양했다.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다 보니 가구를 주문한 부잣집은 애가 탔다. 두석공방 문턱이 닳았다. 공방을 기웃대며 다소곳이 문턱을 넘는 사람은 ‘막걸리를 든 마님’이었다.

‘마님이 막걸리 사다주면서 고무신 두 켤레 닳아야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던 시절이었다. 선납금을 받을 정도로 공방은 성행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방은 20~30명의 일꾼이 있을 정도였다.

어려서, 그는 잔심부름하며 용돈 타 쓰려고 두석장 일을 도왔다. 일은 눈대중으로 익혔다. 집이 두 채, 집안은 부유했다. 공방은 늘 들썩거렸다. 화려한 문양 속에서 나고 자란 그는 문양과 함께 두석장의 흥망성쇠를 지켜봤다.

두석장(豆錫匠)의 두(豆)는 콩 두자를 쓴다. 이유는 막대기로 만들어지는 황동을 펼 때 콩콩- 망치 소리가 나고 장석이 콩처럼 노란색이어서 붙여졌음이다.

집안은 늘 쇳가루였다. 줄로 황동판을 깎고 실톱으로 자르는 일이 대부분인 두석공방, 쇳가루 붙은 옷으로 그는 늘 지저분했다.

“목구멍에 붙은 쇠 먼지 씻어낸다고….”

일하는 사람들은 이 금속 먼지 때문에 자주 막걸리와 돼지고기를 먹었다.

제대 당시 보증을 잘못 선 집안은 몰락했다. 장석장이로 붐볐던 집안은 일꾼 할아버지 한 명만 달랑 남아 있었다. 제대 후 쇳물 붓는 공장에서 일주일 일하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그다. 1975년부터 아버지 밑에서 전수생이 된다.

“천천히 꼼꼼히 하거라. 만들어 붙인 꽃과 나비가 천 년을 간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르쳤다.

   
 

해방 후엔 일본 엽전·총알 녹여 만들고

1980년대 연탄이 들어왔다. 연탄 방에 놓인 황동 장석 가구는 녹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가구 장석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바뀐다. 기름보일러가 들어오면서 스테인리스 스틸 장석은 사라진다.

화려한 장석이 아닌 희멀건 스테인리스 스틸은 다시 황동으로 변한다. 장석은 시대 흐름에 따라 문양이 바뀌고 재료가 바뀌지만, 쇠락으로 접어든다.

가구 크기도 변한다. 아파트나 양옥으로 주거가 바뀌던 시절부터 서양 가구가 이 공간을 차지한다. 장석 가구는 장식용으로 변한다. 서양 가구는 자꾸만 커졌다. 장석 가구는 1m20㎝ 정도 되던 것이 70㎝ 정도로 자꾸만 작아진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황동이 귀할 때는 구리가 많이 섞인 총알을 구해 썼다. 화약을 빼고 이걸 녹였다.

탕탕-

화약을 뺐지만 뇌관이 터지면서 총소리가 나자 동네에서 난리가 났다. 끝난 전쟁이 다시 시작된 걸로 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중요 재료인 니켈도 없을 때였다. 해방 후라 일본 엽전이 남아돌던 때였다. 이걸 녹여 총알과 함께 장석 재료로썼다.

“그 돈, 남겨뒀음 지금은 부자 됐겠다.”

지금은 주로 공장에서 나온 황동판을 쓴다. 하지만, 제작 과정은 모조리 수작업이다.

지금, 김극천 두석장은 문양을 다듬고 수정하며 장석 하나를 끝내고 있다. 자르고 찍고 홈을 내는 일을 마무리 중이다. 손바닥만 한 나비 한 마리가 두석장의 손 위에 있다.

72×38×117㎝, 농 두 개를 포갠 이런 이층농 하나에 이런 나비 장석 같은 250~300개가 들어간다.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나비 장석에 이어 자물쇠를 만들고 여닫기 용 경첩, 손잡이인 간잡이, 서랍 고리……. 짜놓은 가구에 작품들을 붙일 일만 남았다. 완성된 가구를 만들기까지 때론 6개월, 길게는 1년이 걸린다.

   
 

그는 2000점 정도 장석 문양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문양을 끝없이 만들어 내며 소비자 요구를 읽어내려 하지만 찾는 사람이 드물다. 1년에 한두 개, 장석 가구가 팔린다. 관심도 없고 장석을 배우려는 사람도 없다. 다행히 아들이 두석장 이수를 시작했다. 벌이가 안 돼 지금 아들은 다른 일을 겸한다는 게 현실이다.

그의 방에는 장석 제작도구가 널려 있다. 화덕·풀무·도가니·집게·골판·타주망치·중망치·닦달망치·깎칼·물림집게·그림쇠·오금정·걸침정·네모정·납판 등등이 우울하게 놓였다.

그가 말한다.

“우리 것을 찾아 달라. 알아 달라. 장인의 정신과 손놀림을 알아 달라. 장석은 천 년을 간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하루를 걸려 만든 나비 장석 하나가 흑감나무 가구 농 문짝에 날아 앉는다.
황금 나비가 날개를 펴고 1000년 동안 앉아있을, 이 순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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