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가 지닌 매력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겐 그 어느 장르보다 ‘장쾌하고도 미묘한’ 브라스 선율이 돋보인다는 데 있다. 지금 현대 재즈는 미국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지에 가지를 친 나머지 이젠 각국 민속 음악과 결합한 ‘에스닉 재즈(Ethnic Jazz)’가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다. 게다가 재즈 어법을 바탕에 깐 수많은 음악적 시도들은 웬만한 음악 박사학위 소지자도 이해하고 따라가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기몰이의 선봉에 서 있는 건 역시 브라스를 전면에 내세운 정통 본류다. 거장으로 대접받는 트럼페터이자 작곡가인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를 보면 답이 바로 나온다. 그는 초창기 행진곡풍 재즈에서 복잡한 네오밥 뮤직에 이르기까지 브라스를 내세워 재즈 신을 종횡무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급기야 근래에는 록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협연을 벌이기까지 했다. 처음 이 조합을 봤을 땐 ‘이게 어울릴까?’싶었는데 실제로 영상을 통해 공연을 보니 그런대로 감칠맛이 있었다.

지난 5월 23일 열린 경남도민일보 3색 재즈콘서트에서도 가장 큰 박수를 받은 팀은 정통 재즈를 선보인 ‘데이먼 브라운-미카엘 루트자이어 퀸텟’이었다. 이 팀이 특히 돋보인 건 국내에선 좀체 보기 드문 악기인 ‘바리톤 색소폰’을 들고 나왔다는 데 있다. 무대에서 직접 대면한 바리톤 색소폰 음색은 예상대로 멋졌다. 무거운 금속성 저음이 무대는 물론 관객들 가슴까지 흔들어놓는 광경이라니!

원래 이 조합-트럼펫과 바리톤 색소폰-이 세계적으로 사랑받게 된 건 트럼페터 쳇 베이커(Chet Baker)와 색소포니스트 게리 멀리간(Gerry Mulligan) 때문이다. 두 사람이 다른 거장들과 함께 펼친 70년대 초 카네기홀 공연은 지금 들어도 가슴 떨리는 여운을 남긴다. 특히 명작 <My Funny Valentine>은 재즈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애잔한 트럼펫과 중후한 바리톤 색소폰이 때로는 속삭이다가, 때로는 후려치면서 서로 나누는 대화는 4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전혀 빛을 잃지 않는다.

시골 콩쿠르-학교 밴드부로 기억되는 브라스

사실 브라스는 60~7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그리 낯선 악기가 아니다. 시골 장터에서 열리던 가요 콩쿠르에는 기타 드럼과 함께 꼭 브라스가 등장했다. 지금처럼 일렉트릭 악기가 보편적으로 쓰이기 전에는 학교 브라스 밴드도 큰 관심을 끌곤 했다. 선두에 서서 멜로디를 리드하던 트럼펫, 뒤에서 근사한 아랫음을 뒷받침하던 트롬본, 스틱으로 연타를 날리던 작은 북 등등. 아! 물론 그중에서도 여학교 밴드부는 인기 만점이었다. 짧은 치마가 돋보이는 유니폼은 남학생들을 광분(?)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감상대상으로 놓고 보는 게 아니라 직접 연주를 하게 된다면, 브라스는 매우 어려운 악기임이 틀림없다. 중학교 시절 들른 친구 집에서 친구 형이 연주하던 알토 색소폰을 만난 적이 있다. 묘한 매력에 이끌려 온종일 낑낑거렸는데, 뒤늦게 계명이라도 제대로 소리를 내려면 3~6개월이 걸린다는 걸 알곤 바로 포기하고 말았다.

잊고 있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몇 년 전에 본 일본 영화 ‘스윙걸즈’ 덕분이었다. 일본은 본토인 미국보다 재즈가 더 융성한 고장이지만, 사실 독창적인 음악가는 별로 없다. 그 때문에 일본 재즈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피아니스트 오니시 준꼬 정도나 들을까! 하지만, 영화 스윙걸즈는 그래도 일본이 재즈를 사랑하는 나라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각인시켰다고 본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느꼈겠지만, 화면에는 배꼽 잡는 장면들이 곧잘 나온다. 그중에서도 밴드부원들이 빈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연습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브라스를 다루려면 호흡이 강해야 하기 때문에, 통상 초보 밴드부원이라면 악기를 연습하기 전에 반드시 호흡강화 훈련을 먼저 한다. 플라스틱 물병은 바로 그 연습용품이다. 그런데 여학생들이 낑낑거릴 때, 과묵한 한 아이가 입으로 물병을 빨아 쪼그라뜨리는 게 아닌가! 괴력도 괴력이지만 그걸 보고 경악하는 다른 아이들 표정이라니!

어쨌든 브라스가 주조를 이루는 스윙걸즈는 매우 유쾌했다. 어린 여학생들이 브라스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광경도 신기했지만, 빅 밴드 음악이 주는 흥겨움 또한 좋았다. 역시 재즈는 나팔이 무더기로 등장해야만 제 맛이 나는 것 같다.

악기의 왕이요? 트럼펫이잖아요!

요즈음 내가 브라스가 주는 매력을 되새김질하는 음반은 트롬보니스트 로즈웰 러드(Roswell Rudd)의 쿼텟 앨범이다. 제목은 <Keep Your Heart Right>인데, 국내에서는 한국인 보컬리스트 써니 킴이 참여한 앨범으로 유명하다. 재작년에 선물 받은 이 앨범은 브라스, 그중에서도 트롬본이 지닌 개성을 탁월한 연주로 그려내고 있다. 느릿하면서도 어설프게, 예리하면서도 독창적인, 그래서 하이톤 보컬과 어울리는 금속성 저음이 한층 가슴을 저민다.

브라스 연주도 이제 진화를 거듭해 ‘콩쿠르 반주용’이라거나 ‘학교 밴드부 스타일’이란 건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국내 재즈 시장이 넓어지면서 정상급 연주자들 또한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다. 주로 외국 아티스트들이 만든 감상용 재즈만 듣다가 2000년대 들어 서울과 부산에서 만난 젊은 음악인들은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흡사 찰리 파커를 비롯한 재즈 명인들이 다시 살아나온 듯한 연주를 들려주는 이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식 재즈를 그대로 모사(模寫)한다는, 그래서 독창성이 약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일단 연주력만큼은 한국 뮤지션들도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는 게 옳은 평가일 것 같다.

트펌페터이자 빅밴드 지휘자였던 고 메이너드 퍼거슨(Maynard Ferguson)은 이런 말을 남겼다. 브라스, 특히 트럼펫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잊지 말아야 할 말이다. “악기의 왕이요? 트럼펫이잖아요!” 황동색 브라스가 주는 매력을 이 말만큼 ‘단순 무식 과격’하게 요약한 것도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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