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년 마산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

지난 6월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www.facebook.com/groups/feibe) 추천으로 창원시청 온라인홍보담당 임성운 씨 얘기가 담겼다. 이참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추천을 받아 인터뷰하는 고정 코너를 만들기로 했다. 일명 ‘페이비가 추천한 사람-이 사람이 궁금하다’. 지난 5월 29일 페이스북 창원시그룹에 추천 부탁 글을 올리자 페이비들이 여럿을 추천해 주셨다. 이 가운데 김경년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를 첫 번째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아, 추천된 다른 분들도 이 코너가 폐지되기 전까지 언젠가는 만나야 할 분들이다.

불교학생회로 기억되는 ‘10대’

김경년(50)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는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새긴 명찰을 목에 걸고서 옛 시민극장 앞에서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문득 ‘해설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김경년 간사 / 사진 김구연 기자

그는 최근 오픈한 창동예술촌 쪽으로 안내한다. 걸음이 참 빠르다. 사실 창동예술촌 사무국은 따로 있지만, 찾는 사람들 안내하는 것도 스스로 나서 하고 있다.

“초반 반응이 매우 좋아요. 사람 하나 없던 골목이 시끌벅적해지고,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요. 이런 모습에 가슴이 뛰죠.”

창동예술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서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사람을 알 시간이다.

김 간사는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추산동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아이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그래도 김 간사의 10대 시절 기억이 나쁘지 않은 것은 ‘불교학생회’ 덕택이다.

“저의 10대를 바꾸게 한 것은 불교학생회에요. 6학년 때 포교당 앞 대자유치원에 가끔 놀러 갔는데, 그때 불교학생회 오빠들이 절에 오라데요. 부처님 앞에 놓여있는 떡 먹는 재미로 갔죠. 오빠·언니들이 많이 귀여워해 주었죠. 어떤 때는 절에서 먹고 자기도 했어요. 스님한테서는 붓글씨도 배웠고, 법당에 있는 풍금도 쳤죠. 풍금은 학교서 얘들 피아노 치는 거 보고서는 따라 한 건데 곧잘 했어요. 제가 눈썰미도 있고, 음악적 감각도 있고, 좀 못 하는 게 없어요. 중1 때는 아는 언니를 통해 책을 알게 됐어요. 문학적 감성이 10대 때 저를 감싸기도 했죠.”

고등학교는 마산여상(현 무학여고)으로 갔다. 그런데 학교 가는 게 반갑지 않았고 결석도 자주 했다. 당시 여상 다니는 학생들은 머리를 양 갈래로 묶었다. 밖에서 봐도 인문계·실업계라는 것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게 너무 싫어 학교에 정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노래는 곧잘 해 합창반 반장을 하기도 했다. 이때 성악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아버지·어머니는 대학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돈 벌어야 했던 ‘20대’

대학에 가지 못한 김 간사의 20대는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였다. 오빠는 군대 가고 돈 버는 몫은 장녀인 김 간사 몫이었다. 럭키에서 판촉사원으로 일했다. 그런데 1985년 23살 때 B형 간염에 걸렸다. 간염은 무리하면 수치가 올라가기에 일을 더 하기 어려웠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월급 20만 원 받던 때인데 약값이 한 달에 24만 원이나 나왔다. 감당하기 어려워 약을 끊었다. 야쿠르트 하나 먹으며 ‘데려가려면 데려가라’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돈 벌어 오라는 성화가 이어졌다. 이때 김 간사는 탈출구를 찾는다. 결혼이다.

“자꾸 돈 벌어 오라길래 1986년 2월에 가출해 버렸어요. 그리고는 직장 다니면서 알게 된 지금 아저씨랑 그해 4월에 결혼식 올리고 살았죠. 신혼여행도 못 가고 보증금 50만 원·월세 4만 원으로 시작했어요. 금성사 판촉물로 나온 숟가락 이런 거로 살림 꾸리고 그렇게 살았죠. 지금은 빚도 없고, 집도 두 채나 있으니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바깥세상에 눈 뜬 ‘30대’

김 간사는 상인회 일 말고도 현재 마산YMCA 이사를 맡아 청소년사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회활동에 눈을 뜬 건 1996년 34살 때인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주부 모임에서다. 부모 교육을 받으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지에서부터 시작해 소비자운동 및 상담 등으로 활동을 넓혔다. 조금 자신감이 붙자 살던 아파트에 찾아가는 음악회를 만들기도 하고, 꽃길 만들기·놀이터 위험도 조사 등 동네 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산YMCA와 인연이 닿아 지금까지 이를 통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김경년 간사 / 사진 김구연 기자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의 눈이 넓어졌죠. 그냥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조금만 관심 두면 지역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바뀔 수 있는 게 많아요. 이제는 습관화되어서 지나가다가도 눈에 걸리는 게 있으면 그냥 못 지나치죠.”

경남도민일보 홈페이지에서 ‘김경년’으로 검색해보면 ‘음악수행평가, 꼭 사인받아야 되나요?’ ‘합포만을 또 매립한다고요?’ 등 수많은 독자투고 글이 쏟아진다.

창동에 빠지게 된 ‘40대’

30대 후반, 창동에서 가방집 하던 여동생이 시집을 가면서 가게를 대신 맡게 됐다. 그러던 중 2007년 상인회가 창립되는데 “사무실 전화받는 일 정도만 해달라”는 상인회 요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뭐든지 하려고 하는 김 간사 성격에 전화만 받고 있을 리 없었다.

“간사 일 맡고 ‘뭐부터 할까’라는 생각부터 했죠. 시장경영진흥센터 상권개발팀에 전화해서 창동상권 진단부터 부탁했죠. 그걸 시작으로 2007년 12월 메가라인 극장이 문을 닫자 모두가 창동 상권 다 죽을 거라고 했죠. 그때는 황철곤 마산시장님한테 편지도 많이 쓰고 했죠.”

블로그를 통해서는 경남은행장에게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경남은행 예전 본점이었던 부림지점 창동 상인들 통해 성장했으니, 지역사회에 공헌도 좀 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를 통해 일정 부분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극장이 사라진 곳에 소극장이 들어서도록 했고, 청소년 문화존을 만드는데도 땀을 흘렸다. 이런 속에서 상인들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나는 4대 보험도 없는 일용직이에요. 그런데도 길에 나가서 창동 온 사람들에게 설명도 하고 안내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우리 내부의 신뢰는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창동에서 장사하면서도 찾는 사람들에게 이곳 좋은 점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300점포가 스스로 홍보하면서 내부 고객만 잘 잡아도 괜찮아 질 텐데…. 에휴, 힘들어요. 하루 열두 번도 더 ‘그만둔다’ 소리를 하죠.”

김 간사 기억에 창동이 그래도 2002년 정도까지는 주말에 사람이 어느 정도 있었다.

“2003~2004년 되면서 찾는 사람이 확연하게 줄어들었어요. 대형멀티플렉스가 들어오면서 연흥극장 같은 오래된 극장이 다 사라지고,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여기 있던 브랜드들이 다 빠져나갔죠. 강남극장 건물이 무너질 땐 정말 슬펐어요.”

이 때문에 여전히 극장을 접목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다. 과거 창동에는 영화 보러 나온 이들이 많았기에 여기에서 힌트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옛 시민극장 건물을 사들여 ‘대한민국 영화 박물관’ 같은 것을 만들고 싶은 것은 아직은 바람이다. 찾는 이들이 쉬고 머물 수 있는 녹지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또 다른 바람이다. 이는 행정의 힘이 필요한 부분이다.

   
  김경년 간사 / 사진 김구연 기자  

지금, 그리고 앞으로

2007년 4월 간사를 맡고 나서 지금까지 딱 3일을 쉬었다. 요즘도 눈 뜨면 어느새 창동에 와 있다. 그래도 수요일에는 기타도 치고, 셋째 주 일요일에는 ‘걷는 사람들’ 활동을 한다.

페이스북·블로그 활동도 그의 삶에 활력이 되고 있다.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오프라인 모임에는 과거보다는 자주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물론 창동에서 모임이 잡히면 언제든지 뛰어나갈 마음이다. 블로그는 개인 이야기가 아닌 역시 창동 얘기를 담고 있다. 점포 소개도 하고, 사람 소개도 하는 공간이다. 여러 글 가운데 ‘사라져간 영화관 이야기’는 많은 이로부터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바쁜 김 간사라지만 바깥 일 때문에 집안을 흐트러지게 하는 법도 없다.

“엘지전자 다니는 남편은 저녁에 9시나 돼야 들어오고, 뭐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얘들도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시간이 있기에 다들 이해하죠.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거죠. 바깥 일 할 땐 하더라도 밥 제때 안 차려준 적 없고, 제가 또 요리 솜씨도 뛰어나거든요.”

엄마가 이루지 못한 예술의 길은 23살 딸이 걷고 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다. 김 간사는 스스로 음감이 발달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피아노·기타·하모니카·아코디언·북·장구 등 소리 나는 건 다룰 줄 안다. 그냥 소리를 듣고 따라 치다 보니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제일 잘하는 건 젓가락 반주란다. 어릴 적 아버지의 그 소리를 밤새 들었기에….

김경년 간사는 다시 창동 주제로 돌아와 얘길 마무리하려 한다.

“창동은 제 삶의 에너지예요. 들어서는 순간 지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와요. 지금 절에 가도 ‘창동 잘되게 해달라’고 빌어요. 나중에 창동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요. 이곳 골목·풍경들, 그리고 제가 활성화를 위해 처음 가졌던 마음, 그러한 과정들 말이죠. 창동아지매로 기억되고 싶어요. 몇 년 후 창동에 어느 미친 여자가 해설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거에요. 멋있지 않나요?”

이날 첫 만남에서 보는 이가 ‘해설사’라는 단어를 떠올렸으니, 김경년 간사는 이미 미래에 아주 가까이 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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