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 애식가의 음식 이야기 - 냉면

덥다. 정말 덥다. 본격적인 여름은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견딜지 눈앞이 캄캄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친 심신을 달래줄 시원한 음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냉면이 대표적이다. 벌써부터 일부 유명 냉면집은 점심 때 줄을 서야 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하지만 좀 김새는 이야기를 하자면 원래 냉면(평양냉면)은 겨울 음식이다. 조선시대 후기 학자 홍석모는 자신이 쓴 세시풍속서 <동국세시기>에 “냉면은 11월 동짓날에 먹는 음식”이라고 적고 있다. 면의 주재료인 메밀을 가을에 수확하고, 육수의 기본인 동치미가 겨울 음식인 것만 봐도 감이 온다. 변변한 냉장·냉동 시설이 없던 시절, 한 겨울밤 뜨끈한 아랫목에서 차가운 동치미에 신선한 메밀국수를 말아 먹었던 게 냉면이었던 것이다.

냉면과 그 친구들

평양냉면.

확실히 여름 냉면은 겨울에 비해 맛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면발의 차이가 크다. 메밀이란 녀석이 온도 등에 몹시 예민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방의 온도부터 분쇄시 기계 온도, 보관 온도 등을 엄격히 관리해주지 않으면 메밀의 향과 질감은 급격히 그 수준이 떨어지며 특히 더위에 치명적이다.

허나 어쩌겠나. 몸은 자꾸 시원한 걸 넣으라고 아우성 치고, 동료·친구·가족 너나 할 것 없이 냉면집으로 향하는데. 맛은 아쉽지만 냉면이 여름 대표음식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냉면은 비슷한 종류의 친구가 많다. 밀면, (메밀)소바, 막국수 등이 그것이다. 냉면의 원류인 평양식 냉면과 함흥냉면, 그리고 진주냉면도 ‘친구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냉면은 지역적 호불호가 선명하게 갈린다. 자극적인 음식을 즐기는 경남·부산 지역 사람들은 새콤·달콤한 육수·양념(다대기)이 특징인 진주냉면이나 밀면을 선호하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이북지역에서는 밍밍한 고기육수의 평양냉면을 더 찾는다.

그래서인지 서울에는 밀면을 파는 음식점만 아주 극소수 있을 뿐 진주냉면 전문점은 단 한 곳도 없다. 반면 경남과 부산에서는 일부 ‘흉내’를 내는 집이 있긴 하나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먹어보려야 먹어볼 수가 없다.

물론 서울에도 ‘자극적인 입맛’을 만족시켜 줄 냉면이 존재한다. 감자나 고구마 전분면을 쓴 비빔국수 형태의 함흥냉면이 대표적이고, 필동면옥·우래옥·평양면옥·을지면옥·봉피양 등 몇몇 평양냉면 전문점을 제외한 ‘공장산 냉면’ ‘동네 고깃집·분식집 냉면’ 거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메밀면이냐 전분·밀가루면이냐

함흥냉면.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기자는 위와 같은 측면에서 진주냉면과 함흥냉면, 그리고 밀면을 더 유사한 계열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냉면’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평양냉면과 진주냉면·함흥냉면 간의 거리는 진주냉면·함흥냉면과 밀면 사이의 그것보다 훨씬 더 멀어 보인다.

육수·양념에 나타난 맛의 지향점 외에, 양측을 가르는 또 하나의 핵심적 차이는 바로 면이다. 언뜻 보면 메밀면을 쓴다는 점에서 평양냉면·진주냉면이 동일한 계열 같다. 하지만 메밀 함량이 70~80%대에 이르는 평양냉면과 달리, 진주냉면은 30% 이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머지는 전분, 밀가루 등으로 채우는데, 이러면 메밀 특유의 구수하고 그윽한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식감도 차지고 힘 있는 메밀면보다는 ‘쫄깃’한 밀면과 더 가깝다.

면만 놓고 보면, 오히려 평양냉면과 유사한 것은 강원도지역에서 유명한 막국수와 일본식 메밀국수(소바)다. 이들 국수는 평양냉면과 마찬가지로 메밀 함량이 최소 60%에서 최대 100%에 이를 정도로 매우 높아 메밀의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진주냉면.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밀면이 진주 등 경상도지역에서 먹어온 ‘밀국수냉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주목할 만하다. “6·25전쟁 때 부산·경남지역까지 내려온 북한 출신의 피란민들이 메밀을 구하기 어려워 평양냉면 대용으로 만든 게 밀면”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특정 음식이 지역 고유의 토대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단일 요인으로 탄생했을 것 같지는 않다.

밀면.
부산 향토음식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김상애 신라대 교수(식품영양학과)도 “밀면은 경상도지방에서 먹던 밀국수냉면에 이북의 냉면이 접목되어 바지락 육수가 사골이나 육류 육수로 바뀐 것 등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의 진주냉면이 밀면의 기원이라거나 더 우위에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조선시대에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 유명했다는 건 정설로 보이지만, 아쉽게도 평양냉면과 달리 진주냉면의 정확한 레시피는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의 진주냉면은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수십 년 전 ‘복원’된 형태인 것으로 알려진다.

냉면에도 일본의 흔적이 있다?

진주냉면의 육수는 밀면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표음식인 소바의 그것(쯔유)과도 닮았다. 기자는 경남의 한 유명 진주냉면 전문점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새콤달콤한 맛의 육수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식재료인 가쯔오부시(가다랑어포) 맛이 강하게 났던 것이다. 음식 관련 블로그 등 자료를 찾아보니 비단 기자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심지어 일부 냉면·밀면 전문점은 가쯔오부시 육수를 쓴다고 공개적으로 밝혀놓고 있었다.

소바.
가쯔오부시는 우리나라로 치면 ‘마른멸치’ 같은 존재다. 우동, 소바 등 국내에 보편화된 일본요리 대부분에 이 재료가 들어간다. 가쯔오부시 육수에 간장, 다시마, 청주, 설탕 등을 더해 만든 게 우동 국물이고 소바 찍어 먹는 쯔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된 것일까? 왜 이러한 ‘일본의 맛’이 우리 전통음식인 냉면에까지 치고 들어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제강점기, 우리 음식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단맛이 그렇다. 원래 우리 음식은 지금처럼 많이 달지 않았다. 설탕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점은 일제강점기 들어서였으며, 그 전에는 과자·음료수 등 주로 간식류에만 꿀·조청을 사용하는 정도였다.

일본식 간장(진간장)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일제강점기 들어 일본의 간장(왜간장·진간장) 제조업체들은 한반도에 진출해 대대적인 영업 활동을 했다. 일본의 간장은 콩과 소금물만으로 맛을 내는 한반도의 간장(조선간장)과는 달리 밀이나 쌀, 보리 등이 들어가 달콤한 맛이 났다”고 전한다.

이 일본식 간장은 해방 이후에도 단맛 나는 각종 첨가물이 들어간 산분해간장·혼합간장으로 진화(?)를 거듭하게 되는데, 이를 넣은 한국음식 역시 더욱더 들척지근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본과 가까운 경남·부산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일본의 맛’에 점령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부산의 경우 한때 일본인의 수가 국내인보다 더 많은 적도 있었다. 일본의 흔적은 ‘부산오뎅’, ‘의령소바’ 등 지금까지도 음식 이름 자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진주냉면·밀면 육수 등에서 느껴지는 새콤달콤한 맛 역시 마찬가지다. 이게 과연 우리 스스로 적극 개척한 맛일까?

원래 음식이란 주고받으며 발전하는 것

을지면옥.

혹자는 우리 음식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해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전통음식이라는 냉면까지 이 정도이니.

하지만 음식이란 원래 그렇게 나라와 지역 간에 주고받고 교류하면서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일본의 소바가 조선의 한 승려로부터 전파됐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더더욱 불쾌해 할 것이 없다.

다만 그 ‘교류’의 결과물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들척지근한 냉면 육수의 맛, 과연 자랑할 만한 것일까? 각자 취향을 어찌할 수는 없겠으나, 맵고 짜고 단 것부터 좀 밍밍한 것까지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식생활이 더 바람직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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