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로스쿨 준비생 이석원 씨

“인터뷰를 제가요? 살아온 과정은 험난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결과나 성과물이 없는걸요.” 고작 20대가 자신의 입으로 살아온 과정이 험난하단다. 누가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지만,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가 더 궁금해졌다. 작은 체구, 조금 마른 체형에 그는 영재교육 받은, 흔히 학창시절 비교 대상이 되던 잘난 ‘엄마 친구 아들’이었다. 하지만 ‘엄마 친구 아들’에서 ‘집안 꼴통’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이석원(24) 씨는 법학대학원인 로스쿨 준비생이다. 말이 로스쿨 준비생이지, 백수나 다름없다. 친구들이 여기저기 취업 소식을 알려줄 때 그는 묵묵히 도서관 책상에서 책을 편다. 온통 후배들뿐인 도서관에서 로스쿨 준비 3년 차에 접어든 그는 ‘도서관 왕고’다. 그리고 어린 시절 선생님께서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소싯적 촉망받던 영재이기도 하다.

‘엄마 친구 아들’에서 ‘집안 꼴통’으로

로스쿨 준비생 이석원 씨/김유화 기자
“초등학교 때 벽에 붙은 영재모집 글귀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논술, 어휘능력 등 각종 테스트를 받은 후 경남대학교 영재교육센터에서 2년 동안 영재교육을 받았어요. 영재교육에 합격할 당시 선생님께서 대기만성할 아이라며 저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물론 가족이 저에게 거는 기대도 컸고요.”

어린 그에게 영재교육은 공부라기보다는 즐거운 놀이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재밌게 다닐 수 있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의 영재생활은 2년으로 끝났다. 그때부터였을까. 그는 내로라하는 자랑스러운 아들, 누군가의 입에 비교 대상으로 올랐을 ‘엄마 친구 아들’에서 ‘집안 꼴통’으로 전락한다.

“마냥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았어요. 그때 당시 철이 없어서,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속 편하게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방학 보충 수업 때 선생님께 연락도 하지 않고 무단결석을 한 적이 있어요. 먼지 나도록 맞았죠 뭐.”

무단결석을 한 그에게 당시 담임선생님은 ‘국밥 한 그릇 먹자’는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국밥 먹은 다음 날 교실에서 사랑의 매를 들었다. 물론, 집에서도 혼이 났다. 이렇게 공부와 담쌓고 지낸 소싯적 영재는 수학능력시험에서 공부한 만큼만 나온 점수에 좌절하고 재수를 고민하다 결국 지방사립대에 들어가게 된다. 세 살 버릇 어디 가겠는가. 대학 입학 후 물 만난 고기 마냥 대놓고 연신 놀았다.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아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정확히 말하면 제 수업은 빠지고 친구들 수업에 따라 들어갔죠. 영재 출신이던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 방황했다고 변명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당시에는 노는 게 좋았어요.”

로스쿨 준비생 이석원 씨/김유화 기자

8평 남짓 되는 친구 자취방에서 남자 열댓 명이 모여 놀았다. 독서토론이라는 명목으로 유지되던 동아리도 30분 정도 얘기하다 술 먹으러 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하루하루 무작정 놀면서 보냈다. 신이 나게 논 덕분에 그는 대학교 첫 성적에서 총을 다섯 번이나 맞았다. F 학점이 다섯 개, 학사 경고였다.

“성적 받고 깜짝 놀았어요. 최하위 학점인 F 학점이 다섯 개나 있었거든요. 성적이 4.5만 점에 1.0이었나, 아마 그랬을 거예요.”

재수강을 하면 된다는 과선배의 위로가 그나마 학교에 다니던 위로였고 버팀목이었다. 그 후 그는 교내커플이라는 핑크빛 연애를 꿈꾸고 좋아하는 이에게 ‘들이대’지만 인연이 아니었다. 핑크빛 연애 대신 ‘차였다’는 무성한 소문만 학교 내에 퍼졌다. 순식간에 사람들 입에 오르고 내린 그는 ‘쪽팔려서’ 학교를 못 다니겠더란다. 그런 이유로 도피처가 필요했고, 군대에 자진해서 지원하지만, 일주일 만에 마음이 바뀌어 군대에서 나온다. 군대 맛만 본, 반쪽짜리 군대 체험을 하고 온 것이다.

로스쿨 준비생 이석원 씨/김유화 기자

“당시에는 성적도 그렇고, 여자문제도 그렇고 20살 갓 들어선 저에게는 큰 고민이었어요. 도피처로 군대를 지원해 들어갔는데, 막상 훈련소에 가니 제가 왜 이곳에서 이렇게 있나 싶더라고요. 일주일 훈련하고 집에 갈 사람을 묻는데, 그때 손을 들었어요.”

훈련소 생활만 하고 나왔다는 그는 그때 당시 훈련소에서 나온 사람이 100~200명 정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나왔을 때 그는 소위 ‘남자 새끼’가 훈련소조차 못 버텼다고 가족에게서 모진 눈총을 받아야 했다. 심각한 집안 분위기에 그때야 독하게 버티는 법을 배웠다.

반쪽짜리 군인에서 로스쿨 준비생이 되기까지

로스쿨 준비생 이석원 씨/김유화 기자
“훈련소에 일주일 있었어요. 훈련소에서 나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 없이 살던 제 인생 변환점이죠. 제 나름대로 훈련소를 계기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훈련소에서 나오지 않고 군대생활을 계속했다면 오히려 시간을 낭비했을 것 같다고 그는 넌지시 말했다. 이 씨는 오히려 애들 군대 갈 때 안가고 홀로 학교에 남아있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할 게 없어서 공부한다는 말에 다들 비웃겠지만, 그는 정말 할 게 없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들 군대 가고 놀 친구가 없어서 공부했어요. 인생을 멍하니 보내기에는 나 자신이 한심한 생각도 들었고요. 친구들은 군대에서 생활하는데 나는 인생을 허비하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심심해서 공부를 시작할 때쯤 전공이었던 경영학보다 어린 시절부터 흥미 있었던 법학을 조금 더 깊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법 과목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이해도 안 되는 법전을 도서관에서 온종일 읽었으니까요. 법을 공부하고 싶어서 부전공으로 법학을 신청했고, 졸업할 때 법학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어 경영학에서 법학과로 전공을 바꿨어요.”

사회를 유지하는 제도,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자체라는 생각에 법이라는 학문이 그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법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틀을 잡아준다나? 그런 생각으로 그는 재밌게, 쉽게 공부할 수 있었다.

법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법조인이 되고 싶었지만, 일반기업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낀 그는 그때쯤 법학전문대학원인 로스쿨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 내 로스쿨 준비반에 들어가고자 마음먹지만 신나게 놀아 바닥인 성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법학전문대학원도 아닌 대학 내 법학전문대학원 준비반 모집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 때문이었다. 기준도 되지 않았지만 여러 교수님께 로스쿨 자문하러 다녔다. 군대문제도 있어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는 더 악착같이 공부했다.

“부끄럽게도 저는 학교 내 로스쿨 준비반 모집 기준에도 못 미쳤어요. 실컷 놀았던 터라 성적도 단기간에 오르지 않았고요. 로스쿨 준비반 기준에 맞추고자 죽으라 공부를 하니 3학년 말부터 성적이 잘 나왔어요.”

로스쿨도 아닌, 로스쿨 준비반에 들어가고자 치열하게 공부했던 그. 이제는 법학전문대학원인 로스쿨을 꿈꾼다.

불투명한 미래, 그래서 청춘이다

로스쿨 준비생 이석원 씨/김유화 기자

3학년 1학기부터 시작해 올해 3년째 로스쿨을 준비하는 그는 작년 로스쿨 시험에서 예비합격을 받았다. 사실 시험도 너무 못 쳤고 영어점수도 없었는데, 예비합격까지 받아 자신도 놀랐다. 아마 3년간 이 길만 보고 달려온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준비가 덜 되었다고 느꼈고, 로스쿨 불합격인 게 당연한 결과이기에 그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만약 작년에 붙었다면 이렇게 쉬운 거였느냐는 생각을 하며 또 인생 대충 살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로스쿨 준비 3년 차. 이제는 무언가 결판을 내야 할 시기다.

“만약 결과가 안 좋더라도 ‘내 길이 아니니까 안 되는 거다’라는 생각을 해야 마음이 편하겠죠. 그 이후 일은 군대를 다녀와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 잘 안되더라도 이렇게 몇 년 동안 하나를 준비한 경험 자체가 가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로스쿨에 합격할 겁니다.”

로스쿨 1기가 이제 막 졸업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스쿨, 이제 막 시작했다.

“로스쿨은 세계화된 인재, 국제화된 인재, 그리고 법률 서비스의 가격을 낮추고자 만든 제도입니다. 돈 없고 힘든 사람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로스쿨에 대해 말이 많지만,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뀔 때도 수능 치면 얘들 못 따라올 거다 등 말이 많았잖아요.”

그는 로스쿨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불확실한, 아직 정해진 것이 없는 로스쿨이라는 시장을 개척해야 할 인물이 바로 자신이기에 잘할 수 있다고 되뇌었다. 아무리 확신이 있다고 한들 이렇게 무모하게 도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스쿨 준비생 이석원 씨/김유화 기자
“꿈이고 간절하니까 남들이 보기에 무모하게, 조금은 무식하게 공부했어요. 어시장에서 사무실 하나 차리고 변호사 하는 게 꿈이에요. 조금 더 노력해 ICC(국제형사재판소)에도 들어가고 싶고요.”

로스쿨 준비반에조차 자격 미달이었던 그가 작년에 로스쿨 예비합격까지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 친구, 교수 등 주위 사람들의 응원이 컸다. 믿고 의지가 되어 올해는 로스쿨 붙는다는 소리까지 듣는 그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몇 점짜리 아들인 것 같나’는 질문에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30점?”이라고 답하는 그는 아들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 속상하다. 부모님께 잘해야지 생각하면서 막상 부모님을 보면 그게 잘 안 되는 것은 대한민국 아들딸이 매한가지 아닐까. 로스쿨 준비하는 사람 중 가족 반대로 꿈을 접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께서 믿고 지원해 줘 더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언론에서 로스쿨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가 쏟아져 나올 때, 주위 사람들은 미래가 없다며 로스쿨을 포기하라고 다그쳤다. 그때도 이 씨는 앞만 보고, 제 갈 길을 갔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할아버지 영향이 크다. 이 씨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기자를 하셨다. 그리고 유신정권 땐가 언론 통폐합했을 때 나라님 질책하는 기사를 쓰고 경찰에 잡혀가 조사받았다. 하지만 그때도 소신 있게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쓸 거라 말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살아생전 “사나이가 호탕해야지”라는 소리를 그에게 자주 했다. 소신껏 살아오신 분을 보고자란 그도 성인이 된 지금, 누구보다 소신 있게 살고 있다.

“로스쿨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잖아요. 그런 소리에 신경을 안 쓰고 소신대로 하는 편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만하라고 해서 그만둘 정도면 간절한 게 아니죠. 로스쿨 준비를 그만둘 생각도 없고, 그냥 나는 내 갈 길 간다는 생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직 미래는 모르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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