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23) 새재를 넘다

오늘 여정은 새재 아래 두 번째 관문인 조곡관(鳥谷關)에서 출발합니다. 지난 여정에서 살폈듯 그 아래 조곡폭포와 응암(鷹巖) 사이의 바다 벼랑에는 착암기 자국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 머잖은 과거에 기계로 벼랑을 깎아 길을 넓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형은 대체로 옛 경로를 유지하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근년의 정비가 소홀하게 이루어졌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영남대로>에는 1970년대에 이곳 조곡관 아래에 박석(薄石:옛길에서 지면의 유실을 막기 위해 깐 얇은 돌) 포장 구간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또한 살리지 못했으니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난해 12월 5일 유네스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회는 "국가명승지이자 백두대간 및 영남대로의 중심인 문경새재에 대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 길이 가진 역사성과 옛길로서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준비해 나가야 하리라 여겨집니다.

조곡관(鳥谷關)

   
 

임진왜란이 시작된 직후인 선조 27년(1594)에 충주 사람 신충원(申忠元)이 계곡이 좁고 산세가 험한 응암(鷹巖)에 쌓은 성입니다. 새재에 관방을 두자는 논의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이듬해인 선조 26년 6월 5일, 명에서 파견된 경략(經略)의 건의에서 비롯합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곧장 실현되지 못하다가 선조 27년 2월 19일에 유성룡의 건의로 관방을 두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의 기사를 살펴보면, 경도(京都)의 상류이자 나라의 문호가 되는 충주(忠州)를 지킬 방책으로 조령의 형세에 밝은 충주 출신 수문장 신충원을 시켜 축성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관문성을 둔 까닭은 신충원의 말에 잘 드러나 있는데 그가 말하길, "조령의 고개 위에서는 길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어 지킬 수가 없다. 고개에서 동쪽으로 10여 리쯤 내려오면 양쪽 절벽이 매우 험준하고 가운데에는 계곡 물이 고여 있는데 왕래하는 행인들이 횡목(橫木)을 놓아 다리를 만든 곳이 모두 24군데이고 이 곳을 응암이라 부른다. 만약 이 곳에 병기를 두고 지키다가 적병이 올 때 다리를 철거하고 또 시냇물을 가로막아 두 계곡 사이로 큰물이 차게 한다면 사람은 발을 붙이지도 못할 것이다. 이어 활과 쇠뇌·마름쇠(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서너 개의 발을 가진 쇠못)·화포(火砲) 등의 병기로 지키면 불과 1백여 굳센 병사로도 조령의 길을 튼튼히 막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응암은 지금도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 있고, 그 아래에는 벼랑길이 있어 예전에 말을 타고 지나는 이는 누구나 내려서 갔을 만큼 이곳은 새재 관문 중 가장 험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관문을 둔 것이겠지요.

조선은 임진 병자의 양란을 겪은 뒤에 국방을 강화하게 되는데, 인조 현종 연간의 축성 논의를 거쳐 마침내 숙종 임금 때의 축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이곳 새재에서도 숙종(1674~1720) 때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주흘관과 조령관에만 관방을 두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문은 구한말 항일의병전쟁 때 불에 타고 홍예문만 남아 있던 것을 1978년에 다시 세우면서 이름을 조곡관으로 고쳤습니다.

새재를 넘다

조곡관을 지나 머잖은 곳에서 조곡약수를 만나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잡습니다. 문경새재아리랑비를 지나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고 노래하는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조금 더 내처 오르면 귀틀집과 이진터 사이에서 색시폭포를 만납니다. 이 폭포는 근년에 발견된 너비 5~10m, 길이 100m에 이르는 3단 얼음 폭포인데, 지난 2006년에 공모를 통해 색시폭포로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이즈음이 금의환향길이라 불리는 동화원 가는 큰길과 장원급제길로 이름 붙은 작은 길이 갈리는 곳인데, 우리는 큰길을 따라 걷습니다.

바로 위에서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모은 병사들이 진을 친 곳이라 전하는 이진터를 지나면 곧장 동화원(桐華院) 마을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은 조령관 못 미쳐 있는 새재의 마지막 마을인데,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화전민이 많아서 조령초등학교 분교가 운영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70년대 이후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거의 모두가 떠났고, 지금은 한 가구가 남아 여행객들을 상대로 먹거리를 파는 산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화원(또는 동애원)이라 불리던 마을이 있던 곳은 옛 조령원이 있던 자리인데, 바로 <여지도서> 문경현 역원에 '조령원(鳥嶺院)은 조령의 등마루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고 했음입니다.

조령원 옛터를 지나 다소 거친 비탈을 거슬러 오르면, 백두대간이 지나는 안부에 자리한 새재가 눈에 듭니다. 고개에는 조령관(鳥嶺關)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에는 군막터와 산신각이 자리하고, 성 아래에는 조령관을 쌓을 때 발견되었다는 조령약수가 지금도 길손의 갈증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새재 일원에 쌓은 조령진성(鳥嶺鎭城)은 <여지도서> 문경현 성지에 '숙종 무자년(34년:1708)에 성을 쌓았다. 남북으로 18리이며, 둘레는 18,509보이다'라고 나옵니다. 바로 이곳은 옛길 동래로(영남대로)와 통영로가 지나는 해발 645m의 새재인데, 이 고개가 영남 땅의 서쪽 경계를 이루고 고개를 넘으면 충청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조령관. 영남제삼관이라 적혀 있다. /최헌섭

새재를 이르는 옛 이름은 <고려사> 지 권11 지리2 상주목 문경군에 처음 초재(草岾)라 실렸습니다. 이 책에는 '험한 곳이 세 군데인데, 초재(草岾)는 현 서쪽에 있다. 이화현(伊火峴)은 현 서쪽에 있다. 관갑천(串岬遷)은 현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 그 사례입니다. 조선 전기의 각 지지에도 초재로 실리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비로소 지금의 지명인 조령(鳥嶺)으로 나옵니다.

초재든 조령이든 그것은 새재에 대한 새김으로 보아야 합니다. 앞의 예는 한자로 풀을 뜻하는 새(억새, 남새 등)의 뜻을 담은 초(草)에 고개를 이르는 재를 붙여 초재라 한 것입니다. 점(岾)은 땅이나 절의 이름을 이를 때는 그리 읽지만 고개를 이를 때는 재로 읽습니다. 그러다가 한자로 초재라 적던 새재가 날짐승을 이르는 새 조(鳥) 고개 령(嶺)으로 달리 표기됨으로써 새재의 어원을 새도 날아 넘기 어려울 만치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지명에서 개비리가 개와 상관없고 토끼비리가 토끼와 무관한 것처럼 이곳의 새재도 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초재와 조령의 용례를 살피면 초재는 중종 16년 10월 30일 기사를 마지막으로 사라지고, 조령은 중종 3년 3월 5일 기사에 처음 나타납니다. 그러니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중종 연간에 새재의 훈차 표기가 초재에서 조령으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많은 선행 자료에서 새재의 의미에 대해 태종 14년(1414)에 새로 난 고갯길, 계립령과 이화령 사이(새)의 고개라 새재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의 설에 대해서는 이미 <고려사> 지리에서 문경현의 서쪽에 새재라는 험한 곳이 있다 했고, 조령원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의 온돌 시설이 확인되었으므로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뒤의 설에 대해서도 죽령과 새재 사이의 계립령을 그리 부르지 않고, 새재와 추풍령 사이의 이화현 또한 그 사이에 있다 하여 새재라 부르지 않으므로 역시 입론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새재의 의미를 어떻게 새겨야 할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옛말에 동쪽을 일러 살이라 하고 그 변이형이 사라 또는 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풍(東風)을 샛바람이라 하고, 그것은 새바람에서 왔으니 새는 '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새재를 모처의 동쪽 고개라 볼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기존 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더 자료를 모아 천착해 나가야 할 과제로 삼겠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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