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끝난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12)를 보면서 오는 2014년 브라질월드컵도 남미 팀들이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승을 차지한 스페인의 놀라운 경기력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 두 차례 월드컵에서 남미를 대표하는 브라질·아르헨티나 두 팀의 성적과 경기력은 정말 형편없었다. 모두 유럽의 벽에 막혀 8강을 넘지 못했다.

메시, 호나우지뉴, 카카 등 이름값이나 개인 능력에서 전혀 뒤질 게 없었던 팀들이 왜 이리 무력했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조직력'의 차이를 가장 결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유로 2012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스페인·이탈리아·독일 등 강팀들은 같은 리그, 같은 팀 내에서 오랫동안 발을 맞춰온 선수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선수가 주전의 3분의 2가 넘었다.

반면 브라질·아르헨티나는 유럽리그를 중심으로 제각각 다른 팀에서 뛰다 대표팀 소집 때 잠깐잠깐 함께 훈련하는 게 전부다.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까지 비행기만 14시간, 오고가며 낭비하는 에너지도 막심하다. 우리나라가 2002년 월드컵 4강까지 갈 수 있었던 배경엔 장장 1년 6개월 동안 '마음껏 소집하고 마음껏 훈련한' 파격적인 지원 시스템이 있었다.

유럽 3대리그를 제패한 세계적 명장 무리뉴 감독(레알 마드리드)은 현대축구의 이런 흐름을 이른바 '트레이닝론'으로 체계화한 주역이다. 그는 이제 전술 그 자체가 승패를 가르는 시대는 지났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전술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정교하고 효율적인 훈련이라고 말한다.

유로 2012에서 주목을 받은 '제로톱' 전술 역시 막강 조직력을 갖춘 스페인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공수를 빠르게 넘나드는 움직임, 빈틈없는 패스와 정확한 위치선정, 유기적인 포지션 체인지, 강인한 체력 등 모든 게 완벽히 돌아갈 때 이를 넘어설 팀은 많지 않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당시 마라도나.

물론 방법이 아주 없진 않다. 1986년 월드컵을 거의 혼자 힘으로 좌지우지한 마라도나 같은 천재가 있으면 된다. 하지만 "초인은 영화에만 존재한다"고 무리뉴가 그랬던가. 이후 호나우두(브라질), 지단, 메시가 등장했지만 그 누구도 마라도나의 압도적인 '포스'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들이 꼭 부족해서가 아니다. 마라도나 같은 선수를 막기 위해 고안한 강한 압박축구는 한 개인의 경기 지배력을 원천적으로 축소시켰다.

축구의 진화는 이제 거의 그 끝에 다다른 느낌이 들기도 한다. 미국의 한 진화생물학자는 최근 야구에서 4할대 타자가 안 나오는 이유를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 측면에서 찾는다. 즉, 과거와 달리 개개인의 신체적 능력(경기 능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인간의 한계치에 근접한 선수가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주장이다. 평균과 한계치의 거리가 멀 때는 종종 '예외적으로' 초인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스포츠가 인간 진화의 산물 중 하나라면 다른 영역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수천 년 역사 끝에 만들어놓은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은 갈수록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고 또 강고해지고 있다. 물론 그 방향은 '먹고사니즘'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원하는 그대로이다. 그만큼 한 개인 또는 몇몇 소수의 힘으로 이 촘촘한 '수비벽'을 뚫고 뭔가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내는 것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오는 12월 우리가 뽑을 대통령 또한 '청와대 주인'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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