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문화와 예술 속에서 진주 정체성 찾아가야

리영달(78) 선생. 진주 사람이라면 선생의 이름 정도는 익히 들었을 것이다. 리영달 선생은 ‘진주지킴이’ ‘진주 산증인’ ‘진주 터줏대감’ 등으로 불린다.

이 말은 진주에서 태어나고 한평생을 진주에서 살았다는 것만이 아닌, 자신의 뿌리가 진주이고 진주를 사랑하고 진주의 문화와 역사를 잇기 위해 전념해 온 선생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몇 년 전 7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청바지에 조끼를 걸친 채 카메라가방을 들고 사진을 찍기 위해 행사장이나 축제장을 뛰어다니던 선생의 모습을 또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난 6월 11일 선생이 50년 동안 진료해온 리치과에서 선생과 가졌던 인터뷰는 ‘사랑방에 앉아 남강 대숲 바람 소리 듣듯’ 참으로 편안하고 즐거웠다.

리영달 선생./권영란 기자

치과의사라는 본업 외에도 선생은 사진작가로서 2권의 사진집을 펴내고 3회에 걸쳐 사진전시회를 열면서 사실주의 사진기록을 통해 역사의 장에서 잊혀진 진주 사람들과 진주 풍경을 낱낱이 보여주고 추억과 향수를, 진주 정신을 느끼게 하였다. 선생은 1990년대 이후 진주의 문화예술, 역사 현장에 ‘진주의 산증인’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남가람문화거리조성사업, 김시민 공신교서 환수운동, 망진산 봉수대복원 운동, 금성초교 옛 건물 지키기, 진주역사박물관·진주미술관 건립운동, 경남교육박물관 유치운동…. 더러는 선생이 제안하고 더러는 지역민들의 요청으로 나서서 같이 추진한 일들이다. 이렇듯 선생이 지역민들과 함께 일군 성과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진주의 많은 사람들은 사진작가로서 문화예술인으로서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진주 역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년을 바치고 있는 그의 삶에 주목한다.

남강백사장 소싸움…일제 땐 금지령

“내가 어렸을 땐 1년에 2~3번 남강백사장에서 소싸움을 했다. ‘진주소싸움’이라면 유명하지 않은가. 나는 곧잘 구경 갔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찰이 못하게 했다. 남강백사장으로 군중들이 모여들면 혹시 저항운동으로 번질까 봐 못하게 했던 거다. 상상해 봐라. 넓은 백사장에 흰 옷의 사람들이 수 백 수천 모여드는 광경을. 그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지 않은가.”

인터뷰는 ‘에나 진주사람’ 답게 유명한 진주 소싸움과 남강, 개천예술제 이야기로 시작됐다. 선생의 사진작품 중 소싸움 연작들이 많은 것도 유년 시절 소싸움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을까.

당시 소싸움 사진.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강은 진주 사람들의 공동목욕탕이었다. 아이들에겐 놀 때가 없으니 거기가 놀이터다. 여름에는 물놀이장, 겨울엔 썰매장이었다. 1979년 박대통령 피살 직후에도 당시 개천예술제가 중단되었다. 지금은 양력으로 하니 10월에 하는데, 예전에는 11월에 했다. 나는 문화와 전통은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도 단절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강가에 나가 혼자서 예술제했다. 하하. 나는 유독 향토색이, 진주에 대한 바탕이 짙었다.”

선생이 기억하는 진주의 옛 모습과 진주에 살면서 겪었던 일화들이 매듭 풀어진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왔다. 선생의 진주 문화와 역사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 진주 옛 풍경과 일화들이 흑백의 무성영화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옛 진주 남강 모습.

“나는 진주에서는 학부출신 치과의사 1호이다. 나는 진주가 고향이지만 아버지는 서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3·1운동에 학생 신분으로 참여했었다. 특별히 저항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단순히 군중 심리였던 것 같다. 재검거령에 의해 아버지는 서울에서 가장 먼 진주로 도망왔던 것이다. 여기 와서 산청 남사 출신 어머니와 결혼해서 7남매를 두었다.”

선생은 서울대 치과를 졸업한 후 고향 진주에 곧장 내려와 50년 넘게 치과의사로서 일을 해왔다.

젊은 시절 리영달 선생 모습./권영란 기자

“어머니와 동생이 나를 키웠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엄청났는데, 나는 그걸 ‘지리산정기’라 여겼다. 당시에는 제일 큰 벌이가 의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집안을 일으킬 희망이었다. 서울에서 치대를 다닐 때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원래 그림을 잘 그렸는데, 만화를 그렸다. 희망, 야당, 여성, 청춘, 현대여성 등 5대 잡지에 그려주었다. 그 수입으로도 모자라 가정교사도 했다. 아버지는 진주시장 객주의 아들이다. 어머니 고무신가게 했는데 마지막 학기를 두고 아는 가게에서 등록금 푸념을 했나보더라. 당시 시장조합 이사들이 도와줘 졸업할 수 있었다. 둘째지만 장남 역할했다. 우리 형님, 리명길 교수는 진주가 다 아는 기린아였지 않나. 당시 집안을 일으키고 살만하면 진주를 위해 일해야지 생각했다.”

선생은 젊은 날 스스로에게 한, 진주를 위해 진주 사람을 위해 살아야지라는 약속을 지키려 자신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고,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작업, 내 인생의 평생 동무

“대학시절, 나의 은사 김영창 교수가 라이카 카메라 매니아였다. 1958년인가, 3학년 때 덕수궁에서 ‘인간가족 세계전시’ 스타이켄의 다큐사진전을 보았다. 두고두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치과 일 하면서 생활이 경제적으로 조금 안정되니까 사진 찍고 싶어졌다. 그리고는 사진을 시작했다. 자연스레 진주 풍경, 진주 사람을 찍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전시회 ‘나의 고향’은 지금은 없어진 제일다방에서 했고, 1979년 녹지다방에서 두 번째 사진전을 열었다. ‘나의 고향’은 그 뒤 1985년 사진집 ‘나의 고향’으로 펴내었다.”

선생의 사진작품 중 진주소싸움 시리즈는 기록의 가치로나 작품성으로나 이미 극찬을 받은 바 있다. 그 작품 중 한 점은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선생이 찍은 사진들./권영란 기자

선생이 진료하는 치과 2층, 선생의 사무실은 마치 사진작업실과도 같았다. 사방 벽면에는 선생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고, 바닥에는 미처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사진작품들이 어지러이 쌓여져 있었다. 그 중에서 선생이 한 점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현상만 된 큰 사이즈의 흑백사진이었다.

“몇 년인지 기록한 걸 봐야 아는데, 이건 촉석루에서 찍은 거야. 아마 인근 지역에서 노인들이 촉석루 구경을 왔다가 술도 한 잔 하고 흥에 겨웠던 게지. 순간 셔터를 누르는데 그때의 느낌이란….”

선생의 유명한 사진 ‘봄바람’이었다. 4월 초 쯤 일까,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무엔 꽃이 먼저 피고 그 앞에 중절모를 쓰고 모시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할머니를 꼭 껴안고, 옆에 한 할머니는 춤을 추고 있었다.

리영달 선생이 찍은 '춘무' 사진.

선생은 지금도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1주일에 1회는 출사를 한다고 했다. 출사하는 날이면 보통 새벽 5시에 출발, 혼자서 차를 몰고 다닌다고 했다. 최근 몇 년은 계속 ‘꽃’을 찍는다고 했다. 연꽃, 홍매 등.

“내 죽으면 무덤가에 꽃이나 풀들하고 동무하지. 사람들 하고 동무할 수 있나. 지금부터 잘 친해놔야지 싶은 마음이지.”

행복한 노년…고향을 위해 하고픈 일 많아

“1983년 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했는데, 결정은 81년 쯤 났지. 얼마나 비통하던지 도청 환원운동을 했다. 진주 사람에게 호소하며 검은 리본 달기운동을 했다. “진주는 죽었다” 보안대가 찾아왔다. 리명길 교수가 피해를 봤다. 형님은 대학교수 재임명을 받지 못했다. 리 교수는 데모를 할려면 이렇게 해라는 식이었다. 나보다 더 고집스런 사람이었다. 재임명운동을 했는데, 교수들로부터 재임명 동의를 받지 못했다.”

진주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크고 작은 일화들이 선생의 삶을 통해 술술 흘러나왔다.

“91~94년 쯤인가, 남가람문화거리조성사업이 시작됐다. 그때 서정훈 시장은 진주대밭을 복원, 살려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걸 문화거리로 만들자 했다. 이어령 장관의 생각에서 힌트 얻었던 거다. 진주 고유명사를 갖자고 해서 시민공모해서 ‘남가람거리’라고 이름 붙였다. 공청회열고 우리 시민 스스로 진주의 문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주민자치가 시작됐고, 그래서 문화자치동네를 만들자고 시작했다.”

그때쯤이었다. 지금도 선생이 회장으로 있으며 활발히 활동을 벌이고 있는 ‘진주문화사랑모임’을 몇몇 뜻 맞는 이들과 창립을 하게 된 것도. 선생은 자신이 낙천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 다 듣고 서로 절충 한다고 했다.

“문화사랑모임 회원 100명인데 진주 고집쟁이 다 모였다. 그 고집이 진주를 지켜내는 것이기도 하지. 하하. 문화거리 조성때 우리 회원들과 일본 탐방을 갔는데, 참 인상적이었어. 일본은 작은 지역이라도 그 지역의 사소하고 작은 것은 물론이고 무형문화재도 복원해놓았더라. 역사를 기록하고 되찾는 작업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새삼 생각게 했다.”

그때 가진 선생의 생각은 이후 많은 일들을 추진하게 했으며 2006년 김시민장군 공신교서 환수운동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진주성대첩의 김시민 장군에게 내려진 선무공신 김시민 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유출되어져 2005년 11월경 일본의 고미술품 경매 시장에 출품되었던 거다. 이 사실은 재일교포 학자와 일본에 머물던 우리나라 학자에 의하여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선생은 시민모금을 통해 교서를 일본에서 구입, 진주로 가져온 후 국립박물관에 기증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환수운동 벌이던 당시 모습.

“내 인생에도 감동적인 일이지만 진주 역사에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지. 나로서는 뜻있는 시민과 회원들(진주문화사랑모임)의 건의가 잇달아 시민운동으로 이를 찾아오리라는 결심을 굳혔던 거지.”
선생은 오래 전부터 진주성이라는 역사적인 현장인 하드웨어는 있지만 상징적인 기록인 소프트웨어가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고 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찾은 김시민장군 공신교서는 2006년 12월29일 정식으로 보물(제1476호)로 지정되었다. 다시는 없을 일이지. 지금도 박물관에 종종 가보지.”

2009년 이성자미술관 건립 때도 선생은 힘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녔다. 프랑스에 있던 고 이성자 화백이 그림 300점을 기증한 후 이성자미술관 건립운동으로 발전된 일이었다.

“초창기에는 이성자미술관 건립을 두고 얘기했는데 시 사업으로 확정되지 못했다. 방향을 조정해 시립미술관을 짓기로 했다. 이성자 미술관은 별관으로 짓기로 하고. 근데 예산 없어 추진 못하고 있다. LH가 들어서면서 지역민을 위해 전시공간을 만들어주겠다고 해서 혁신도시 내에 미술관 건립하기로 했다. 2014년까지 미술관 건립해 전시하지 못하면 유족들이 회수할 거라 했다. 지금은 도립미술관에 수탁중이다.”

걸인·기생 독립만세운동 재현 중.
1996년 봉수대 준공식 당시.

얼마 전부터 선생은 진주 표석 건립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 사업은 6월 초 1차 공청회와 자문위원회를 열었고, 계속 진주 역사의 기록과 흔적을 찾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소년운동의 발상지가 진주 배영학교라는 것이 밝혀진 뒤 표석 사업이 본격화되었어. 개천예술제 끝난 후 ‘진주보다 작은 도시도 있는데, 진주만 표석이 없다’며 여럿이 문제 제기를 했다. 지난 번 공청회에서 경상대 김덕현 교수가 한양 다음으로 지도가 많은 곳이 진주라더라. 만석꾼 많았는데, 그만큼 역사와 문화와 자연을 다 갖춘 곳이 진주다. 그런데 시민들이 무관심하다.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진주인물 생가, 진주전설 등을 찾아야 한다.”

선생은 진주가 시작된 ‘1300년 전부터의 역사’를 샅샅이 찾는 게 역사를 이어가는 일이고 진주 정체성을 찾는 일이라고 했다. 또 선생은 진주 사람은 은근과 끈기가 있고, 밝고 맑으며, 참을성 많고 옳은 일에는 나서는 기질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진주정신과 역사의 바탕이라고 했다.

“진주 사람으로 할 일 다 하고 싶다. 진주를 사랑하다 죽을 거다.”

참말로, ‘에나 진주사람’ 리영달 선생이었다.

   
 
     
리영달 선생이 쓴 2권의 진주 사진 모음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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