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적게 벌면 적게 쓰면 되지요

진주시내 커피집과 식당들 사이 1층 길모퉁이 작은 옷가게였다. 아는 사람 눈에나 띌 수 있을까 행인들은 그곳이 옷가게인지조차 모를 것 같았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유리문 밖에 행거를 내어놓았기에 옷가게인 줄 알 수 있었다.

열어놓은 유리문 사이로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책을 들여다보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일어나 돌아서는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한 나는 짐짓 손님인 양 들어섰던 것이다.

“구경 좀 할까요?”

“예. 들어오세요.”

들어선 옷가게는 2평 남짓인데 그것도 세모꼴이었다. 가방, 신발, 그리고 붉고 푸른 옷들. 걸려있는 옷들은 전부 태국이나 인도계열의 수제품인 듯한 옷들이었다. 진열된 상품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구경을 하는 양 들어섰지만 좁은 가게 안에서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두어 명의 손님이 동시에 들어서면 주인은 열어놓은 유리문 밖으로 나가있어야 할 지경이었다.

김유진 씨./권영란 기자

다니던 직장 성취감 없어 시작한 일

김유진(31) 씨. 그렇게 그녀와 첫 대면을 했다.

진열된 옷은 모두 태국이나 파키스탄, 네팔 등 여행지 어느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이 입고 있는 평상복들이었다. 한국에선 이런 특별한 취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평소에 입고 다니기엔 적합지 않았다. 나의 경우는 좋아는 하지만 평소 입고 다닐 만큼은 아니었다. 가게로 들어섰지만 진열품보다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했던 지라 대놓고 이야기를 건네 보았다.

김유진 씨./권영란 기자

“진주에도 이런 옷을 찾는 사람들이 있나 봐요?”

“예. 가볍고 편한 옷이 많으니 아무래도 날이 따뜻해지면 좀 더 손쉽게 찾아오지요.”

“손님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2~3일에 두어 명 정도는 사가요.”

나의 걱정스런 물음과는 상관없이 유진 씨는 살풋 웃으며 대답을 건넨다.

“전부 동남아 풍인데요?”

“예. 태국이나 네팔, 파키스탄, 인도 사람들 옷이지요.”

“물품은 직접 여행가서 사오는 건가요?”

“아니오. 러시아나 다른 나라는 가봤는데, 이곳으로는 가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해외여행을 자주 가지도 못하고요. 물품은 서울 신촌에 가서 사와요. 신촌에 이런 풍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있어요. 남편이 파키스탄 사람이고 아내는 한국 사람인, 제가 잘 가는 가게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이 가게를 시작했어요? 특별히 유진 씨가 선호하는 것인가요?”

“물론 좋아해요. 처음엔 내가 입으면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입으니 또 괜찮더라고요.”

그러면서 유진 씨는 벗어놓은 봄 외투를 보여주었다.

김유진 씨가 운영하는 '멜로' 내부./권영란 기자

유진 씨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몇 년 동안 회사원으로 있었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니던 직장이 더 이상 다닐 수가 없더란다. 유진 씨는 어떤 성취감도 어떤 재미도 느낄 수 없는데 계속 출근하며 다니는 건, 회사에 대한 예의도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냥 놀았어요. 그러면서 무얼 할까 생각하는 중에 제가 다니는 와인동호회에 아는 분으로부터 부인이 가게를 내놓았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래서 ‘아, 난 이 일 해야지’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시작했어요. 인테리어도 예전 주인이 하던 그대로예요. 물론 간판도 그대로고요. 가게 이름 ‘멜로’는 인도 말인데 축제라는 뜻이래요. 그냥 전부 맘에 들었어요.”

유진 씨는 별로 어려울 게 없다는 투였다. 귀엽고 여린 얼굴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기호나 시선보다는 자기 생각이 서면 망설이지 않을 사람이었다.

“저는 이런 스타일을 안 입어봤는데 친구들이나 언니들이 권하더라구요. 그리고 원래 이 가게 단골손님들이 있는 데다가 전에 하던 분의 것을 지켜드리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옷을 입고 즐거워하고 예뻐하는 걸 보면 나도 행복한 마음이 들어요.”

내가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가게 한 귀퉁이에 기타 케이스가 있었다.

“기타연주를 잘 하나 봐요?”

“하하, 잘 하지는 않고 기타를 배우고 싶어 퇴사하고 난 뒤 퇴직금으로 샀어요. 근데 초보자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게 너무 좋은 기타를 산 것 같아요. 부지런히 배우지 않아 실력이 엉망이에요.”

유진 씨의 책상 위에 놓인 몇 권의 책과 공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공부를 하는지를 묻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자매들이 모두 공무원인데, 부모님께서도 은근히 공무원 시험 치기를 권하더라는 것이다.

김유진 씨의 책상./권영란 기자

“부모님은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씀 하지 않았어요. 자라는 동안 부모님으로부터 무얼 하지마라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어머니가 평생 일을 하셨는데, 그래도 주말이면 저희 자매들을 데리고 삼랑진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봉사활동을 하게 했어요. 멋진 부모님들이지요. 근데 지금 제가 가게를 하고 있는 건 마음이 편치 않은가 봐요. 요즘은 은근히 위에 언니들처럼 공무원이 되길 바라네요. 저도 공부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제가 즐겁지 않으면 하지를 시작하지 않았겠죠.”

“가게를 곧 그만둘 수도 있겠는데요? 시험에 덜컥 합격되거나 하면….”

“하하, 일단 공부하는 거니까 결과가 그러면 좋고요.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좀 더 하고 싶고 즐거운 일이 생기면 그만 둘 수도 있지요.”

앞으로 공무원이 되거나 직장에 들어가면 생활이 정형화 되면서 자유롭지 않을 건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직장인이 되어 생활 패턴이 꽉 짜여있다고 해서 즐겁지 않거나 여유가 없는 건 아니라고 봐요. 그 속에서 나름의 여유가 있고 그걸 최대한 누릴 수 있는 마음이 문제겠지요.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장 일이 즐거워야 해요.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 저한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김유진 씨가 운영하는 '멜로' 전경./권영란 기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유진 씨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스스로도 아직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그럴 듯하고 보기 좋은, 편하고 안정적인 일을 뜻하지는 않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가게 문은 매일 열어요?”

“아니오. 일 있으면 안 열고 겨울에는 더욱이 찾는 사람이 없어 거의 문 닫고 여행을 가요. 해외보다는 국내 구석구석을 다녔어요. 그래도 요즘엔 매일 문 열어요. 그러니 손님도 늘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한 사람 임금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적게 벌면 적게 쓰면 되지요. 돈은 중요하지만 돈에 매달리지는 않는 것 같아요. 풍요롭지는 않지만 다행히도 돈에 대해선 자유로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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