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농업과 인문학 통해 자립적 삶을 가꾸고 싶어"

우리나라에서 초·중·고교 교사는 충분한 수입을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몇 안 되는 직업 가운데 하나다. 임용이 되면 국가공무원에 준해 처우가 보장된다. ‘안정성’만으로 본다면 어쩌면 재임용을 거듭해야 하는 대학교수보다 나은 자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어렵지 않게 2012년 2월 그만둔 사람이 있다. 더 좋은 자리나 수입을 위한 행동은 아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선생님이 됐지만 학교가 학교 구실을 못하는 상황이라 그만뒀을 따름이라고 했다. 요즘 보기 드문 일이다. 어쩌면 앞으로 갈수록 더욱더 보기 드문 일이 되지 싶다. 그이가 평소 써왔던 글을 바탕으로 삼아 아무래도 농사를 지으려고 그러나 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농사는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가장 훌륭한 직업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이를 넘어서는 무엇이 그이에게 있었다.

세상 보는 눈을 고쳐준 <녹색평론>

2011학년도까지 밀양 밀성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이계삼 씨.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에 턱걸이를 한 그이를 지난 5월 7일 밀양시 삼문동 그이의 집에서 만났다. 그이는 밀양에서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1년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디.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에 들어가려다 당시 진학 지도 교사의 권유로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했다.

이계삼 씨./김훤주 기자

“그게 잘못이었어요.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는 졸업하면 교사 자격증이 주어지는데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는 교직을 이수해도 상위 30%에 들어야 교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어요. 1994년 군대 갔다가 1997년 복학해 이듬해 졸업했는데 그 때 30%에 들지 못했고 그래서 교육대학원에 진학을 했습니다.”

그이가 들어간 대학에서 그이는 극우적이고 속물적이고 남성중심적이고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풍토를 느꼈다. 그런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다. 학생운동을 한 사실과 교직 성적 상위 30%에 못 든 사실 사이에는 연관이 있지 싶다. 그이는 주류인 민족해방(NL)계열이 아니었고 비주류인 민중민주(PD)계열에서도 비주류인 진보학생연합이었다.

“학생운동에 적응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정파 분쟁이 심했고 ‘단순무식’이 지배했으며 배타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진보학생연합 안에서 그렇게 느끼지는 않았고요, 나중에 ‘산개’해서 학생회에 들어가 활동했는데 거기서 NL들과 많이 부딪혔습니다. 소수자를 무시하는 주류 논리, 군사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습속이 많이 있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사가 되고 나서는 그 쪽과는 끊고 교육운동을 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에서 PD계열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민중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서 나왔다. 이계삼 씨 지금의 생각과 행동은 거기서 벗어나 있다. 2011년 8월에 펴낸 자신의 세 번째 책 <변방의 사색>에서 “‘인문학’과 ‘농업’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교육의 대안이자 인간다운 삶의 근본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고 썼다.

“군대에 있을 때 김종철 선생이 펴내는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숙독했습니다. 무릎을 쳤습니다. 좌파 특유의 유물론적 사고 방식과 근대주의적 사고 방식에 대해 반성을 했습니다. <녹색평론>을 통해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권정생 선생의 글과 타르코프스키의 영적이고 냉철한 글을 깊이 읽었습니다. 제게 빠져 있던 것, 없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영성, 모성, 깊은 정신주의…. 그리고 이른바 합리적 힘의 관계, 물질적 성장이나 권력 관계, 사회제도를 성찰하게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마르크스나 레닌이 공허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위에서 제가 읽은 슈마허의 저작들이나 라다크가 쓴 <오래 된 미래> 같은 책들이 영향을 끼친 셈입니다.”

뿌리 내리기 위해 고향 밀양으로 귀환

이계삼 씨./김훤주 기자

이렇게 해서 생태·농업·영성의 가치를 깊이 깨닫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농촌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정이 나름 짐작된다. 도시와 달리 익명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데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후배 하는 식으로 촘촘하게 엮여 있는 억압적 인간관계가 숨통을 막는 것이 밀양과 같은 소도시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밀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을 때 밀양에 다시 오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녹색평론>을 깊이 알게 되면서 다르게 생각하게 됐고 도시가 생리에 좀 맞지 않은 측면도 있었습니다. 2001년 교직에 임용돼 수도권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2002년 집안에 큰 일이 생겨서 제가 밀양에 올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직접 계기는 집안일이 됐지만 돌아올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2003년 밀양 밀성고등학교에 교사가 돼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교육운동과 지역운동에 힘을 쏟았다.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 반대 운동을 벌이던 지율스님과도 인연이 닿아 거들게 됐다. 그이는 지율스님의 목숨을 건 마지막 단식 농성이 끝 모르게 진행되던 2006년 1월 단식 중단을 호소하는 긴 편지를 써서 많은 이들 마음을 울린 적도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밀양지회 사무국장을 맡아 오래 했습니다. 지역에서는 사실상 전교조가 많은 일을 맡게 됩니다. 장애인 투쟁, 2007년 농민회 나락투쟁, 감물리 물공장 건설 반대 투쟁, 평촌 한국화이바 발파 투쟁, 그리고 신공항 이슈까지 지역운동을 벌였습니다.”

공동의 물적 기반 ‘두레기금 너른마당’

그이는 예상대로 전교조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이가 이번에 써낸 책 <변방의 사색>에는 ‘전교조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꼭지가 있고 그 글 끄트머리에는 ‘전교조는 이 글에서 그나마 희망을 갖고 제기한 의제들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사실상 이름만 남은 집단이 되어 버렸다’는 표현이 들어 있다. 하지만 전교조를 통해 지역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밀양 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2008년 촛불 집회가 있었잖아요. 미국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로 말입니다. 밀양 촛불 집회에 젊은 활동가 시민 활동가들이 결합을 하게 됐고 이것이 좋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전교조 밀양지회를 비롯해 <녹색평론> 밀양 독자 모임, 밀양농민회 등이 하나로 모인 것입니다.

이계삼 씨.

그동안 밀양 지역운동은 각개 약진한다는 인상이 짙었습니다. 활동가들도 노령화돼 있었고 부문별 협동도 느슨했습니다. 지역 운동의 공동 물적 기반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했는데, ‘밀양 촛불’을 산파 삼아 ‘밀양 두레기금 너른마당’을 만들었습니다. 협동조합조직입니다. 100명 정도가 추렴해 6000만원 정도 기금을 마련했고 이것으로 밀양 삼문동에 두 층을 만들었습니다. 한 층은 강당·북카페·숙박 시설, 다른 한 층은 생협 겸 식당·공부방. 그동안 없었던 ‘공동의 물적 기반’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전교조·두레기금 너른마당·어린이공부방·두레생협·어린이책시민연대·통합진보당 밀양시위원회·밀양촛불 등이 분담금을 냅니다.”

이계삼 씨는 ‘두레기금 너른마당’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부문운동을 조직하는 구실을 한다. 까다로운 법률 탓에 정식으로 등록된 협동조합은 아니지만 ‘사회적 기업’으로 나아갈 전망도 하고 있다. 주민 생활에 필요한 소액 대출이나 장애인 생산 공동체, 청소년 쉼터 같은 것도 충분히 고려 대상이다.

1월 16일 밀양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 사건

이계삼 씨는 ‘이치우 열사 분신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이기도 하다. 이치우 열사는 올해 1월 16일 정부와 한전의 고압 송전철탑 공사 강행에 맞서 분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밀양 산외면 보라마을에 살던 74세 어르신 농민이다.

이계삼 씨.

76만5000볼트 송전탑은 국가 폭력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크고 중요한 싸움입니다. 초고압입니다.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강원·충남 일부에만 설치돼 있습니다. 15만 4000볼트 보다 보내지는 전력량이 18배 많습니다. 높이가 80~140m나 되고 웅웅대는 소리도 여간 아닙니다. 이런 철탑이 모두 동네를 지나가고 상동면은 면소재지를 꿰뚫고 갑니다. 전자파 피해는 물론이고 재산상 피해도 엄청납니다. 아시다시피 농민들은 연금도 없고 퇴직금도 없고 집이나 농토만 있습니다. 그런데 송전탑이 지나가는 농지는 농민들에게는 0이 됩니다. 전원개발촉진법에는 철탑이 들어서는 자리와 송전선이 지나가는 바로 아래 땅에만 보상해 주게 돼 있습니다. 실은 농지 전체를 못 쓰게 되는데 농지 전체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실제로 농협에서는 이런 농토에 대해서는 담보도 잡아주지 않습니다. 거래가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요. 이런 손해를 농민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에 항의하다 이치우 어르신이 자살을 했는데도 정부와 한전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전이 사기업에 용역을 줘서 그 용역들이 동네 어르신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윽박을 지르고 다닙니다. 거기에 더해 동네마다 서로 다른 얘기를 해서 이간질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주체가 한전이라는 공기업이고 배후에는 중앙정부인 지식경제부가 버티고 있습니다.

국가폭력이지요. 게다가 재발 방지 대책도 없습니다. 덮어놓고 공사를 재개하겠다는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7년 동안 그려지고 있는 ‘지옥도’라 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일궈온 재산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는 데서 생기는 정신적 고통과 압박감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송전탑 문제는 원자력발전과 긴밀하게 붙어 있습니다. 신 고리원전에서 생산되는 전력을 보내기 위해 이번 송전탑을 세운다는데 사실은 기왕에 있어 왔던 송전선로에 전선만 바꿔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 송전탑 건설 없이도 신 고리원전 1호기는 이미 완공돼 상업 발전을 하고 2호기는 시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3~4호기를 2013년 완공하기 전에 송전탑을 세우겠다고 하지만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 많이 하기로 이름난 일본도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사태 이후 올해 5월 5일 ‘원전 제로’를 실현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탈핵 흐름을 거스르는 반동입니다. 원자력은 폐기물까지 고려하면 10만년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므로 건설이 예정돼 있으나 아직 착공하지 않은 신 고리 5~6호기는 승인이 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이는 6월 7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3월 7일 이치우 열사 장례식을 치렀는데 당시 합의 사항 가운데 하나가 “장례 치른 뒤 90일 동안 공사를 재개하지 않는다”였다고 한다. 뒤집으면 ‘90일 지나면 공사를 재개하겠다’가 되는데 그 날이 바로 6월 7일이다.

“그래서 6월 7일 세 번째 탈핵 버스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사 재개를 막아야 합니다. 5월 말까지는 국회 차원에서 벌인 진상조사단 활동 결과에 따라 권고가 나올 것이기에 주민들이 협상도 함께해야겠지요. 개별 지급은 불가능하고 마을발전기금 형식으로 일부 보상을 하겠다고 하는데, 지역 주민 80%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7년 동안 싸워온 바탕이 있는 것이지요. ‘이거 받으려고 했나’, 이런 심정이지요. 그만큼 주민들은 절망을 느낍니다. ‘죽어 버리겠다’는 어르신이 실제로 많습니다. 이런 정서를 정부에 전달하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더 이상 송전탑이 건설되지 않도록 하는 데 1차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야 다음 정부에서 무엇이든 어떻게 해 볼 수 있잖아요.

송전탑 싸움은 여름이 고비입니다.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마지막까지 싸워 못 들어오게 막아내는 한편 5~6호기는 착공 사업 승인 안 나게끔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수요일과 금요일 밀양시내에서 촛불집회와 미사도 하고 있습니다.”

이계삼씨는 인터뷰가 있던 날도 저녁에 부북면 위양리로 주민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마을회관에서 둘레 세 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지금 경과가 어떻게 돼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마땅한지 등등 대책을 일러주고 듣기 위해서였다.

“한전 분열 책동이 보통이 아닙니다. 마을 단위로 분열시키고 이간질합니다. 송전선이 지나는 가르멜 수녀원이 있는데 여기 주민들은 몰라도 수녀원만은 빼주겠다고 했답니다. 또 무슨 면대책위원장에게는 토지 우선 매입해 주겠다고도 하고요. 그동안 공사 방해 등에 대한 채증 사진을 갖고 140건 고소·고발했다가 이치우 열사 분신으로 취하를 하기는 했는데, 증거 자료인 사진은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나중에 주민들 압박하는 데 쓰려는 것이겠지요.”

자립적인 삶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마을학교 운영

어쩌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올 여름이 송전탑 싸움의 고비’라는 말은 이계삼씨 본인의 향후 계획과도 맞물려 있는 일정이다. 이때까지 송전탑 문제가 정리가 되면 이계삼씨는 훨씬 홀가분해진다. 정리되지 않으면 정리되지 않은 대로 일을 쳐 나갈 수밖에 없겠지만.

“농업을 하려고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 교육을 계속할 힘이 없습니다. 한편으로 학교가 ‘교육 불가능’ 상태에 빠졌고요. 학교에는 물질적인 보상도 없고 정신적으로 학생들을 성장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는 자격증이나 졸업장이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닙니다. 학교는 이제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제도만 남아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오늘날 학교는 학벌이라는 증서를 쥐게 해서 노동시장으로 진입시켜 주는 기능으로만 남아 있는데, 이제는 이 ‘취업’이라는 마지막 출구마저 막혀가고 있다는 얘기다. 고등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른바 명문 대학에 들어가도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인데 학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학교는 영토를 모두 잃어버린 제왕이 되었다.’(<변방의 사색> 145쪽)

2009년 펴낸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에서 그이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우정’이며, 교육은 그저 땀이자 숨결이고 사랑일 뿐, 그 정신의 가난함 외에 어떤 완숙한 물적 조건도 부차적이며, 오히려 해악이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실에서 그렇지 못한 까닭을 일러 “자기 만족과 안락에 대한 충동, 그리고 풍요에 게걸든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욕망들을 하치시켜 놓은 곳이 바로 교육의 영역이라고 나는 느낀다.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목록들은 이렇게 하치된 욕망들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했다.

학교에서 이와 같은 교육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상 그만두는 수밖에는 답이 없겠다. 그렇다고 그냥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아예 다른 삶으로 접어들든지 아니면 학교에서 하지 못한 바를 실행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잡든지 하지 싶었다.

“밀양 감물리에 있는 생태학습관 개교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부산교구에서 거기 감물분교 땅을 사들여서 만들었는데요, 농민 사목을 했던 유영일 신부와 빈민 사목에 주로 나섰던 조성제 신부가 나란히 관장과 부관장을 맡으십니다. 귀농대학이라고도 하고 마을대학이라고도 하는데, 농사만 가르치고 배우지 않고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니 마을대학이 더 맞겠습니다. 물론 정식 대학은 아닙니다. 어른을 상대한다는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급여요? 마을대학 운영 실무를 맡으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최저 생계비 수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립할 자신이 없었으면 학교를 그만두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마을대학 자체가 자립적인 삶을 하려는 이들을 위한 곳입니다. 이를 통해 인문학 강의도 하고 농업 강의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건축이라든지 자립하는 삶에 필요한 기술들은 모두 다룰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다음 주부터 두 주 동안 풀무학교 전공부에 들어가 배우고 옵니다.”

풀무학교는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이른다. 풀무학교 전공부는 이 학교 자매학교로 어른들에게 농업에 대한 가르침을 베푸는 곳이다. 마을대학을 준비하기 위해 여기를 다녀오겠다는 것이다.

이계삼 씨는 아내도 직업이 교사다. 아내 벌이가 있기 때문에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는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계삼 씨는 전혀 언짢은 기색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아닙니다. 자립할 자신이 있어서 교직을 그만뒀습니다. 글쓰기라든지 강의 등으로도 나름대로 수입이 있습니다. 마을대학 소유로 1200~1500평 농토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조차도 얼마 안 가 교직 생활을 접고 자립하는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그이에게는 기대가 없다. 희망은 있다. 기대는 누군가에게 해달라고 기대는 일이다. 반면 희망은 내가 됐든 우리가 됐든 팔을 걷어붙이고 몸소 손수 해보자는 것이다. 이계삼 씨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변방의 사색> 173쪽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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