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미국인의 개척 정신을 알려주고 싶었다"

올해 초 경남도민일보 문화체육부 앞으로 책 한 권이 배달됐다. <의문의 강>으로 명명된 책은 쪽수만 600페이지에 가까울 정도로 두꺼웠다. 부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주 어두운 여행’. 부제를 부연하듯 표지에는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사진이 음영으로 새겨져 독자를 바라보고 있다. 뭔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자 프로필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생년이 1935년. 이 방대한 이야기를 번역한 사람이 77세 노신사라니…. 역자는 바로 도내 신경정신과 전문의 1호이자 마산 신포동 한 자리에서만 44년째 신경정신과 의원을 운영 중인 배대균 원장이다.

경남 신경정신과 전문의 1호이자 수필가

배대균 원장이 운영하는 배신경정신과의원. 인터뷰를 위해 찾은 병원 원장실은 여느 병원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병원 원장실이라면 으레 이름도 모를 의학 서적이 빼곡히 꽂힌 서가를 생각하기 마련. 반면, 배 원장 서가 3분의 2는 각종 문예지와 계간지, 동인지 그리고 수필집이 자리 잡고 있다. 나머지 꼭 필요한 의학 서적은 서가 한 귀퉁이에 모셔져 있다. 책상 위에는 A4용지에 컴퓨터로 타이핑된 글귀 몇 편이 보인다. 수필이라고 했다. 마음에 안 찼는지 빨간 펜, 파란 펜으로 군데군데 수정해야 할 곳이 표시돼 있다. 경남 내 신경정신과 전문의 1호인 그는 한국수필작가회 <한국수필>에 등단한 수필가이기도 하다.

배대균 원장./박일호 기자

배 원장은 진해가 고향이다. 아버지는 해방 이후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워 농사도 지었다. 부모님은 특히, 교육열이 높았다. 장남인 배 원장을 비롯해 5남매를 모두 대학교육까지 시키는 등 열성이 대단했다.

배 원장은 진해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나서 1960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이 역시 부모님 권유였다. 신경정신과는 자신이 선택한 전공분야였다. 1960년 당시 국내에 정신과가 처음 선을 보였는데, 배 원장은 사람의 마음을 치료한다는데 매력을 느꼈다.

배 원장과 수필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2년이다. <부산일보>에 ‘노처녀의 심리’라는 칼럼을 맡으면서다.

“전공의 시절부터 간간이 수필을 쓰던 차였지요. 그런데 교수와 동료가 부산일보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이를 서로 미루려 했어요. 그래서 이 청탁이 여차여차하다가 저에게 넘어왔지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게 된 거에요.”

당시 배 원장이 쓴 ‘노처녀의 심리’는 의학칼럼이 아닌 시사칼럼으로 당시 부산일보에서 흥미로운 읽을거리로 각광받았다.

배 원장은 이렇게 신경정신과 전문의라는 ‘천직’과 수필이라는 ‘평생 취미’를 갖게 됐다. 배 원장은 이후 전문의로 해군에 차출돼 진해해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1968년 6개월간 베트남에 파병돼 전쟁 공포증에 시달리는 병사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이듬해 전역 후 곧바로 마산 현재 병원자리에서 신경정신과 의원을 개원했다. 경남에 제일 처음 생긴 신경정신과 전문병원이었다.

이렇게 마산에 터를 잡은 배 원장이 가장 먼저 한 것이 수필 문학 활동이었다.

“1969년에 개원을 하고 <마산동인>을 창립하고,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지요. 오랫동안 참 열심히 했는데, 이사다 뭐다 해서 당시 만든 책들이 다 없어져 아쉽네요.”

매번 열리는 문학 모임에 빠지지 않으며 오직 글을 쓴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갖고 자유인으로 지냈다는 배 원장. 이러한 문예활동을 유심히 살펴보던 있었다. 마산 출신 시인이자 수필가 서인숙 씨였다. 배 원장은 서인숙 시인 추천으로 1991년 정식으로 수필문학계에 등단한다.

“오직 글을 쓴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갖고 자유인으로 지내는데, 뜻하지 않은 행복이었습니다. 수필을 쓰면서 책임감과 행복을 함께 느꼈던 시간이었던 것 같네요.”

수필과 함께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 수필집이다. 배 원장은 그동안 수필집 5권을 냈다. <생각나는 사람들>(1987), <배가 산으로 간다>(1994), <필름 97>(1997), <5월에도 피지 않는 나무>(2005), <Out of word>(2009)가 그것이다. 틈틈이 쓴 수필이 60편 가량 되면 한 권씩 펴냈다. 글감은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본 것, 그리고 언론에 보도되는 자료를 중심으로 찾는다.

“언론이 놓친 것, 사회적 이슈들 그리고 독자들이나 시민들이 간과할만한 사실들에 대해 주로 씁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답게 모두 삶과 인간에 대한 피상적 관조가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정신과 의사로 분석적 생각을 많이 해 수필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분석은 인간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잠재된 무의식을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면 깊이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이야기하게 되니 말이죠. 그래서 제 글은 깊은 마음을 옮기지, 외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판가름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남들과 다른 관점과 시선으로 바라본 글쓰기는 지난 2009년 제28회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의문의 강> 원작자와 협의해 국내 저작권 독점 양도

배대균 원장은 자신이 펴낸 수필 가운데 ‘로저스 소령은 미치지 않았다’를 가장 좋아한다. 영화 <북서로 가는 길>(Northwest pass away)을 보고 느낀 감상을 옮긴 것이다. 영화는 ‘미국개척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로저스 소령이 프랑스·인디언 연합군과 전투에서 승리해 북서 대륙으로 가는 거점을 확보하는 내용이다.

배 원장이 이 영화에서 본 것은 미국인의 개척 정신과 랜든 중위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만이 아니다. 로저스 소령이 보여준 인간미와 통솔력이다. 군 훈련 때 후미에 앰뷸런스가 따라오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낙오자가 생긴다는 값진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이다.

<의문의 강>을 번역하게 된 것도 미국인들의 끝없는 개척 정신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배 원장이 가진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깊은 조예 역시<의문의 강> 번역을 가능하게 했다. 번역은 우연한 기회에 얻은 영감에서 비롯됐다.

배대균 원장./박일호 기자

“오래전 브라질을 관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행 전 자료수집차 브라질 관련 서적을 찾다 보니 ‘루스벨트강’이라는 곳이 있더군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그 강을 발견하고 개척한 것을 기려 브라질 정부에서 이를 ‘루스벨트강’으로 명명했더군요.”

배 원장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미국을 떠나 미개척 오지를 개척하고자 나섰다는 사실이 너무나 대단했다. 그 때문에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등 대도시 관광과 더불어 마나우스 루스벨트강 탐사를 여행코스에 넣었다. 첫 기항지인 상파울루에서 마나우스까지는 비행기만 두세 번을 더 갈아타야 하고, 마나우스에서 루스벨트강까지는 모터보트를 타고 또 며칠을 가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배 원장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미국인의 개척 정신과 의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이후 배 원장은 원작을 구해 번역에 들어갔다. 원작은 내셔널지오그래픽 편집자 캔디스 윌리스가 2006년 집필 출간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의 대단한 관심이 쏠렸으며 일약 베스트셀러로 각광을 받았다. 배 원장은 원작자와 직접 협의해 국내 저작권을 독점 양도받았다. 번역은 혼자 이뤄냈다. 1년 반 정도가 걸렸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자신의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후 그 땀이 채 식기도 전인 1913년 10월에 탐험에 나서 1914년 5월에 탐험을 마쳤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체중이 25㎏가량 빠졌으며, 풍토병 후유증으로 1917년 세상을 떠났다. 타고난 성품이 사냥을 좋아하고 모험심이 강했던 그는 1600㎞에 달하는 강을 자신의 주도로 탐험했는데 그의 사후 동행했던 아들도 자살하는 아픈 가족사를 남겼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미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머나먼 오지에서 탐험과 개척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 책 번역에 몰두한 것은 이러한 루스벨트의 개척정신을 우리 청소년들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지역 문화 창달과 봉사로도 유명

배대균 원장./박일호 기자

배대균 원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회 활동’이다. 배 원장은 평소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창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던 때는 마산MBC 라디오에서 오페라 해설을 맡을 정도로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다. 이런 배 원장은 마산에 클래식 전문 연주단체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지역 음악인들의 중지를 모아 1975년 마산실내악단을 창단했다. 배 원장은 마산실내악단을 10년간 이끌었다. 하지만, 음악인들이 실내악단 활동만을 업으로 할 수 있을 수 없는 등 정기적인 연주에 어려움이 생겼다. 그 때문에 마산실내악단 창단 10주년이 되던 해 마산실내악단을 전문 교향악단으로 발돋움시키고자 마음먹고 마산시립교향악단 창단을 주도한다. 이를 위해 경남도청과 마산 내 예술단체들을 돌며 여론을 조성했다. 처음에는 예산과 인력 문제로 난감해 하던 마산시도 결국 배 원장 의견을 수용해 1984년 마산시립교향악단이 탄생했다. 이후 배 원장은 마산시립교향악단 운영위원을 10년 동안 역임하며, 시민을 위한 교향악단으로 마산시립교향악단을 정착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배 원장은 또 1985년 마산 사랑의 전화를 설립한다. 오직 한 통의 전화로 말 못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시원하게 털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수출자유지역, 한일합섬에 일하는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하고 달래주려고 만들었지요. 병원 환자들 가운데는 이들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이 많았습니다. 어떨 때는 한 공장에서 집단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켜 열댓 명이 병원을 찾기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타지에 나와 일을 한다는 것, 12시간이 넘는 근무 시간, 종일 반복되는 작업에 스트레스가 원인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자살을 하는 친구들도 수없이 봤지요. 그래서 이들이 병원을 오지 않고도 마음을 열고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창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마산 사랑이 전화를 설립으로 연결됐지요.”

부산 생명의 전화보다도 먼저 생긴 마산 사랑의 전화는 당시 정치·사회적 환경에 피폐해진 청춘들의 중요한 소통 창구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와 함께 1980년대에는 사회정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질서 지키기 운동을 벌였으며, 마산의사협회 회장으로 일할 때는 무의촌 진료를 통해 지역사회에 봉사했다. 마산시 내 모든 의사를 대동하고 고성군 무의촌 진료를 갔을 때는 한 지역일간지에 ‘사상 최대의 무료 진료’라는 제목으로 기사도 크게 났단다. 현재는 로터리 클럽 활동을 통해 소아마비 박멸 기금 조성에 힘을 쏟고 있다.

배대균 원장./박일호 기자

“빌 게이츠가 이번에 소아마비 박멸에 써 달라고 2억 5000만 달러를 내놨습니다. 우리 돈으로 치면 3000억 원에 가까운 돈이죠. 제가 몸담은 경남울산지역 로터리 클럽 회원들은 올해 안에 2억 달러를 모금해 소아마비 치료 백신을 전하기로 정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활발한 사회 활동은 마산 시민이 주는 상, 경상남도 문화상, 국민훈장 석류장(마산시향 창단)과 모란장(사회정화 활동) 수상으로 이어졌다.

무엇이 그를 봉사와 나눔의 길로 이끌었을까?

“의사들은 환자만 보면 된다는 타성에 젖어서는 안 됩니다. 의사로서의 직업적 헌신은 물론, 더 나아가 아픈 사람, 소외받는 사람들 마음을 잘 헤아려 치료를 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봉사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봉사도 제 진료 과목 때문인지 남을 위하고, 이해하고, 형식적인 감정이입이 아닌 마음속 깊이 감정이 스며드는 자세를 가지고 임해왔습니다. 이런 제가 봉사를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남이 안 하니까 내가 하고, 내가 하니 남이 안 해도 되니까요. 허허.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환자를 진료하고 또 봉사해야죠.”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