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멘붕'(멘탈 붕괴)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어떤 충격·자극에 의해 무너져버린 정신상태를 뜻한다. 유행까진 아니지만, 지식인사회를 중심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개념도 있다. '피로사회'가 그것이다.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 한국인 교수인 한병철이 제시한 현대사회 특징을 읽는 핵심 키워드이자 책 제목으로, 독일에서 꽤 반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단어의 공통점은 나 자신, 즉 주체의 어떤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피로사회는 쉽게 말해 '자기 착취'의 사회다. 한병철은 이전 시대는 자본가 등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착취하는 사회였으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나는 할 수 있다"란 정언 속에 스스로를 착취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이는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한병철 교수의 저서 〈피로사회〉 표지.

멘붕도 최근 10여 년 사이 유행한 '엽기', '안습' 등과 뚜렷이 대비되는 부분이 있다.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은 〈한겨레〉 칼럼을 통해 "엽기가 대상에 대한 혐오감을 강하게 표현함으로써 가치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주체의 모습을 여전히 담고 있는 데 반해, 멘붕은 상대화된 가치와 해석을 요하는 사건의 범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주체의 무기력감을 드러낸다"고 해석했다.

피로와 멘붕이 동시에 주요 화두로 떠오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무엇 하나 확실치 않은 암울한 시대상의 반영이겠지만, 더 주목할 것은 선과 악, 적과 아, 지배와 피지배,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논리가 갈수록 위력을 잃어가는 현실 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방식이 유효한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MB 심판론'이 힘을 못 쓴 지난 4월 총선이 극명하게 확인시켜준 바, 그 효과는 점점 약화되고 있다. 그들의 '복지'가 거짓이고 그들의 '혁신'이 사기라고 강변해봤자였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그럼 그런 비판을 하는 '주체'인 너희 혹은 우리의 복지와 혁신은 무엇이냐였고, 결국 이에 무능했던 야권은 호조건 속에서도 어이없이 참패했다.

피로와 멘붕은 좌절과 패배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단어 속에는 '자기 성찰'의 결과 또는 반영이라는 결코 작지 않은 의미가 들어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최면이든 주체의 무기력감이든, 그것은 자기 성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한병철식처럼 우리의 현실을 자기 착취의 시대로 꼭 부정적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자기 성찰은 역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돌려내느냐일 것이다. 자기 성찰의 시대에 걸맞은 (정치적) 태도는 무엇일까. 반대로 이런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세력은 과연 어디일까. "4대강으로 가뭄을 극복했다"는 이명박 대통령인가, 아니면 막말 후보자를 감싸고 부정·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해놓고도 여전히 당당한 진보·개혁 진영인가?

0.1초 안에 'MB'라고 단숨에 답하는 당신은 피로와 멘붕의 시대적 함의를 제대로 못 읽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자기 자신이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은" 이 대통령 같은 보수·비민주주의자이거나. "피로사회는 성과에 희열을 느끼고 더 많이 하다가 (결국) 쓰러지고 만다." 한병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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