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공감] 새벽 종합운동장

몇 바퀴째인지 옮기는 걸음이 버거워 보인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걸음인지 뜀박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트랙을 따라 돌았다. 뜀박질은 바닥에서 당기는 힘과 제자리에 머무는 힘을 동시에 벗어날 때 이뤄진다. 속도는 수평·수직 운동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반복되는가에 달렸다.

아주머니는 바닥에서 당기는 힘은 가까스로 벗어나되 앞으로 나갈 힘이 부족해 보였다. 결국, 종종걸음 같은 모양새로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멈추면 그만인데 그를 기어이 밀어붙이는 힘은 무엇인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다.

택시기사 정복을 입은 아저씨는 슬리퍼를 신은 채 천천히 걸었다. 언제부터 걸었는지 알 수 없으나 상당히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은 분명하다. 뒷짐을 지며 천천히 걷는 게 얼마나 운동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라도 걷지 않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20대 여성이 직각으로 구부린 팔을 힘차게 흔들며 지나간다. 모자에 선글라스에 맵시 나는 트레이닝복에 귀에 꽂은 이어폰까지…. 그에게 운동은 이미 익숙해진 일과인 듯하다. 키는 그렇게 크지 않으나 경쾌한 발걸음이 이내 앞서 가는 사람을 따라잡는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가 나란히 트랙을 돈다. 누가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으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음을 옮긴다. 이들에게 속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 노부부 옆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앞질러도 부부는 가장 안쪽 트랙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따라갈 뿐이다.

멀리서 달려오는 까까머리 학생은 대충 봐도 운동이 익숙한 체형이다. 날렵한 몸매에 걸맞게 내딛는 걸음은 거침없다. 땅에 닿는 다리가 긴장하면서 만드는 종아리 근육도 상당히 훈련된 모양새를 갖췄다. 잠깐 멀리서 보였다 싶다가도 누구보다 빨리 커지면서 눈앞을 지나간다.

트랙을 벗어난 바깥쪽 구석에서는 한 아주머니가 굳은 몸을 쭉 폈다. 허리를 오른쪽·왼쪽, 앞·뒤로 기울였다가 바로 선다. 이어 앉아서 한쪽 다리를 길게 뻗으며 손으로 눌러 주고, 반대쪽 다리를 같은 동작으로 편다. 다시 일어선 아주머니는 선 채로 무릎을 껴안아 가슴에 붙인다. 몸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상당히 유연하게 작동했다. 스스로 정해진 프로그램이 있는 듯 아주머니는 이내 트랙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400m 트랙을 갖춘 종합운동장에서 새벽 운동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호사다. 긴 트랙은 좁은 운동장을 도는 것보다 지겹지 않다. 그냥 길을 걷는 것보다 운동량을 측정하기는 수월하다. 시간을 정해놨다면 트랙을 많이 돌수록, 거리를 정했다면 시간을 줄일수록 운동량은 늘어난다.

손목시계를 계속 확인하며 트랙을 뛰는 중년 남성은 거리를 정하고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을 듯하다. 시간을 먼저 정했다면 알람을 맞추면 되지 시계를 계속 확인할 까닭이 없다. 시계를 슬쩍 쳐다보던 남성이 갑자기 더 격한 동작으로 속도를 끌어올린다. 기록은 그렇게 줄어들 것이다.

트랙 출발선에는 라인 번호가 적혀 있다. 트랙이 존재하는 원래 목적은 경쟁을 통해 순위를 가리는 것이다. 같은 선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결승선을 먼저 통과하는 순서에 따라 우열을 가린다. 하지만, 이른 새벽 트랙에서 최소한 트랙을 도는 사람끼리 경쟁하는 법은 없다. 어디에서 출발해도 상관없고 누가 앞질러 가도, 중간에 레인을 바꿔도, 걷거나 뛰어도 문제 될 게 없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앞으로 나갈 뿐이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막지 않는 정도만 신경 쓰면 긴 흐름은 절대 막히지 않는다.

두 바퀴 정도를 느지막하게 완주한 노부부가 운동장 문을 빠져나간다. 트랙을 도는 속도와 운동장을 벗어나는 속도는 전혀 다르지 않다. 막판에 힘을 끌어올렸던 중년 남성은 가쁜 숨을 가다듬고 집에 갈 채비를 한다. 트랙을 함께 돌던 사람들은 또 저마다 속도로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새벽은 서로 경쟁하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고 그래서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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