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70년 된 시골집을 그대로…기록이란 이런 것

당신은 62년 동안 일기를 쓸 수 있습니까? 이곳에 가면 박연묵(79) 선생이 고등학교 때부터 62년 동안 쓴 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가면 선생이 교단 생활 31년 동안 아침조회 때면 불렀던 학급출석부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선생이 담임을 맡았던 학급의 사진과 그들의 작품들과 그들의 편지, 졸업사진, 결혼사진까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사진 속 제자들은 정작 까맣게 잊고 있을 한 시대의 흔적과 풍경이 낱낱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박연묵 선생, 한 사람의 힘은 참 놀랍습니다.

우연히 팸플릿 한 장을 발견했다. 사천시 비토섬 나들이 길에서였다.

‘박연묵 교육박물관? 사천에 이런 곳이 있었나?’

‘30여 년 동안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다가 교직에서 퇴임하여 그동안 정들었던 제자들이 사용한 책과 교과서, 졸업앨범 등 8천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전액 자부담으로 10여개의 전시관을 건립, 관리하고 있다. 선생님은 눈높이 교육상, 경남교육상을 수상하였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62년간 직접 쓴 일기장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0 서울 코엑스에서 국제기록문화전시회에 출품 전시되기도 했다.’

사천시에 만든 팸플릿에서 박연묵 교육박물관을 소개한 글을 읽으며 놀라움은 점점 ‘대단한 분이구나’는 감탄으로 바뀌었다. 일기를 62년 동안 쓰고, 자신이 사용한 교과서를 연도별로 보관하다니 한 마디로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팸플릿에 함께 실린 사진들을 훑어보며 더욱 놀라웠다. 박물관이라 해서 요즘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번듯한 현대식 건물을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박물관 건물이었다. 요즘 시골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오래된 시골집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해서 잘 지어져 보존이 잘된 기와집도 아니고 슬레이트 지붕의 낡고 작은 건물이 여러 채였다. 그렇다고해서 요즘 말로 리모델링을 한 것도 아니었다. 뜻밖의 발견은 작은 감동으로 이어졌다.

밖에서 본 박연묵교육박물관.

70년 동안 살아온 집이 박물관이고 삶이 역사

“항상 열려 있으니 그냥 오면 됩니다.”

약속 시간을 잡기 위해 팸플릿에 있는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금방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감동을 받은 터라 전화기 건너 박연묵 선생의 목소리는 친근하고 꾸밈없이 느껴졌다.

경남 사천시 용현면 신복길 131-27 박연묵 교육박물관.

초행길이지만 다행히도 큰 도로에서부터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마을 안쪽 길을 따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자동차 서너 대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은 예전에 소나 돼지를 키웠음직한 빈 우리가 주변에 있었다. 표지판을 따라가니 키 큰 종려나무가 입구 양 쪽으로 줄을 이었다. 오래 되고 낮은 지붕의 건물들이 우물이 있는 본채 주변으로 들어서 있었다.

박연묵 선생.

박연묵(79) 선생은 이미 마당에 나와 있었다. 평생을 교직에 있었던 분 같지 않은, 시골 동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소박함이 인상적이었다. 선생은 우리 일행이 들어서자 마당에 있는 대나무 평상에 자리를 권했다. 대나무 평상에는 카메라 한 대가 놓여있다. 보기에도 요즘의 디지털이 아니라 필름 넣는 수동 카메라임을 알 수 있었다.

“한 50년 된 카메라인데, 고장 안 나고 잘 사용하고 있어.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이 카메라가 참 많은 일을 했지. 31년 동안 담임 맡은 아이들 사진도 찍어 나누어주고.”

박연묵 선생의 카메라.

선생이 이끄는 대로 따라 나섰다.

4000여 평의 부지는 10개의 전시관과 자연학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교사시절의 집, 학창시절의 방, 의류 수예 소품방, 책방, 자료방, 농기구의 집, 우마차고, 추억의 집, 옛날 생활의 집, 그림의 집 그리고 자연학습원으로 불리는 마당과 주변 밭이었다.

“여긴, 내가 사는 집이고 박물관이지.”

“사천시나 교육청에서 지원이 없습니까?”

“그런 건 없어. 법인도 아니고 개인이 하는 건데, ‘박연묵’ 개인한테 함부로 지원되어서도 안 되고….”

“안내판도 있고 표지판도 있는데요.”

“처음부터 넘들 보여줄라고 만든 게 아냐.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모은 자료들 쉽게 찾아서 활용하려고 이리저리 나누어 정리해 놓은 거지. 혼자서 자료 모으면서 이래 놀고 있으니까 몇 년 전에 교육청에서 안내판 만들자고 찾아오고, 시에서는 팸플릿 만들어 주대. 그게 다야.”

박물관에 대해 설명 중인 박연묵 선생.

“다들 건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이 집이 내가 9살 때 지은 집인데, 70년이 다 된 집이네. 저 위에 있는 게 일제때 지은 건데 저 창문이 일본식 그대로지. 집도 기록이야. 새 건물 지으면 기록이라는 의미가 없제. 이래 놓으니까 다들 외갓집에 온 것 같다, 친정집에 온 것 같다, 더 친근함이 있다면서 이게 오히려 ‘산 박물관’ 같다던데…. 우리 식구들은 집을 부수고 새 집 짓자고 하지. 우리 집사람도 ‘이걸 뭔 자랑이라고, 귀신단지 나올 집을 온 사람들이 다 구경오게 한다’고 야단이지. 이대로가 따신 맛이 나지. 새 집 지으면 무슨 맛이 있것어?”

“정년하고 십 수 년이면 다들 교육이고 뭐고 야인으로 돌아서 있는데 나는 계속 뭔가 기록하고 그걸 여러 후배들이나 학생들에게 남겨주고 싶어.”

선생은 말끝에 그걸 자신의 타고난 천성이고, ‘끼’라고 말했다. ‘타고난 끼’.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을 한다는 건 달리 이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30년 학급출석부, 제자들 결혼사진도 기록 보관

박연묵교육박물관에 진열중인 책.

입구 쪽 한 채는 문 위에는 ‘교사 시절의 집’이라는 나무로 된 이름표가 붙여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사방 빼곡이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방 안 가운데는 유리 진열장에는 세월만큼 누렇게 빛바랜 책들이 한눈에 볼 수 있게끔 전시돼 있다.

광복이후 6·25이전 초등교과서와 일본소학교 시절 자신이 썼던 교과서, 누군가에게 자신이 보낸 편지의 원안, 학생들이 쓴 실천사례 원고 등등.

아이고, 누가 자신이 보내는 편지를 두 통씩 작성해서 한 통은 보관하고 한 통은 보낸다 말인가. 정작 글을 쓴 학생은 보관하지 않을 원고를 담임교사가 수 십 년 동안 보관한단 말인가. 어떤 스승이 자신이 주례를 선 제자들의 결혼사진과 주례사를 모아놓는단 말인가. 참말 어떻게 이런 걸 다 모아둘 수 있나 싶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 쪽 벽면으로 간 선생이 수납장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1부터 12까지의 숫자가 적혀있는 작은 서랍장이 달려 있었다.

“무슨 용도인 줄 알겠나?”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그 아래는 편지들이 꽂혀있는 게 보였지만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받은 편지들을 월별로 모으는 거야. 1년이 되면 다시 그 편지들을 월 별로 분류해서 다른 데 보관하고 다시 빈 통에 1년 동안 받는 편지들을 모으는 거지.”

아, ‘혀를 내두른다’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일 것 같았다.

선생은 박물관 운영하는 데 있어 나름의 세 가지 운영법을 이야기 했다.

박연묵교육박물관.

“첫째 본인의 의지가 있어야 해. 둘째 이사를 가면 안 돼. 이사갈 때 여기서 가져갈 건 하나도 없어. 값나가는 건 하나도 없어. 가져가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거야. 셋째는 공간이 넓어야 해. 시골이니 되지 도회지에서는 이리 할래도 할 수가 없어.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자료가 많아 아파트 한칸을 더 구입했다고 하는데 그건 자료를 착착 재어놓는 창고나 될까 찾아서 활용하기도 쉽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눌 수도 없어. 나는 애당초 손님한테 보일 요량으로 이리 만든 게 아니지. 모으고 버리지 않은 자료를 내가 찾기 쉽도록 구분해놓았던 거지. 근데 이리해 놓고 있으니 사천시나 교육청에서 자꾸 사람들한테 보여주자고 하데.”

기록하고 수집한 선생의 평생이 딱히 의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기록하고 보관하는 게 습관이 되었고 세상이 편해져 더 좋은 게 나오면 버릴 물건도 선생은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이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박연묵교육박물관.

“박연묵 교육박물관이란 이름을 어떻게 붙였냐 하면 몇 년 전에 사천시에서 팸플릿 만든다고 이름을 지어내 놓으라는데 뭘 하노? 사천박물관하자니 사천시 것도 아닌데, 누가 이의를 걸 수도 있을 거고 우리 동네 이름을 붙이자니 ‘신복박불관’? 그것도 그렇고 그래서 내 이름을 붙여봤지. ‘박연묵 교육박물관’이라면 누가 이의를 달지 못하잖아. 그리 해놓고 나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좋다고 하대. 내가 교사로서 살아온 것, 내가 언제 어떻게 살았는지, 내 경험을 담고 있으니까 내 이름을 붙이는 만큼 정확한 게 어디 있것노?”

박연묵교육박물관.

세상엔 사소하거나 쓸모없는 건 없었다

다시 옆 건물인 ‘학창시절의 방’으로 들어가니 선생이 학생시절 읽었던 책들이 꽂혀있었다. 교과서, 참고서 등 1700여 권이 보관돼 잇었다. 그런데 방에는 작은 풍금 2대와 붉은 덮개를 씌운 큰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순간 이 집과 건물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얼핏 하고 있는데 선생이 말했다.

“이 피아노는 50년이 다 되어가는 건데, 큰 아들이 초등학교 때 내가 부산 광복동에 주문했지. 피아노 배달 온 직원이 깜짝 놀라 했지. 무슨 이런 집에 이런 피아노를 들이는 거냐는 거지. 그때 돈으로는 소가 두 마리였는데 지금으로 치면 천만 원 쯤이지.”

당시에 피아노를 사다니 그것도 시골 골짜기에 사는 교사 월급으로….

“선생님이 음악을 아주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지. 큰아들이 피아노를 했음 했지. 지금은 금융계통에서 일하지만. 31년 교사 생활해도 마누라한테 월급봉투 준 적 없어. 30마지기 농사 지어 그건 마누라 다 하라고 했지.”

박연묵교육박물관.

60년대 초반이면 남들은 큰아들이 피아노를 배워 그걸로 먹고 살겠다면 뜯어말리던 시절이었다. 선생은 예술적인 끼도 있고 생각도 남달랐던 것 같다. 자녀들도 큰딸은 의상학을 전공하고 작은딸은 미술을 전공했다니 선생의 끼를 받은 게 아닐까 싶었다.

‘의류 수예 소품방’에는 큰딸이 만든 옷들과 부인의 수예작품과 수예도안이 전시돼 있었고, ‘책방’에는 일반도서 1500여 권, ‘자료방’에는 교육기기와 자료 150점이 각각 전시돼 있었다.

이렇게 한 바퀴를 돌고는 뒷마당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우마차고’에는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우마차 2점이 전시돼 있고, ‘농기구의 집’에는 가마니틀에서부터 짚신, 나무바가지 등 농기구 42점이 전시돼 있었다.

“이게 전부 퇴비사, 우사 등을 청소해서 만든 거야. 이건 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사용하던 것들이지. 수집가들처럼 일부러 찾아 헤매며 모은 것이 아니지. 한 가지 한 가지마다 집에서 누가 이걸 언제 사용했었는지 기억하고 하지. 넘들이 버릴 때 나는 10년이고 20년이고 가져있는 거야. 사용도 하고.”

제8전시관인 추억의 집에는 민속자료와 앨범 등이 전시돼 있었다.

“내가 담임 맡은 학급 아이들과 찍은 사진들이지. 2월이면 다른 교사들은 한가로운데 나는 항상 더 바빴지. 아이들과 사진 찍고 1년 동안 아이들 상 받은 것, 작품들 정리하고, 출석부 챙기고…. 내가 지금 가져있는 카메라가 캐논 수동 카메라인데 한 50년이 다 돼가는 거야. 사진을 찍으면 꼭 찍힌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내줬지.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어.”

박연묵교육박물관.

‘옛날 생활의 집’에는 베틀 등 28점의 생활도구가 전시돼 있었다.

유리진열장 안에 레코드판이 얹힌 유성기가 있었다.

“이것도 지금 사용할 수 있습니까?”

“들을 수 있지. 이건 내가 워낙 음악을 좋아해서 옛날부터 쓰던 거지. 지금은 음악 틀어놓고 들을 시간이 없어.”

박연묵교육박물관에 전시 중인 유성기.

마지막으로 제10전시실은 ‘그림의 집’이었다. 미술을 전공한 딸의 작품 250여 점이 전시돼있었다. 넓은 전시실은 때론 인근 지역의 학생이나 교사들이 찾아오면 체험학습의 장으로 쓰인다고 했다.

“대부분 초임 교사들이 많이 와. 교육청이나 학교에서 견학지로 얘기하고 있나봐.”

박물관 내 4000여 평의 마당과 밭, 개울은 그대로 ‘자연학습원’이었다. 마당 한가운데로 난 길은 시멘트로 되어있는데 같은 넓이와 폭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 평씩 이어놓은 거야. 요즘 사람들은 ‘평’이 얼마큼의 넓이인지 모르잖아. 이곳의 모든 것에 교육적 가치를 불어넣는 거지. 산 있고 개울 있고 밭이 있고, 철마다 온갖 작물을 볼 수 있고 구석구석 의미가 안 들어간 데가 없지. 요새는 장비가 좋아 팍 허물고 새 집 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연을 거슬리고 싶지는 않아. 박물관 내 돈 되는 작물은 우리 마누라가 심은 거고 돈 안되는 꽃이나 나무는 내가 심은 거지.”

박연묵교육박물관. 넓은 뒷마당과 밭 사이로 맑은 개울이 흐르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지고 있었다. 개울 옆에는 애기똥풀이 군락을 이루고 길옆으로는 패랭이꽃이 봉오리를 막 밀어올리고 있었다.

‘박연묵 교육박물관’은 박연묵 선생의 삶의 흔적이 깃든 곳이고 기록의 산실이었다. 선생이 평생 버리지 않은 물건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일이 기록하고 보관한 자료들이 아이들에게는 옛 생활과 역사를 알 수 있는 살아있는 자료가 되고 후배 교사들에게는 교육현장에서 무엇이 소중한 가치인지 그 물음을 던져주고 있었다.

선생과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돌리며 개인의 기록이 어느 역사의 현장 기록보다 값지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선생에겐 사소하거나 쓸모없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선생의 손에, 눈에 들어오면 모든 게 귀한 존재가 되었다. 박연묵 교육박물관은 선생의 인생에 대한 기록이었고 한 가족의 기록이었고,그 기록은 다시 한 세대의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되고 있었다.

박연묵교육박물관.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