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라이브공간]진주시 가좌동 'Jam Bar'

지하로 내려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공간 한쪽을 가득 채운 무대가 눈에 띈다. 무대 가운데 드럼 세트를 중심으로 벽에는 다양한 기타와 관악기가 걸려 있다. 그리고 무대 한쪽은 신시사이저가 차지했다. 무대는 연주할 사람만 서면 언제든 넓은 공간을 음악으로 채울 준비가 됐다는 듯 당당했다. 진주시 가좌동에 있는 'Jam bar'는 이 공간에서 중심은 무대이고, 주인공은 공연자라는 것을 구조로 보여주고 있다. 이 공간에 들어서는 손님은 무대를 즐길 권리와 지킬 의무를 모두 알아야 할 듯했다.

정재훈(42) Jam bar 대표가 드럼 앞에 앉았다. 스틱을 든 손목과 페달을 밟은 다리가 가볍게 움직이자 '쿵작쿵쿵작' 하는 기본 박자가 박력 있게 퍼진다. 박자는 순식간에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지고, 어느 순간 엇박자를 오가며 공간을 흔들었다. 진동은 무대 앞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공간 전체를 채웠다. 음향기기 설치에 상당히 공을 들인 덕이다. Jam bar가 서부 경남지역 문화·예술인, 그리고 음악 동호인에게 보석 같은 공간이 된 이유를 알기까지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음악인 '오부리빵' 대접 싫어 = 정재훈 씨 전공은 운동이다. 어렸을 때부터 씨름·유도 등 다양한 운동을 배웠다. 하지만,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돋보이는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보통 사람보다는 분명히 뛰어났겠지만, 잘하는 선수에게는 조금 밀리는 듯했다. 게다가 만족할 수 없는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시기에 부상까지 겪었다. 자연스럽게 체육인 꿈을 접어야 했다.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으로 사회생활을 한 게 19살이었다.

   
 

"뭐 안 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하게 내세울 능력은 없었고 돈은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것저것 막 했습니다."

길거리 장사부터 자동차 부품 도매업, 중고자동차 매매업, 술집 운영까지 20여 가지 일을 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가 6년 전인 2005년 무렵 정재훈 씨는 선배가 운영하는 실용음악 학원에 우연히 등록한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하기는 했지만,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원래 어릴 때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렇잖아요. 하지만, 집에서 반대가 심해 악기를 연습한다거나 할 수 없었지요. 그러면서 점점 잊고 살았고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가 드니 말릴 사람도 없고…. 선배가 운영하는 학원을 찾아갔지요."

학원 문을 열자 한눈에 들어온 게 드럼이었다. 학원 문을 열기 전까지는 탐나는 악기도 많았다. 현악기 생각을 가장 많이 했고 관악기도 모양새가 괜찮을 듯했다. 하지만, 드럼 세트를 보자 다른 악기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 바로 이 악기라고 생각했다. 드럼을 칠 때면 무엇인가 막힌 게 뚫렸고 번잡한 고민도 날아갔다. 박자에 온몸을 맡기며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 느낌이 좋았다. 늦깎이 음악인이 된 셈이다.

정재훈 씨는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일을 벌인다. 바로 Jam bar를 개업한 것이다. 늦바람(?)이 든 재훈 씨에게 다른 일을 하면서 따로 시간을 짜내 연습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이왕 시작한 것 다른 방해 없이 신나게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짜낸 생각이 라이브 바 개업이다.

"그냥 취미를 업으로 삼았지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학원을 다니면서 좋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는데, 이들이 지역에서 '오부리빵' 대접 이상을 못 받더라고요. 지역 음악인들 놀이터를 만들어줘야겠다, 오부리빵 취급을 받지 않고 존경받는 음악인이 됐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그 공간을 내가 만들어야겠다…."

유흥주점 같은 곳에서 취객이 노래할 때 반주해주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이 '오부리빵'이다. 좋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천대받는 게 억울했던 정재훈 씨는 가좌동에 있는 66㎡ 지하 공간에 자리를 편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작은 공간이 큰소리치기 시작한다.

'대접받지는 못해도 무시당하지는 말자', '음악을 즐기고 싶다면 여기서 마음껏 즐겨라'.

정재훈 씨는 지역 음악인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공간 Jam bar를 그렇게 시작했다.

◇지역 음악인과 오래도록 함께 할 것 = "손바닥만 한 공간 절반이 무대였지요. 좌석은 몇 개 되지도 않고…. 처음부터 연주자에게만 무대를 개방했어요. 따로 홍보도 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손님도 가려 받는 비좁은 공간은 금세 지역 음악인들에게 소중한 보금자리가 된다. 누구보다 무대를 갈망했던 그들이었다. 소문이 이어지며 '딴따라' 대접에 질린 음악인들이 Jam bar를 찾기 시작했다. 직장인 밴드가 오기 시작했고, 학생 밴드도 기웃거렸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하동·사천·산청에서도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작은 무대는 꾸준히 음악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줬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Jam bar를 사랑했고 정재훈 씨는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지난 4월 Jam bar는 3배 가까운 넓은 공간으로 확장 이전을 하게 된다.

"손님들이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했어요. 실내장식도 많이 도와주셨고요. 저도 더 좋은 무대와 넉넉한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돼 좋았고요."

넉넉한 무대는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록밴드, 포크, 색소폰 연주, 재즈공연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이어진다. 연주만 가능하다면 손님은 곧 무대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무대는 함께 섞이기도 한다. 정재훈 씨는 드럼과 베이스 기타, 기타 등을 연주하며 무대 양념 역할도 한다. 그렇게 서로 만들고 함께 감상하는 공간이 Jam bar이다.

"손님들이 항상 '제발 그만두지 마라', '초심 잃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요. 저도 이일 저일 많이 했지만, 남은 삶은 이 공간을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자존심으로 시작했던 일이 이제 사명감으로 하는 일이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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