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사람] 박수영 마산 창동 '슈바빙' 레스토랑 사장

1980년대 중반, 마산이 그저 좋은 한 중년 아저씨는 그런 생각을 한다. '왜 여기는 사람들이, 특히 중년들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제대로 된 공간이 없지?' 기껏 둘러봐야 커피숍 아니면 술집 정도였다. 정작 자신이 운영하는 커피숍도 뭔가 아쉽게 보였다.

그러다 그는 동성동에 있는 2층 집을 하나 구한다. 그때가 1986년인가, 1987년인가…. 공간은 마련했으니 제대로 꾸밀 순서였다. '누가 언제 오더라도 편안한 고급 레스토랑'. 방향을 그렇게 정하고 공간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벽을 감싸는 돌, 입구를 받치고 천장을 가로지를 나무 하나 예사롭게 자리를 정하지 않았다.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재료를 구했으며, 솜씨 있는 일꾼에게만 일을 맡겼다. 인테리어 관련 책을 구하고자 부산을 가는 일도 잦았다.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들어갔다. 그렇게 1년을 보내자 가족조차 그를 황당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1988년, 대부분 사람은 올림픽을 떠올릴 그해 7월 1일 '슈바빙'이 문을 연다. 슈바빙 주인 박수영(68) 씨는 그때부터 23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애틋한 공간을 불쑥 찾은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름 짓는 것만 6개월 남짓 고민했어요. 작가 전혜린 씨가 쓴 글을 보고 독일 뮌헨의 슈바빙 거리에 대해 매력을 느꼈지요. 이거다 싶더라고요."

1년 남짓 공을 들인 공간이 자아내는 분위기, 미 8군 출신 주방장이 내놓는 차원이 다른 요리. 속된 말로 슈바빙은 '대박'을 쳤다. 사람이 사람에게 밀려서 창동 거리를 걸었다는 그때, 많은 사람이 슈바빙 앞에 줄을 섰다. 당시 1만~2만 원인 만만찮은 음식값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분 나빠서 오는 손님도 기분 좋아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부담 없이 모이고 추억을 남기고…."

   
 

그런 공간과 분위기, 음식을 제공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박수영 씨 자신은 손님과 적당한 거리를 뒀다. 23년 동안 그는 손님과 합석을 하지 않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챙기기도 벅찬데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이 즐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박수영 씨는 가족들도 식당 출입을 못하게 했다.

23년이 흘렀다. 사람이 사람에게 밀려다니던 창동은 을씨년스러운 거리로 변했다. 마산과 중심 상권 침체를 슈바빙이라고 피해갈 수만은 없었다. "장사라고 생각했다면 못했을 것입니다. 책임감으로 이 공간을 지켰지요. 그래서 한참 잘 될 때 가게를 키울 생각도, 안 될 때 접을 생각도 안 했어요. 가족들도 슈바빙을 남긴 공은 있지만 경영자로서는 낙제라고 말해요. 저도 인정하고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미소를 머금으며 담담하게 답을 이어가던 박수영 씨가 헛헛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23년 동안 추억은 있을지언정 이제 미래가 없는 슈바빙에 대한 애틋함이 겹쳤다. 슈바빙은 창동 공영주차장 조성으로 이제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다. 창원시와 몇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건물을 비워야 한다.

"장사는 슈바빙이 마지막이에요. 이제 흙을 밟고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요. 몸이 좋지 않은 아내도 살펴야 하고요. 이미 갈 곳은 정해놓았어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편한 곳을 지켰다면 이제 우리 가족이 편한 곳을 만들어야지요."

박수영 씨는 모든 질문을 오래 곱씹어서 답했다. 슈바빙에 대한 대부분 추억과 공은 손님들에게 돌렸다.

"긴 시간이지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항상 행복하기를 바랐지만 섭섭하셨던 분도 있겠지요. 모든 사람들을 다 챙기지 못한 미안함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한 자리를 지켰다는 것 한 가지만 인정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미안한 것을 갚았구나 생각해주세요. 늘 손님들에게 고마워요. 앞에 다른 말 모두 빼고 결국 남는 말은 고맙다는 것뿐이네요. 그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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