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사람] 함안 여항면 주서리 대산마을서 '점빵'하는 곽순덕 할머니

함안 여항산 자락에서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사진기자 선배와 겨울철 풍경을 찍으러 간 날이었다. 백발의 할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 부럽지 않게 입담이 좋았다. 중간 중간 까르르 까르르하는 웃음소리도 귀여웠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빨려들었다.

여태 살아온 이야기였지만, 이제 할머니와 같은 사연도 만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차례 <경남도민일보>에 소개된 적이 있었고,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했다.

곽순덕(78) 할머니는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대산마을 회관 맞은편에서 점빵을 꾸려가고 있다. 녹슬고 빛바랜 '담배'라는 간판을 단 구멍가게다. 시골마다 '담배'라는 문구가 이곳이 담배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곳임을 일러준다. '○○상점'이라는 간판을 대신하는 셈이다. 지금은 버스 정류소 노릇을 하지 않지만, 가게에는 아직 '우성여객 주서 정류소'라는 오래된 나무 간판도 붙어 있다.

   
 

할머니 연락처를 몰랐던 지난 6월 중순 사진기자 선배와 무작정 대산마을로 향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빵에 계실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이웃 어르신들에게 여쭸다. 어르신들은 할머니가 논에 일하러 갔을 것이라고 했다. 논 위치를 알려준 곳으로 가도 할머니를 볼 수 없었다. 온 논을 다 찾아보고 동네 이곳저곳 다 뒤졌지만, 할머니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꼭 다시 만나 할머니의 얘기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여항면사무소와 대산마을 이장님을 통해 할머니 집 연락처를 알게 됐다. 전화를 걸었는데, 벌써 6개월 전 일이라서 그런지 할머니는 나를 기억 못 하는 듯했다. 그저 까르르 까르르하던 웃음소리만 여전했다.

지난 7월 13일 오전 할머니 얼굴을 다시 보게 된 순간이었다. 할머니는 활짝 웃으면서 반겼다. "아~! 꼭 처녀같이 생겼다고 말한 그 총각. 아이고~ 오랜만이네." '처녀 같다'는 말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할머니의 삶은 버스 정류소와 점빵을 빼고 말할 수 없다. 반평생 넘게 정류소와 점빵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50년 정도 전 천일회사 정류소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할머니는 일러줬다. 남편이 소장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줬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살아간 방법을 전해줬다. "우리 아저씨가 일본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어. 거제포로수용소에서도 근무했고, 마을에서 비료 창고 만들고, 도로도 넓히면서 많이 발전시켰지. 일본에서는 부실 공사 안 하고 떼먹는 게 없다더라고. 우리 할배도 교육을 그렇게 받았어. 근데, 우리 국회는 도둑놈 소굴이고, 대통령도 도둑질하고, 즈그 배 채우려고 한다 아이가. 하하." 쓴웃음 속에 삶의 철학이 묻어났다. 할머니는 21년 전 할아버지를 떠나보냈다. 할아버지는 살아있다면 81세다.

할머니의 집은 정류소인 동시에 버스 기사와 차장, 조수들의 쉼터였다. 밥을 해주고 이들을 재워주는 곳이었다. "요새는 아가씨나 총각 다 운전하지만, 그때는 3년 조수를 해야 운전수 한다 했지. 1환짜리 아나? 1환 10개가 10원인데, 환 5개 주면 밥 한 상을 줬었지. 밥 한 끼 지금 5000원인데, 그때하고 비교하면 몇천 배 엄청시리 오른 거지."

할머니 집은 네 칸짜리 기와집 구조를 띠고 있다. 양쪽에 점빵과 창고가 있고, 가운데 2개가 버스 운전기사와 차장이 각각 잠자는 방이었다. 점빵 한편에는 군에서 '(간첩) 신고하는 집'이라는 작은 간판을 달아놓기도 했다. 공중전화도 동네에서 유일하게 있었다. 전화를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전화 요금을 계속 내야 했었다. 그래서 공중전화도 없앤 지 오래다.

"이 집이 6·25 사변 나고 지은 집이라. 막내 젖 먹일 때지. 전기 놓고 있어도 물이 새고 저 뒤편에 비닐 덮어 놓고 안 있나."

   
 

지금은 다소 불편하지만, 할머니와 동고동락한 집이다. 할머니는 17살 때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 의령군 정암다리 너머에 있는 함안 군북면 월촌리가 고향이다. "요즘처럼 어디 선을 보나. 하라면 하는 기고, 가는 건가 싶었지. 근데 허허벌판에서 산중으로 오데. 하하." 아들 넷을 낳았는데, 요즘은 강원도 강릉, 부산, 진해에 흩어져 살고 있다.

천일회사 정류소 이후 우성여객 정류소로 버스가 운행했지만, 타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게 돼 버스는 한동안 끊겼다. 그래서 지금은 경남도에서 보낸 버스가 빈 차라도 하루 서너 번씩 온다고 한다.
울퉁불퉁했던 비포장도로는 아스팔트도로로 말끔해졌다. 인근 동네 주민들은 많이 줄었다. 도시로 떠난 탓이다. 변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할머니의 점빵은 그대로다. 점빵 맞은편 마을회관 옆에 정류장이 있다. 여전히 버스 시간을 외우고 있다.

"버스 나가는 시간이 오전 7시 30분, 낮 12시 30분, 오후 2시 30분, 밤 9시. 여그 골짜기에 300호까지 있었는데, 요새는 100호뿐이라 하드라고. 사람이 줄었으니 버스도 많이 없지."

할머니는 차비, 담뱃값으로도 옛 기억을 더듬었다. "가야까지 150원, 마산은 300원……. 예전에는 버스가 9대 다녔지. 담배는 금잔디 15원, 백양 20원, 아리랑 35원."

   
 

세월이 흘렀다. 할머니의 일상도 많이 달라졌다. 여항산을 오르내리는 이들에게 막걸리 한 잔과 라면 한 그릇 팔던 때도 있었다. 담배는 보름 만에 한 종류당 두 묶음(보루)씩 실려온다. 열다섯 묶음을 받아도 보름 안에 다 못 팔고 재고가 쌓인다. 많은 양이 아니지만, 과자, 음료수, 참치, 식용유, 라면, 세제 등은 한 달에 한 번 마을 사람들 오는 걸음에 부탁해 들여 놓는다. 이 물건들은 6.6㎡(2평 정도) 남짓한 공간에 진열된다. 18명이나 되는 식구를 먹여 살릴 정도로 시집살이가 고됐음에도, 지금도 손수 작은 규모의 논밭에서 쌀과 콩 등을 해먹고 있다.

"4000원짜리 담배는 1년에 한 보루 정도 팔끼라. 윗동네, 아랫동네 가게 다 철거되고, 담배쟁이들은 다 죽었고. 세월이 그렇다. 담배 사러 온 사람들이 할매 죽고 나면 누가 할 낀가 물어 샀는다. 어떤 놈이 할지 나도 모르겠다. 갈 때 이래 얘기한다이. 할매 건강하이소~ 오래오래 계시고~ 그래 봐야 세월한테 못 이긴다. 장사도 대통령도 다 넘어간다. 하하."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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