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균 선생에게서 마산 연극사를 듣다

"마산 연극은 양적으로는 많이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문제가 있어. 연극은 표현주의, 사실주의 등 근본적인 표현 이념을 가지고 가야하는데 요즘 연극들을 보면 그걸 잊은 것 같아. 옛날에 월초(정진업) 선생 하면 '사실주의', 화인(김수돈) 선생 같으면 '사실주의와 표현주의의 병합', 이광래 선생은 신파와 정극을 담은 '중간극' 이런 연극 이념적 흐름이 있었는데, 이게 약해졌어. 그 점이 참 아쉬워."

경남 연극계의 최고 원로이자 통영·마산 연극의 산 증인. 지운(志雲) 한하균(81) 선생이 작금의 마산 연극에 던진 쓴 소리다. 지난 9월 22일 마산연극협회가 <마산연극 50년사> 편찬하고자 한하균 선생의 구술 채록하는 작업 말미에 던진 당부의 말이었다. 이날 선생은 A4용지 12페이지에 달하는 '마산 연극의 역사'라는 제목의 자료를 건넸다. 거기에는 그 시대에 무대에 오른 작품과 이를 만든 인물을 중심으로 192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마산 연극이 시기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 마산 연극에 대한 선생의 깊은 애정의 산물이었다.

   
 

그런 한하균 선생이 연극을 처음 접하게 된 건 1946넌 통영중학교 4학년(당시 학제는 고등학교 없이 중학교 6년제)때였다. 학예제 때 동랑 유치진 선생 작, 김춘수 연출의 <조국>에 조연출로 참여하면서다. 이후 동경예술좌 출신의 김용기 선생이 국어 교사로 오고 그가 연출한 <이차돈의 사>에 처음 배우로 출연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연극 인생을 산다. 그 계기가 동랑 유치진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당시 선조 제사를 모시고자 잠시 통영을 방문한 유치진 선생이 우연찮게 선생이 출연한 연극과 그 연기를 본 것.

"연극이 끝난 후 분장실에 갔는데, 유치진 선생이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런데 그 분이 '자네는 연극해도 되겠어. 연극해!'하며 어깨를 툭 치는 것 아니야. 당시 친구들답지 않게 키가 크고, 훤칠한 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좋게 봐주셨나봐."

통영중학교 4학년을 수료한 선생은 1950년 동국대 국문과 예과(당시 학제는 중학교 4년 졸업 후 대학 예과 진학과 6년 졸업 후 본과 진학 등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에 진학했다.

그러나 입학 20일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다시 고향 통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 동랑 유치진 선생의 도움으로 신극협의회(신협)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당시 신협은 공부를 아주 혹독하게 시켰어. 그 당시 이해랑 선생이 연출가로 있었고, 김동원, 박상익, 최은희, 황정순 씨 등이 배우로 이름을 날렸지. 신협이 들어간 것이 내 일생에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야." 그렇게 선생은 신협 활동을 하면서 1951년부터 59년까지 통영에서 14개 작품을 올렸다.

특히, 당시 통영은 해방 이후임에도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그래서 선생은 연극과 관련된 책들을 일부러 일본에 사는 친지들에게 부탁해 들여오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선생은 당시 유행하던 '사실주의 무대'보다 '표현주의 무대'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게 다른 지역보다 국외 연극 사조와 작품을 많이 접하게 된 선생은 사르트르의 <무덤 없는 사자>와 같은 실존주의 작품을 서울보다 먼저 통영 연극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런 선생은 대학 3학년 때부터 통영고등학교(이때는 학제가 다시 바뀌었다) 교편을 잡았다. 교사가 부족한 모교에서 선생을 부른 것이다.

그 몇 년 후 선생은 인생의 '오점(?)아닌 오점'을 남긴다. 대학 은사이던 무애(无涯) 양주동 박사가 뜻밖에도 "자네 육군사관학교에 (교수로) 가 볼 생각 없나?"며 제안 아닌 제안을 한 것. 그때 선생은 덜컥 "아이고 가고 싶습니다"고 말했단다.

그렇게 양 교수는 육군 사관학교에 추천장을 써주고, 지인을 통해 일을 다 되도록 꾸며 놓았다. 그러나 군 수뇌부의 고위 인사가 자신의 후배를 추천해 선생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선생은 당시를 "내가 그 때 좀 시건방진 데가 있었어. 사람이 절로(자기를) 좀 알고 춤을 춰야 될 낀데, 천지도 모르고 깨춤을 춘 기라"고 회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일로 20일 넘게 결근을 한 선생. 당장 교사직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몰렸지만, 당시 금수현(지휘자 금난새 아버지) 교장의 특별 재가로 교사직을 잇게 됐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금 교장은 그에게 교사직을 잇는 대신 '수업경진대회 경남대회'에 통영 대표로 나갈 것을 명했다.

   
 

그런데 덜컥 1등을 하게 된다. 이어 문교부 주최 '전국 교사 수업경진대회'에 나가게 된 선생은 심사위원들을 보고는 흠칫 놀란다. 당시 5명의 심사위원 가운데 3명이 대학 은사 이었던 것. 선생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당시 대전여고의 진 모 교감보다는 한 수 아래였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대회 결과는 선생의 1등 수상. 선생은 내색은 못했지만, 세 분 은사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 날 밤, 소주 몇 병과 간단한 안주를 사 들고 진 교감의 숙소로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진 교감의 실력을 인정하고, 밤 새워 교육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선생은 당시 진 교감이 "1등을 하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알아보고 예우하는 그 품성이 더 본받을만하다"는 말을 했다고 회상했다. 선생은 이를 계기로 교사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당시 통영과 같은 한지에서 대도시 부산으로의 발령은 '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육청은 선생을 돈 없이도 부산으로 갈 수 있다는 본보기로 삼았다. 그렇게 선생은 1957년 부산공업고등학교로 전근, 소속은 경무청, 근무는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하는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선생에게 고향 통영을 떠나는 일은 좌천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부산에서의 생활은 또다른 재미였다. 선생이 자주 찾던 부산 남포동 입구 선술집 '대학촌'에서의 이야기 보따리는 끊일 틈이 없었다. 시인 천상병, 동시작가 최계락, 화가 하인두는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인연도 '대학촌'에서 이뤄졌다.

천상병 시인과의 일화가 재미있다. "하루는 내가 하인두, 강파을, 이인영 등 시인·화인들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김춘수 선생이야기가 나왔어. 그런데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들리는 거야. '당신이 뭔데 김춘수 선생 얘기를 하느냐' 이거야. 보니 생면부지의 사람이라. 그래서 내가 하인두 보고 내가 저 사람 누고 하니 시인 천상병이다는 거야. 아~ 그래, 화를 내기 이전에 반가움이 먼저 오데. 그래서 당신은 김춘수 선생 추천으로 문예지에 추천을 받았다고 모시는지 몰라도, 내는 중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셨던 은사요. 내가 왜 말을 못한다는 말이요라 했지. 그렇게 상병이하고 친구가 됐어. 그만큼 상병이는 순수했어. 머리는 참 날카롭게 들어가면서도 순수했어."

1960년 초반, 선생은 서울로 향한다. 선생은 서울에서 한국 아동극의 창시자 주평 선생이 만든 아동극단 '새들'과 성인극단 '오월극단'에서 상임연출로 활동했다. 이때 선생이 만든 작품이 <피노키오>, <별주부전>, <숲 속의 공주>, <에스텔>, <아타리아> 등이다. 이 작품을 함께한 배우로 임동진, 안성기, 전영록 등이 있었다. 선생은 네 작품을 명동 국립극장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문화예술인들과 교류는 멈추지 않았다. "틈만 나면 명동극장 앞 선술집 '은성'에서는 합평회를 했어. '은성'은 배우 최불암 씨의 어머니 이 여사가 운영하는 가게였지. 여기서 유치진, 이해랑, 소설가 이봉구, 시인 박인환, 작가 전혜린, 문둥이 시인 한하운 등과 이야기를 나눴지."

특히, 한하운 선생과는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자주 어울렸는데, 한센 병에 대한 편견으로 평소 아무에게도 악수를 않는 시인은 유독 선생하고만 악수를 나눌 정도였단다. "연극인이든 문학인이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장르에 있는 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교류를 해야 자신의 예술적 깊이를 더 할 수 있었어. 내 인생에 그때가 가장 좋은 날이었어."

선생은 1962년부터 마산에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 계기도 기구하다. 1960년대 마산 연극은 월초 정진업 선생과 화인 김수돈 선생이 이끌고 있었다. "하루는 마산의 화인 선생으로부터 서울로 시외 전화가 걸려 왔어. 당시 시외전화가 걸려왔다는 점은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다는거야."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마산으로 간 선생은 졸지에 갈등의 한 가운데 놓였다.

당시 월초와 화인은 1961년 3월 '3·15의거 1주년 기념 예술제전'에 올릴 연극을 두고 의견 충돌을 빚었다. 월초는 "지역의 사건이 제전의 중심인 만큼 지역 사람인 자신이 쓴 작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반면 화인은 "공연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마당에 새 작품을 쓸 시간이 없다. 그리고 월초는 이미 이전에 두 작품을 했지만, 작품성을 망치지 않았느냐"고 맞섰다.

이렇게 서로에게 마음이 상한 두 사람이 극한 대립 중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월초 선생이 돈이 없어 생활이 쪼들리다보니 고료를 받으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선생은 수습책으로 마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이광래 선생을 초빙하는 중재안으로 두 사람의 타협을 이끌어냈다.

결국, 유치진 선생이 쓴 <조국>을 이광래 연출로 강남극장 무대에 올리기로 하고, 사태가 마무리 됐다. 그 후 화인 계열로 분류되던 선생은 마산의 대각원 술집 술 자리에서 월초 선생의 시를 읊으며, 화인과 월초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그 2개월 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마산 연극은 잠시 숨을 죽였다. 그 정적을 깬 것도 선생이었다.

예술제전 후 다시, 서울로 간 선생은 1년 뒤 다시 마산 연극계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1962년 마산에서 시도된 적 없던 표현주의극 <고래>를 3·15회관에 올렸다. 이어 1963년 마산예술인극장 창립을 주도하고, 번역극 <집주인은 아버지>를 공연했다. 이를 계기로 1963년 5월 '마산예술인극장'이 '한국연극협회 마산지부'로 발전·개편되고, 선생은 68년까지 부지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또 68년에는 지부장을 맡아 12년 간 마산 연극을 이끌었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1978년 연극 <한강은 흐른다>를 마치고 난 후 중풍(뇌졸중)을 맞은 것. 이로써 연극 일선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선생은 몸도 추스르고, 일생을 되돌아 볼 겸 고성으로 향한다. 그리고 회복기를 거쳐 고성종합고등학교 교장직을 역임 한 후 교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러나 선생의 연극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경남 연극사' 정리에 나선 것이다.

이후 통영시청이 발행한 <통영연극사>, 마산시청에서 발행한 <마산연극사>를 집필했다. 이어 지난 2001년 <경남도민일보> '오동동야화' 연재를 통해 인물 중심의 경남연극사 재정리 도중 2차 중풍을 맞았다. 당시 의사는 앞으로 정신노동은 가급적 금할 것을 주문했다. 이를 들은 선생의 부인은 그간 선생이 모아놓은 연극 관련 기록물 일체를 불태워 버렸단다. 그렇게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연극에게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다.

"사람살이에 있어 어제 없이 오늘이 없고, 오늘이 없이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선생의 신조다. 때문에 선생은 지금도 연극 후배들을 만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마냥 즐겁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어제는 모르고, 오늘, 내일만 쫓고 있어 안타깝다. 그 때문일까? 지난번에 이어 다시 한 번 경남 연극계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선배들 때와 달리 요즘은 말이야. 무대에 몇 번 섰다고, 무조건 연출가가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건 아니야. 연출 작업에 대한 혹독한 공부와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된다고. 그리고 흥행보다도 작품에 대한 연구, 표현 방법 등에 대한 생각과 판단을 잘 내리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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