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거창이라 하면 수승대와 월성계곡 정도만 떠올린다. 그리고 등산을 즐기는 이라면 덕유·기백·금원·감악·우두 같은 산악 따위가 죽 늘어선다. 사실 거창만큼 산 좋고 물 좋고 골짜기 좋은 데는 쉽게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사람들은 '황강'이라 하면 합천만 생각하지만 그것은 합천댐과 그 아래일 따름이다. 합천 북서쪽에서 황강은 거창의 몫이다. 거창의 황강은 아직 어린 아이 같다. 그렇지만 그것은 산과 산 사이에 골짜기를 열면서 물줄기를 부풀려 나간다.

다른 좋은 데 다 뒤로 하고 주상면 연교리 임실마을 성황단에서 도평리 봉황대까지 3km정도를 골라잡았다. 황강이 지나가며 펼쳐놓은 골짜기와 들판을 가을 느낌 속에서 거닐 수 있는 길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농로로 쓰이는 콘크리트길과 둑길과 아스팔트길이 어우러져 시골 맛이 살아 있었고, 들판을 가로세로 질러다니는 아기자기함이 있었으며 황강과 이를 따라 펼쳐지는 산들 풍경도 나쁘지 않았다.

길을 나선 그 날 오후는 햇살이 아주 고왔다. 아직은 단풍이 충분히 들었다고는 하기 어려웠지만 가을은 곳곳에서 제 맛을 내어뿜고 있었다. 들판은 노란색으로 밝게 빛나면서 풍요로웠다. 들판에 나와 일하는 이들은 이런 들판의 풍요로움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조역이었다.

   
 

거창읍 김천리 군내버스 터미널에서 1시 40분 버스를 타고 20분만에 임실마을 앞에 내렸다. 마을 들머리에 들어서려는데 그 너머에 우람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옆으로 위로 자란 품이 엄청나 마흔 걸음 넘게 떨어져야 카메라에 전체 모습을 담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을의 역사가 만만하지 않다고 일러주는 셈이다.

임실 마을의 녹록지 않은 역사를 보여주는 자취는 또 있다. 성황단이다. 알려진대로 성황단은 마을 들머리나 고개마루에 들어서 수호신 구실을 한다. 커다란 종을 엎어놓은 형태로 크고작은 돌들을 쌓아 이뤄졌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지 싶었다. 층층이 놓인 돌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둘러싼 소나무 세 그루 또한 이리저리 휘어지고 솟구쳐 올랐다. 다른 고장에 가면 팽나무를 성황나무로 삼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 거창은 좀 다른 모양이다. 그 아래 길가에서는 노부부가 허리를 구부린 채로 나락을 널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오래 노닐다 마을을 오른편에 둔 채 성황단을 끼고 돌았다. 길가에는 메밀밭과 콩밭과 사과밭 따위가 차례차례 펼쳐진다. 해는 이미 기울어 서산 너머에서 햇살을 보낸다. 그늘진 산과 햇살을 받은 들판이 색다르게 어울리고 그 경계선은 환하게 부서진다. 조금 더 가면 개울이 나온다. 황강이다.

개울을 건너니 영월정(詠月亭)이 나왔다. 개울이 절벽과 만나는 데에 자리를 잡았다. 절벽에는 노랗거나 붉게 물들기 시작한 잎들을 매단 나무들이 우거졌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기에 달(月)이 뜨는 저녁 무렵 그 풍경을 읊기(詠)에는 안성마춤이겠다.

개울을 이루는 물은 꽤나 쾌활해서 흐르는 소리가 가벼웠다. 맞은편 기슭에는 높게 자란 플라타너스가 한 그루 우뚝하다. 푸른 빛을 떨치면서 연둣빛으로 잎이 바뀌는 형상인데, 그늘이 아주 넉넉하다. 이런 때문인지 위쪽 도로를 지나가던 자동차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들어와서는 그늘에 앉아 잠깐 쉬었다 나가는 것이다.

남녀 한 명씩을 태운 고급 자동차가 떠난 다음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에 자리를 깔고 장만해 간 맥주를 마셨다. 단감과 오이를 깎고 황태포를 찢었다. 나무 둥치에 기대어 물소리를 들으며 그늘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때 이른 단풍과 들판에 쏟아지는 햇살을 눈에 담았다.

이제는 둑길이다. 둑길은 1089번 지방도를 만나 끊어진다. 아스팔트길로 잠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1975년 만들어졌다는 콘크리트 황강교를 건너 오른편 제방을 계속 탄다. 들판은 이제 누렇게 익지 않은 데가 드물다.

   
 

사람들은 농로를 따라 바닥에 자리를 깔고 거둔 곡물들을 말린다. 보통은 한두 사람이 일하는데 여기는 다섯이나 됐다.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지나려는데 젊은 축에 드는 아저씨 한 분이 웃으며 말을 건넨다. "사진 안 찍능교? 하나 찍어 주소." 사진을 찍고는 몇 마디 고맙게 말을 주고받다가 돌아섰다. 그이들은 말린 나락을 자루에 담고 있었다.

끄트머리 봉황교에서 오른쪽 비탈을 따라 걸어 조양정(朝陽亭)에 올랐다. 여기 올라서니 왼편과 오른편 흐르는 물줄기와 이를 둘러싼 들판과 산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지없이 풍성하고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이다.

황강은 조양정 앞을 지나면서 왼쪽 옆구리로 남산천 시냇물을 받아들인 다음 읍내로흘러든다. 황강과 남산천 두 물이 합해지면서 여기 땅은 셋으로 나뉜다. 셋으로 나뉜 땅에는 저마다 봉우리가 하나씩 솟았다. 사람들은 이를 '삼산이수(三山二水)'라 하면서 풍광이 괜찮은 곳으로 꼽는 모양이다. 내려와 조금 거닐고 있으려니 바로 버스가 왔다. 웅양면에서 나오는 버스였다. 1050원으로 삯을 치르고 시각을 확인하니 오후 4시 51분이었다.

거창읍에서 임실 마을 가는 군내 버스는 오전 6시 30분 7시 7시 40분 8시 9시 5분 10시 20분 11시 30분 오후 12시 50분 1시 40분 3시 20분 4시 10분 4시 50분 5시 40분 6시 20분 7시 30분 이렇게 있어 적은 편이 아니다. 도평리 봉황대 앞에서 탈 수 있는 버스는 이보다도 많다. 도평리 봉황대 앞은 임실마을 가려면 타야 하는 고제면 오가는 버스뿐만 아니라 웅양면이나 가북면 오가는 다른 노선 버스들도 모두 지나다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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