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원 요즘 뭐합니까]민주노동당 손석형 도의원

경남도의회 정문을 들어서서 현관을 지나 좀 더 깊숙한 곳까지 발걸음을 옮기면 '민주개혁연대' 사무실이 있다. 이곳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본회의와 상임위 회의가 열리지 않는 날에도 민원인들과 공무원들로 넘친다. 흡사 은행 대기표를 끊고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민주개혁연대 사무실 바깥 소파에 앉아 있는 이들을 자주 목격할 수도 있다.

민원인들은 생활 현장에서 드러나는 각종 불편을 호소하기 위함이고, 공무원들은 민주개혁연대 의원들과 현안 업무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민주노동당, 민주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의원들로 구성된 민주개혁연대가 도의회를 도민들 곁으로 더 밀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곳 민주개혁연대 사무실에는 여러 도의원들이 찾는 곳이긴 하지만 특히 손석형(민주노동당·창원6) 공동대표가 대부분 자리를 지킨다. 민원인을 만나 크고 작은 행정의 부조리를 경청하는가 하면, 경남도 집행부들과 함께 해결 방안을 찾느라 항상 분주하다.

해결되는 일도 있겠지만 도의원의 권한에 한계가 있어 그렇지 않은 사안이 많다. 부담스러울 수 있다. 찾아오는 민원인들에게 실망만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 의원은 "민원인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공무원들과 함께 즉석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현장에 나가 겸손한 자세로 주민들의 생활 속에서 들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니 다들 좋아하신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김

손석형 의원은 민주노동당에서 유일한 재선 도의원이다. 지난 8대 도의회 때는 남강댐 부산물 공급 논란에 불을 지피며 도민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한편 김태호 전 지사를 궁지에 몰아넣으며 공격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야권 공동 전선을 통해 무소속 도지사가 도정을 책임지게 되면서 '야당 도의원들이 예전보다 도정에 대한 공격이 무뎌졌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손석형 의원은 "(민선5기 출범) 초창기에는 혼란스러웠다"고 솔직하게 평가했다. "지난 8대 도의회 때는 주민 입장에서 도정을 견제, 감시하고 주민들의 생각을 반영시키면 됐다. 모든 열정을 생활 정치에 쏟아부었고, 집행부를 견제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야권 공공정부가 출범하면서는 견제와 감시는 당연히 해야 했고 정책 생산을 위해 타협과 협력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운신의 폭은 좁아졌고, 도정에 대한 책임 더욱 넓어졌다."

그러나 도의회에는 여전히 한나라당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개원 초창기 민주개혁연대는 원 구성을 둘러싸고 한나라당 의원들과 대립하며 똘똘 뭉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개혁연대의 단합된 힘이 발휘되는 사례가 줄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양한 정당과 다양한 철학이 모이다 보니 하나의 정책적 결론을 내는 것은 어렵다. 또한 각 지역구의 특성을 하나로 묶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명확한 목표로 결속하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의 힘이고 무기다. 한나라당이 다수고 우리는 소수 아닌가. 지역구 특성과 각 정당의 철학을 한자리에 모으는 건 힘들어도 소수로서 견지해야 하는 개혁 진보의 원칙은 이심전심으로 공유하고 있다."

손 의원의 이같은 진단은 자연스럽게 진보·개혁 대통합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정치가 변화가 있다. 안철수 신드롬과 박원순 바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는 신드롬과 바람이 아니다. 시민들이 정치의 가치를 새롭게 변화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진보진영 역시 혁신과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국민이, 시민이 원하는 바보다 뒤떨어진 행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손석형 의원은 한국 사회에서 민주노조 건설 바람이 휘몰아칠 때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창녕군 남지읍 출신인 손 의원은 자수성가한 조부와 어려운 이들에게 베풀는 일에만 몰두했던 부친을 모시며 자랐다. 손 의원은 "할아버지는 돈 모으실 줄은 알았지 쓸 줄 몰랐고, 반면 아버지는 쓸줄 알았지 벌 줄을 몰랐다"고 회상했다.

창녕공고를 졸업하고 85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 입사했다.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피어오를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손 의원은 '결혼을 하기 위해 입사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결혼을 약속했던 이의 배는 불러오는데, 장인 장모는 직장없는 사위를 원치 않았던 상황이었다.

결혼만 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해볼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손 의원은 노동운동 현장에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게 된다. 노동조합의 방향성을 놓고 노동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던 즈음 손 의원은 우연한 기회에 수많은 동료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3분 연설'이었다. 이 자리에서 손 의원은 '노조는 조합원의, 조합원에 의한, 조합을 위한 노조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큰 호응을 받았다. 이후 집회가 열릴 때면 단골 연사로 단상에 오르게 된다.

   
/김구연 기자

회사로부터는 요주의 인물로 찍혔고, 동료들과 강제 격리당하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면 또 탈출(?)을 감행해 노동자들 앞에 섰고, "가자 본관으로!"를 외치며 선동 연설을 이어갔다. 그리고 한국중공업 노동운동사에 길이 남을 87년 정문 봉쇄 투쟁으로 이어졌다.

손 의원은 이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초대 위원장이 됐다. 그리고 민주노총 경남본부 초대 본부장까지 역임하며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창원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석패했으며, 국회의원 출마를 계획 했으나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손 의원은 항상 개척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손 의원은 "누군가는 희생하면서 개척해나가야 한다. 도전정신으로 치고 나가야지 '기회가 오면 하겠다'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민주노조 건설과 지역 노조 조직화, 그리고 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시작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길에서 항상 개척자의 위치에 서 있었던 손석형 의원. 그가 도의회에서 펼치는 생활정치가 창원 시민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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