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간판은 도시의 미관을 망치는 주범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간판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아름다운 거리 조성', '간판시범 거리 조성' 등의 명목으로 간판정비사업이 한창이다.

올 한해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와 각 지자체가 마련한 관련 예산 규모는 대략 220억 원대에 이른다. 경상남도 역시 총 9억 6000만 원의 예산을 확보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예산이 넉넉하지 못한 지자체는 추경예산이라도 확보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운다.

공공디자인(public design)이란 국가나 지자체 및 공공단체 등이 설치·관리하는 건축물, 구조물, 서식, 증명서 등을 위한 디자인을 의미한다. 공공디자인은 단순히 도시 미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국가의 문화적 수준이고 국민의 심미적 감성의 척도가 된다. 따라서 사적영역인 간판까지 공공디자인의 범위를 확대하고, 이를 위한 지원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간판정비사업을 마친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의 점포들. /경남도민일보DB

본격적인 간판정비사업이 시작된 지 6년이 흘렀다. 3~4년 전 몇몇 시범거리에 한정되었을 때만해도 그런 대로 보기 좋았다. 인간의 욕망처럼 양보를 모르던 간판의 크기가 줄어들고, 그만큼 여백이 생기니 도심이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딱 그 순간뿐이었다. 이제 슬슬 싫증을 넘어 짜증이 난다. 어디나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서울 을지로나 부산 서면이나 마산 창동이 규모만 다를 뿐 같은 풍경이다. 마치 놀이공원의 상점가나 대형 쇼핑몰의 푸드코트를 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소재가 동일하고, 디자인이 천편일률적이고, 글씨체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말끔히 정비'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조성된 거리의 역사성이나 개성 따위는 애초부터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예산이 확보된 당해 연도에 끝내야 하기 때문에 사업은 짧으면 몇 개월, 길어야 1년을 넘지 않는다. 디자인 이전에 영문자의 대·소문자를 놓고 수 없이 시뮬레이션을하고, 도시의 정체성에 맞는 가이드라인을 구축하는 데만 몇 년씩 걸렸다는 외국의 사례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모짜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트라이데 거리'가 있다. 오래된 상점과 레스토랑이 몰려 있는 이 거리가 유명한 것은 간판 때문이다. 문맹률이 높았던 중세에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물건을 살 수 있도록 철을 세공해 글 대신 그림을 넣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공 기술은 정교해졌고 디자인은 세련되어 갔다. 이제 게트라이데 거리를 걷는 관광객들은 간판을 올려다 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다. 세계적인 기업인 맥도날드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덕분에 잘츠부르크의 맥도날드는 전 세계 수만 개의 매장 중에서 가장 예술적인 간판을 가지게 되었다.

공공디자인은 고민하는 시간만큼 생명력이 길어진다. 지금까지 수십 년을 참아 왔으니 앞으로 몇 년 더 참는 것은 일도 아니다. 게트라이데 거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몇 년 후 어느 도시의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똑같으면 어떻겠는가? 지금 같은 방식과 속도라면 그런 끔찍한 일은 예정된 미래라는 불길함을 떨칠 수가 없다.

/박상현(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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