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오동동 이야기] 엄마 등에 업혀 목격한 3·15의거 현장

지난해 가을. 하루 하루 뜻없이 지내는 것이 아쉬워 뭔가 좀 배워 볼까 생각하다 우연찮은 기회로 심리상담사 교육을 받게 됐다.

심리상담교육을 받던 어느 날 '자신의 어린시절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가'를 주제로 선생님과 수강생 모두 나만이 가진 어린 시절 기억을 서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콤플렉스나 성격이 형성되는 근본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나 어떤 사건이 원인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내 어린시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3·15 의거탑과 추산동 신작로다. 아버지가 마산-부산 간 시외버스를 운전하셔서 추산동 시외버스 주차장 근처에 살았다. 이 때문에 3·15의거탑은 어린 시절 나에게 친구들이랑 소꿉놀이를 하거나 숨바꼭질 하고 놀던 장소였고, 추산동 신작로는 동네 친구들과 다방구 놀이나 사방치기를 하며 놀던 놀이터였다.

아버지 후배가 3·15회관에서 일하셔서 가끔씩 언니랑 3·15회관 앞에서 놀다가 아저씨가 보이면 영화 관람을 하기도 하고, 그럴 땐 엄마가 극장으로 우리를 찾으러 오기도 했다. 엄마를 따라 나오며 못다 본 영화가 엄청 아쉬웠다.

국립 3.15민주묘지를 참배 및 분향한 후 방명록을 적고 있는 있는 필자. /안소휘

시외버스 주차장 근처 공터에서는 서커스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가끔 돈을 내고 제대로 볼 때도 있었지만 어떨 때는 오빠를 따라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몰래 보다가 쫓겨나오기도 했다.

서커스에서 하는 공중 그네타기나, 남편을 기다리다가 목이 늘어났다는 장구치는 미녀(그때 나는 목이 늘어나는 게 진짜인줄 알았고 누군가를 정말 절실하게 기다리면 목이 늘어나는 줄 알았다), 누워서 항아리 돌리기, 말이나 곰이 부리는 재주도 재미있었다.

그 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3·15의거가 4·19민주혁명의 초석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3·15의거탑 동상에 교복을 입은 남학생, 여학생이 있었지만 그들이 왜 거기에 같이 주먹을 불끈 쥐고 함성을 외치는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1960년 3·15의거 당시 4살이었던 나는 내 머리 속에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께 상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들은 이야기로는 언니들은 7살 쌍둥이었는데 아침에 나간 이후 몇 시간 째 들어오지 않았단다. 어머니는 언니들을 찾으러 시내를 돌아다니시다가 혹시 다쳐서 병원에 갔는가 하고 시내 병원을 찾아다니기도 하셨다.

당시 떠오르는 기억으로 병원이 가정집 마당처럼 생겼었다. 엄마가 나를 업고 들어갔는데(그때 병원은 단독주택으로 된 병원이 많았다) 부상을 당해 피묻은 교복과, 붕대감은 학생들이 많이 있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지난 2010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 운구 행렬.

그러다 어머니는 마산 도립병원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인파에 떠밀리다가 두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퉁퉁 불은 김주열 학생 주검을 보게 돼 기절 할 듯이 놀랐다고 하셨다.

어떻게 사람 눈에다가 그런 걸 박을 수 있을까? 어린 내 생각엔 아마도 엄마가 우리에게 좀 부풀려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번 마산 여행에서 3·15 민주묘지 참배를 하며 증언을 들으니 그 말씀이 사실인 것 같다. 반면, 안타깝게도 당시 아버지는 버스를 강탈한 시위 군중에 초죽음이 되도록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겨우 며칠 만에 돌아오셨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는 아버지를 괴롭힌 시위 군중들이 참 나쁜 사람들 이라고 생각했었다. 지난 5월 11일 창동노스탤지어 여행에 참여하면서 제일 먼저 구암동 국립 3·15민주묘지 참배로 여행의 첫 일정으로 택한 것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민주 영령들을 참배하며 참 많이 미안했다. 나의 철없었음을 부끄러워하면서…….

/정상희(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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