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주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 창원시 팔용동 판문점

쇠고기 석쇠불고기. 이거 맛있다. 찬바람 부는 어느 날 서승주는 창원 팔용동에 이 석쇠불고기를 먹으러 갔다. 그 이름난 임진각은 아니다. 바로 판.문.점.이다. 지난날 창원서부경찰서 앞 북동시장에 있던 그 판문점이다. 손모례 할머니라고 계신다. 이분이 1960년대 중반 북동시장 떡방앗간 맞은편에 국밥집을 차리고, 나중에 ‘판문젼’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 조그만 식당에서 석쇠불고기가 처음 시작됐다. 여기서 일했던 이들이 나중에 독립해 창원시내 곳곳에 석쇠불고기 식당을 차렸다.판문젼은 나중에 판문점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명세를 이어갔다. 그러던 판문점이 어떻게 임진각의 텃새를 무릅쓰고 팔용동으로 옮기게 됐을까.

사위가 물려받은 원조 석쇠불고기

지금 팔용동 판문점을 운영하는 이는 할머니의 둘째딸인 손효양(44) 씨와 사위인 한유성(48) 씨다. 편의상 손효양은 효양으로 한유성은 유성으로 구주모 사장은 주모, 임봉규 실장은 봉규, 고동우 차장은 동우로 표기한다.

   
사진 이서후

주완 - 한 사장이 경남매일 시절에 기자 생활을 했어.
유성 - 아이고 옛날이야기를.
주완 - 제일 처음에 이 집 창업한 할매하고 어떤 관계지?
유성 - 우리 장모님이요.
주완 - 아, 니가 사위가?
주완 - 이거는 전에 거기 있었잖아. 무슨 동이고? 도계동에 있었잖아.
유성 - 도계동에 남의 집에서 장사하다가 평생 이 장사를 해야 하니까 작년에 여기 사서 왔지.
주완 - 그때는 시장 안에 있었잖아.
유성 - 장모 시절에는 북동시장 안에 있었지.
주완 - 장모님은 살아계시나.
유성 - 올해 여든넷 되셨는데 병원에 계신다. 당뇨 때문에.
동우 - 그때랑 메뉴가 변했나요?
유성 - 전골, 비빔밥, 냉면이 늘었죠. 불고기하고 국밥만 하다가.
주완 - 원래 이 집이 석쇠불고기하고 소 국밥, 이 기 전공이다.
동우 - 언양 불고기하고 스타일이 비슷하네요.
유성 - 그거하고는 다를 깁니더.
주완 - 석쇠불고기는 어떻게 하는 거야 다져서 하는 거야?
유성 - 목심 같은 양질의 고기를 찧어서 13가지 양념을 곁들여 버무립니다. 석쇠에다 올려놓고, 나는 빨리하려고 틀을 만들어서 굽는데요. 치댄 상태에서 그대로 석쇠에 올리면 언양 불고기랑 비슷하겠네요.
서후 - 일부러 틀을 만드시네요?
한성 - 예. 불이 600도까지 올라가거든요, 잘못해서 구멍이 나면 새까맣게 탈 수도 있고 그래서 그런 거죠.
주완 - 원래는 간판이 없이 시작한 거잖아?
한성 - 원래는 간판이 없었는데 오는 손님들이 간판을 만들어 준 게 ‘판문젼’이었어요. 사실은 판문점이 맞지.
주완 - 그게 무슨 뜻이었지?
유성 -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그리 부른 거라.
주완 - 판문젼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뜻이 있나?
유성 - 아니, 그런 건 없고. 사람들이 판문점을 잘못 들은 데서 그리됐지. 그리고 판문점에 일하던 분이 나와서 판문점이란 이름을 못 쓰니까 임진각으로 한 거야. 얼마 전에 보니까 통일각이란 곳도 생겼대.
주완 - 이게 재밌는 거야. 원조가 판문점이니까 거기서 배우고 나온 사람이 이름을 임진각으로 했고 또 비슷한 음식점을 만들면서 통일각으로 한 거지.

정확하게 알아보니 판문점이란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그 옛날 간판도 없이 장사하던 시절. 북동시장에 장이 서면, 이 식당에 오면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잘 만나게 됐다. 그래서 당시 이산가족이 만나고 하면서 판문점이란 이름이 자주 나오니까 이 식당도 판문점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못 보던 사람을 이 식당에 오면 다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근데 사람들이 판문점을 잘못 듣고 판문젼이라고 했고, 한동안 판문젼이 식당 상호로 쓰였다. 그러다가 판문점으로 바로 잡고 지금까지 이어진다.

봉규 - 저는 아버지하고 옛날에 자주 왔습니다. 연탄불에다 할 때.
유성 - 실장님 연배 되는 분들이 거의 다 아버지 손잡고 왔습니다. 아버지 월급날에. 그 당시 이 음식을 드실 정도면 잘 사는 축에 들었는데요.
주완 - 잘 사는 집 맞아. 토호세력의 아들이지. 그 당시에 소고기를 먹는다는 거는 굉장히 부르주아 집안이란 거야.
주모 -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소고기는 국밥으로 먹는 줄 알았어. 수육이나 소금구이로 먹는 거는 상상도 못했어. 오로지 국밥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어.
주완 - 국밥에도 그 당시는 소고기를 썰어 넣을 때 이렇게 각을 줘서 조그마하게 집어넣었지. 보이다 안 한다.
유성 - (임봉규 실장이 깨끗이 비운 국밥 그릇을 들어 보이며) 식당 주인이 제일 기분 좋은 기 이거 아입니까 다른 거 필요 없습니더.
주완 -야, 식당 주인이 제일 좋아하는 게 이렇게 깨끗이 비우는 거란다.
주모 -(실장을 가리키며) 이 사람 입 짧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내가 깜짝 놀랐다.
유성 -내가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억지로 드시는 건가 아닌가.
서후 - 근데 왜 임진각이 있는 여기로 오셨어요?
유성 - 한번 붙어볼라고.
서후 - 아, 진검승부!
유성 - 20년 이상 하고 일 년하고 차이가 엄청난 거거든요. 이사한 지 일 년 밖에 안됐는데도. 그런데 전문가들은 우리 집을 평가를 해주더라 이 말이죠.
서후 - 아, 창원 명품음식으로요?
유성 - 예, 근데 선정을 하고 아직 발표를 안 해요.

창원시는 올해 3월 명품음식점 100곳을 선정해 전국적으로 홍보하고 관광 상품으로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장동석 경남대학교 관광학부 교수를 중심으로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맛, 위생, 서비스 등을 평가해 선정할 계획이었다. 맛도 좋아야 하지만 지역성향, 대표성도 있어야 한다. 꼭 이것이 아니어도 판문점은 이미 지난 2009년 창원시 대표 음식점으로 선정돼 창원시장 표창장도 받았다. 2005년에는 경남 향품 음식 출품업소 인증도 받았다.

쫄딱 망함, 다시 일어섬.

   
사진 이서후

승환 - 사장님 사모님 두 분이 언제 처음 만나셨습니까?
유성 - 길 가다 만났어. 군대제대하고 당구 내기를 했지. 진 사람이 길가는 아가씨 꼬셔서 커피를 얻어 마시는 걸로 하자 했는데, 친구가 졌어. 그때 창동 코아 앞으로 하얀 블라우스에 국방무늬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더라. 저 아가씨로 하자! 그렇게 가서 불러 세웠는데 친구가 말을 못하는 기라. 그래서 내가 이런 사정으로 당구 내기를 해서 이렇게 됐다. 커피 사주겠느냐 그러니까 그러겠다 그래.
효양 - 그러고는 의형제 식으로 오빠, 동생 하기로 했지. 오빠 생겼다고 어머니한테 소개도 하고. 진짜 오빠였어요. 4년 동안 실제로는 4번인가 만나고, 전화 통화하고 명절 때나 인사하러 다니는 정도였지.
승환 - 그럼 지금 두 분이 결혼 몇 년 차입니까?
효양 - 22년 차.
승환 - 큰아들이 올해 몇 살입니까?
효양 - 초등학교 5학년.
서후 - 어, 22년 같이 사셨는데 왜 큰아들이 5학년입니까?
효양 - 아기가 안 생겨서 큰아이를 10년 만에 낳았어. 작은 애는 그 뒤 5년 뒤에 낳았고.
승환 - 작은 애는 또 아들이고요? 형제네요.
효양 - 아기가 한참 늦어요. 지금 친구들은 아이들이 대학 들어가고 그러는데.
서후 - 근데 식당 하시는 데 뭐 어때요.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효양 - 빨리 키워야 데리고 다니면서 술도 좀 먹고 그래야지.
서후 - 같이 술 먹을라고!
효양 - 술에 취하면 내를 업고 집에 가고 그럴 건데 아가 아직 어리갖고.

아닌 게 아니라, 이 부부 매일 술을 마신다. 자신들 말로는 365일 중에서 350일을 마신다고 한다. 그래서 부부 싸움이 거의 없단다. 싸워도 5분을 안 넘기는데, 그게 다 술을 자주 마시며 대화를 많이 해서 그렇다는 거다. 그런데 이 부부도 식당을 하면서 쫄딱 망한 시절이 있었다.

승환 - 사모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세요?
효양 - 위에 언니하고 저하고 둘밖에 없어요. 언니가 저보다 나이가 15살이나 많아요. 언니는 대구에 계시는데 뭐 경제력이 있고 애들이 다 잘 돼 있고. 그러니 일부러 식당을 할 필요가 없죠.
서후 - 그러면 둘째 딸에게 물려준 거네. 두 분이 장사를 어떻게 시작한 겁니까?
유성 - 나는 이전 경남매일 있던 선배들하고 출판사를 했는데, 경남에 두 번째로 생긴 출판사였지. 그게 망해서 돈을 엄청나게 날렸어요. 그랬는데 아내가 당신 뭐 할 거냐 그래서 장모님 하던 거해볼까 하고 이리됐고. 장모님이 비법을 내 한테 가르쳐 주더라고. 처음에 사람들이 내보고 3개월 못 넘긴다 그랬어. 니는 성질이 더러워서 안 된다 그랬어. 장사가 잘되니까 프렌차이즈 사업을 시작했지. 그런데 운이 안 따르고 경영철학이 잘못돼서 그게 잘 안됐어요. 그리 망해서 2008년 한해는 정말 힘들게 살았어.
승환 - 그니까 한참 잘 됐을 때 조금 더 잘해보자 해서 프렌차이즈 하다 실패한 거네요. 보통 거기서 주저앉으면 회복 못 하는 사례가 열에 여덟, 아홉이거든요. 장사 잘 안되던 사람이 안 되다가, 안 되다가 결국 일어서는 경우는 있는데, 잘 되다가 안 되면 완전히 무너져 버릴 수 있잖아요. 거기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인가 궁금한데요.
유성 - 장모님의 힘이었습니다. 장모님의 레떼르(명성)였습니다. 판문점이라는 레떼르지요. 일반 음식점 같으면 영원히 사라졌을 겁니다. 우리 사는 집을 경매로 다 날리고 250만 원 갖고 다시 시작했어요.
효양 -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와 주니까. 지금도 서울에서도 찾아오고. 옛날 북동시장에서 하던 그 집이 맞느냐고 물어보고 찾아오시고 그래요.

   
사진 이서후 

팔용동 건물을 사들이는 데도 운이 따랐다. 처음에 건물을 임대할 생각으로 보러 왔더니 건물 주인이 임진각에 고기를 대주는 사람이었다. 다른 음식을 몰라도 절대 석쇠불고깃집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차라리 건물을 아예 사버렸다. 사려고 마음을 먹으니 주위에서 금전적으로 도와주는 이들이 많았다.
승환 - 그래도 힘드셨을 텐데 두 분은 어떠셨어요?
효양 - 애들이 없었으면 무너졌을 거만은. 눈이 새카만 아가 둘이 보고 있는데 어떻게 주저앉아요?
승환 - 그리고 두 분 중에 한 분이라도 못 하겠다 해버리면.
효양 - 그러면 완전 절단 나는 거지.
유성 - 어려울 때 큰놈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책가방 메고 학교에 가는 길에, 아빠가 열심히 살라 하다가 무너졌는데 잘못 되가지고 이런 데, 우리 살던 집보다 더 큰 걸 사주끼고, 그럴 테니 신경 쓰지 마라. 열심히 살 수 있나? 그랬더니 딱 하는 말이, 아빠는 잘할 수 있잖아, 그러고는 돌아서는데 그걸 딱 쳐다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 그래서 2년 만에 아파트 두 개 사고 3년 만에 이 건물을 사고 그랬어요. 지금 아들내미는 아빠가 최고라고 생각하지.
효양 - 이 건물을 처음 사서 실내장식을 하는데 막 수리를 하면 재가 날리고 먼지가 날리는데 큰애 지가 막 쓸더라고. 쓸지 마라, 쓸어도 또 더러워진다. 그랬더니 엄마, 들어오는 문이 깨끗해야 한다. 그러더라고.
서후 - 아니,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승환 - 뭐야, 애가 아니잖아!
효양 - 큰아들이 좀 생각이 영감이라요.
유성 - 요즘은 손님이 오면 내가 큰아들한테 일을 시킵니다. 니 적성이 맞으면 하라고. 글고 진짜 내 자식 중 한 사람이 받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늙어서 한구석에 담배를 피우고 앉아 있으면 저 영감 아직도 살아있는 갑다, 그라면서 야, 저 집은 진짜 오래된 집이다. 저 영감쟁이 젊을 때부터 했는데 아들내미가 지금 한단다, 그럴 거야. 그라고 담배 피우고 앉아 있으면 우리 아들은 밥은 안 먹고 살겠나 싶지.

한유성, 송효양 부부는 이제 팔용동 건물에서 평생 장사를 할 생각이란다. 혹시나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팔용동 근처에서 유달리 사이가 좋은 중년 남녀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본다면 열에 여덟은 이들 부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