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쌍용차 동지들에게 희망 되고 싶다”

창원 가음정시장 주차장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돌면 ‘용지마당’이라는 작은 간판이 보인다. 고깃집이라고 찾아갔는데 간판 아래 있어야 할 식당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다가가서 보니 좁은 입구가 따로 있다. 그곳으로 들어서면 시장 골목 일부를 낀 식당이 보인다. 20명 정도 앉으면 꽉 들어찰 규모다. 평범하다 못해 소박한 식당, 그러나 2009년 쌍용차 창원엔진공장 해직자 출신인 김월조 씨에게는 새로운 삶을 찾게 한 소중한 공간이다.

“1996년에 입사했으니 13년째였지요. 상하이 자본이 빠지면서 회사에서 정리해고 방침을 세웠고…. 타협점이 전혀 없었어요. 우리는 해고만 하지 말자며 온갖 자구책을 내놓았는데….”

창원 가음정시장 ‘용지마당’ 김월조 사장./김구연 기자
김월조 씨는 당시 현장 대의원이었다. 회사에서 정리해고 방침을 정하자마자 당장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나를 원하지 않는 회사에서 일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동료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결국, 동료와 함께 김월조 씨도 경기도 평택을 향했다. 77일 동안 파업 현장을 끝까지 지켰다.

77일 파업 현장,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

“일단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힘들었어요. 걱정도 많았고…. 집에서는 계속 오라고 했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었지요.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진 싸움이었지만, 파업 자체는 아직도 정당하다고 생각해요.”

경찰과 대치, 부정적인 여론,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인도에 버려진 것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바깥과 교류가 끊기는 상황, 단전·단수 조치까지 이어지자 ‘섬’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배설물을 치우지 못했고, 결국 에어컨 냉각기 물을 받아서 식수로 쓸 상황이었어요. 다시는 돌이키기 싫은 기억이에요.”

결과적 패배로 끝난 쌍용차 파업, 당시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90여 명이 경찰서로 끌려간다. 그때만 해도 김월조 씨는 지부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 정도만 구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 올가미가 대의원인 자신까지 옭아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집에 곧 들어간다고 전화했어요. 그런데 그날 수원 구치소로 넘어갔지요. 가족에게 아무 연락도 못 하고요. 최종적으로 50명 정도가 구치소에 들어갔는데 당시 지부장은 아직도 실형을 살고 있습니다.”

김월조 씨는 한 달 동안 경기도 수원 구치소에 갇히고 나서 풀려나온다. 그리고 바로 회사에 희망퇴직, 아니 절망퇴직을 신청한다.
“서로 형님·동생 하던 사람들이 갈라졌지요. 더는 회사에 다니기 싫었어요.”

창원 가음정시장 ‘용지마당’ 김월조 사장./김구연 기자

김월조 씨는 한동안 트라우마(trauma·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다. 정신과 전문 병원을 찾아 상담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는 느끼지 못했지만, 몸은 77일 동안 파업 기억을 억지로 지우려 하고 있었다.

“수없이 불렀던 민중가요가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누가 부르면 그런 노래가 있었다 정도는 떠올리지만, 가사·음정을 까맣게 잊었어요. 이상한 일이지요.”

몸과 마음을 헤집는 상처는 당연히 일상까지 영향을 미쳤다. 돌이켜보면 아내, 그를 든든하게 지켜줬던 가족이 없었다면 김월조 씨 선택은 삶보다 죽음 쪽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절망 끝에서 그를 지킨 아내, 그리고 가족

“별일 없나? 오늘 들어갈 거다.”

100일 넘게 남편에게 들어오는 수입은 없었다. 그래도 투정은 사치였다. 당장 목까지 차오르는 버거운 살림 꾸리기에 남은 힘을 짜낼 수밖에 없었다. 김월조 씨 아내는 학원에서 일하고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가정을 지켰다. 그리고 드디어 돌아온다는 남편 소식을 들은 것이다. 하지만, 그 전화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다시 들려온 소식은 구치소에서 왔다.

창원 가음정시장 ‘용지마당’ 김월조 사장./김구연 기자

“아내는 주말마다 면회를 왔어요. 면회 시간이 8분인데, 창원에서 수원까지 왕복하면 10시간은 넘게 걸리는 거리잖아요. 그래도 빠짐없이 와서 저를 격려했지요.”

한 달 뒤, 김월조 씨는 돌아왔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뒀다. 몸과 마음은 파업 현장에서 입은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일자리를 구하고자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하지만 퇴직자에게, 게다가 전과 기록까지 남은 이에게 허락되는 일자리는 없었다. 모든 게 절망이었던 김월조 씨, 점점 극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자신도 추스르기 어려운 시기에 김월조 씨를 품어주는 데 모든 힘을 썼다. 결국, 그 응원이 다시 일어설 힘이 됐다.

김월조 씨는 가까스로 식육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기계를 만지던 손이 칼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적응하는 시간 내내 괴로움은 이어졌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조금씩 일 눈이 뜨였다. 좋은 고기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칼질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러자 묵묵하게 응원하던 아내와 장모가 뜻을 모았다. 2010년 6월, 김월조 씨는 ‘용지마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고깃집을 열었다. 식당을 한 적이 있는 장모와 아내 응원, 그리고 식육점에서 배운 일이 만들어낸 소중한 공간이었다.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곳 ‘용지마당’

김월조 씨가 식당 밖에 있는 냉장실에서 고기를 꺼내왔다. 그리고 가게 입구 한쪽에 있는 도마에 고기를 올렸다. 조심스레, 하지만 익숙한 솜씨로 고기를 썰어냈다. 냉동기가 없는 생생한 돼지고기가 당장 불에 올렸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먹음직스러웠다.

창원 가음정시장 ‘용지마당’ 김월조 사장./김구연 기자

“처음 식당을 열었을 때는 손님이 들어오는 게 무서웠어요. 나름 손님맞이 연습도 하고 했는데, 첫 손님이 들어오니까 뭐부터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그 정도로 초보였어요.”
내세울 것 없는 작은 공간에서 믿는 구석이라고는 진심밖에 없었다. 좋은 돼지고기를 손님 보는 데서 썰어낸 것도 이유가 있었다. 가게가 좁기도 했지만 고깃집이 고기로 책잡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그리고 오는 손님들 한 명 한 명을 정말 고맙게 대했다. 절망 끝에서 도저히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 가족들이 지켜줘 만든 자리, 이제 김월조 씨와 가족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쪽은 손님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김월조 씨를 형님·동생이라고 부르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은 젊은 부부가 열심히 산다며 기특해했다. 그런 소박한 응원이 의지가 됐고 다시 힘이 됐다. 보답하는 길은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뿐이었다.

창원 가음정시장 ‘용지마당’ 김월조 사장./김구연 기자
“손님들에게 생고기를 드리려고 고기를 많이 떼 오지는 않아요. 그래서 특정 부위가 빨리 떨어질 때도 있지요. 장아찌 같은 밑반찬도 장모님이 만드시는 것을 써요. 그런 점들을 손님들이 예쁘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해고로 말미암은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한 식당이지만, 잃은 것도 있다. 김월조 씨는 특히 아직도 딸 생각만 하면 가슴 한쪽이 저리다.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6살이던 딸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또래보다 제 할 일을 척척 챙기는 모습이 대견하지만, 그만큼 짠하기도 하다.

“제가 딸바보인데…. 처음에 장사 때문에 떼놓고 나오면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제 할 일 잘하는 것 보면 대견하기도 한데 너무 빨리 커버린 것 같아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어 늘 미안해요.”

해고 노동자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

김월조 씨는 아직도 직장 생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직장인으로 평생 직장 생활 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그 역시 장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만, 이왕 시작한 장사라면 제대로 잘하고 싶은 욕심 정도는 이제 생겼다.

창원 가음정시장 ‘용지마당’ 김월조 사장./김구연 기자
“이 집은 처음부터 고기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게 제가 이 장사를 시작하면서 다짐한 한 가지에요. 그래도 창원에서 고기 하면 ‘용지마당’이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보다 가게 규모도 더 키울 것이고요.”

절망 속에서 든든하게 자신을 지켜준 아내에게도 갚아야 할 게 너무 많다. 김월조 씨 보기에 아내는 말이 좋아 고깃집 사장님이지 따지고 보면 식당 아줌마다. 시간이 흘러 지금 한 고생들을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게끔 뭐든 아내에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 같으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늘 떨칠 수 없는 사람들, 동지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고 싶어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전과자가 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법적 문제로 가압류당해 퇴직금도 받지 못하는 수많은 퇴직자….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해고는 기회다’라고 한바탕 소리질러버릴 수 있도록 잘 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쌍용차 창원엔진공장에서 나온 분만 200명 정도 됩니다. 이들이 그냥 잊히는 게 늘 안타깝습니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이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사회적 관심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더 따뜻하게 품어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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