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이야기]한철수 고려철강 회장

지역 종합경제단체인 상공회의소. 상공회의소 수장은 그 지역 기업과 경제인을 대표하는 자리다. 그 직함은 경영인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두드러진 성과와 지역 경제인들이 보내는 신망을 아우르는 한 명에게 부여된다. 분야마다 나름 성공한 사람들이 다시 모여 인정하는 사람. 통합 이전인 지난해까지 마산상공회의소 회장은 한철수 고려철강 회장이었다.

테 없는 안경 밑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선한 눈매는 애써 멋 내지 않은 자연스러운 머리칼과 어울렸다. 까다로운 격식이나 준비된 질문 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진행하겠다는 요청에 '그게 오히려 좋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한철수 회장은 상대 생각을 휘젓는 게 익숙한 능변은 아니다.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잘 정돈해 차분하게 풀어나가는 쪽이었다. 막힘은 없되 성급하지도 않은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한철수 고려철강 회장. /김구연 기자

통합 창원상공회의소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창원·마산·진해 3개 지역에 있던 상공회의소는 지난해 7월 합쳐져 올해부터 통합 창원상공회의소로 다시 시작했다. 이제 마산상공회의소는 통합 창원상공회의소 마산지회가 됐으며 한철수 회장은 마산지회장을 맡았다. 공식적으로는 111년 역사를 자랑하는 마산상공회의소 마지막 회장이 된 셈이다.

통합 창원시, 준비가 부족했다

한철수 고려철강 회장. /김구연 기자
"마산·창원·진해를 비롯해 함안까지 4개 지역 통합은 원래 상공회의소에서 나온 구상입니다. 아무래도 도시가 커지면 규모·발전 등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 않겠나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창원시로 통합 이후 상공회의소가 통합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상공회의소에서 나온 제안이 현실이 됐다. 결과만 놓고 보면 만족할 만한 그림이며,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낙관이 이어질 듯했다. 하지만, 한철수 회장은 뭔가 찜찜한 구석에 대한 부담을 놓지 못했다. 결과만 놓고 낙관하기에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통합은 맞지만 너무 성급하게 추진한 것 같아요. 3개 시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충분한 검토 없이 너무 결과에만 집착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지역 간 갈등만 불러일으킨 모양새인데, 사전에 생길 수 있는 문제와 그에 따른 갈등을 조정하며 천천히 진행했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상공회의소 통합 과정만 봐도 그렇다. 이름을 비롯해 인원, 구조, 주도권 등 갈등 요인은 수없이 많았다. 긴 시간 논의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지역 상공회의소들은 서로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이견을 조율했다. 어느 상공회의소라도 누릴 권리만 주장했다면 통합은 되지 않았거나 한참 뒤에 이뤄질 일이었다. 상공회의소 하나 통합하기도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하물며 창원시는…. 한철수 회장은 통합 이후 1년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통합 효과는커녕 갈등만 커지는 현실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결과는 만들었는데 내용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경제인들은 기업·경제 발전 관점에서 통합 논리가 나름 준비돼 있었지만, 3개 시 통합을 사실상 주도한 정치권에서 그런 준비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한철수 고려철강 회장. /김구연 기자
기업 이익 대변과 지역 공헌 사이에서

지난해 12월, 마산상공회의소는 111년 역사를 담은 책 한 권을 내놓았다. '사진으로 본 마산상의 111년의 흐름'이라는 사진집이다. 통합 창원상공회의소 출범을 앞두고 마산상공회의소와 마산 상공업사 역사를 정리하는 뜻에서 기획한 사업이다. 공식적으로 한철수 회장은 마산상공회의소 마지막 회장이 됐다. 2009년 취임한 그는 임기 3년 중 2년 8개월을 채웠다. 한철수 회장이 마산상공회의소를 이끌면서 추구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그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까.

"기업 이익을 대변하는 게 상공회의소 존재 이유입니다. 하지만, 저는 상공회의소가 지역에 더 밀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역 현안을 놓고 갈등이 생기면 중재 역할도 해야 하고, 문화·예술 등 각계각층에 상공회의소가 힘이 될 수 있는 분야에는 힘을 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한철수 회장이 정한 방향은 '지역과 함께 호흡하는 상공회의소'였다. 구체적으로 상공회의소 공간을 시민·환경단체에 개방했다. 지역에 생기는 갈등에 대해서는 기관과 시민·환경단체 사이 소통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상공회의소가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마산에 있는 학교와 기업 간의 '1사 1교' 자매결연 추진, 문화·예술단체 지원 역시 한철수 회장 체제에서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한 회장은 이 같은 성과에 대해 공(功)이면서 과(過)이기도 하다고 했다. '지역과 호흡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기업 이익 대변'이라는 상공회의소 존재 이유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

한철수 고려철강 회장. /김구연 기자

"공을 뒤집으면 그대로 과인 것 같아요. 기업 이익을 대변하는 일만 해도 버거운데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있느냐는 평가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 방향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한 회장은 통합 과정에서 자신이 한 역할에 대한 평가 역시 앞으로 아쉬움이 남을 부분이라고 했다.
"마산이 뭔가 잘 돌아가지 않을 때 선배 상공인에 대한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통합 과정을 보면 저도 나름대로 중심에서 활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통합 이후 일어날 상황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선배들이 저지른 과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막상 제가 그 처지가 된 셈이지요. 그런 점이 좀 아쉽습니다."

한철수 고려철강 회장. /김구연 기자

아버지와 선배로부터 배운 인생의 길

한철수 회장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자신도 남들에게 내세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이뤘다는 점은 자부한다. 하지만, 그 성공을 이룬 저력에 대해서는 답을 망설였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진 게 많아서가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때마다 온 힘을 다했지요. 주변 사람들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혼자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없지요. 될 수 있으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삶에 대한 주문은 항상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어떤 선택을 하든 교육자 자식으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반성이 늘 지침이 됐다. 기업인으로서 이익에 더 얽매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무엇인가 뒤끝이 남는다면 다른 선택을 하곤 했다. 교육자인 아버지는 살면서 비겁한 선택을 하지 않게 했던 예방접종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한철수 회장에게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은 대학 선배였다.

"지금도 가끔 만나는 선배가 있습니다. 대학 들어갔을 때 만난 3년 선배지요. 72년 계엄령 선포하고 할 때인데, 당시 대학생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들을 과제로 많이 던져준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공직에 있다 보니 이른바 운동권 활동이라는 것을 깊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 선배 덕에 사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지요."

지역사회 공헌 활동에 대한 관심, 약한 쪽에 대한 배려는 선배와 만남, 그리고 그와 함께 한 고민 속에서 다져졌다. 한철수 회장은 스스로 인복이 많고 낙관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했고 그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했다.

한철수 고려철강 회장. /김구연 기자

위기 앞에서 근본을 생각하다

연매출 1000억 원대 기업인 고려철강은 30년 전 마산에 있는 작은 특수강 업체 사무실 한쪽에서 더부살이로 시작된다. 당시 30%가 넘었던 철강 마진율에 가능성을 확신하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한철수 회장은 부산에 있는 한 철강업소에서 물건을 떼어와 마산·창원지역에 팔면서 2년 후 전세를 얻어 독립한다. 그리고 1991년 마산 봉암공단에 공장을 짓고 나서 첫 매출 100억 원을 돌파하면서 틀을 갖췄다. 물론 치명적인 위기도 있었다.

"우리가 부품을 장착한 제품이 나왔는데 문제가 생겨서 리콜이 됐지요. 부품으로 얻는 이익은 20만 원 정도였을까. 손해배상 금액이 4억 가까이 되는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그냥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지요."
한철수 회장은 늘 어떤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가장 먼저 최악의 상황, 즉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다. 그리고 그 상황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낙관적인 성격이라고 했다. 물론 그런 성격은 모든 경쟁업체를 찍어 누르고 가장 앞장서는 성과를 내는 것은 보장하지 못한다. 하지만, 쉽게 위기에 흔들리지도 않는다. 한철수 회장은 실수를 인정하고 거래업체에 양해를 얻고 나서 다시 차곡차곡 재기 수순을 밟아나갔다. 또 1997년 외환위기를 버텨낸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IMF 때 동종 업종에서 살아남은 기억이 20~30% 정도였을까. 그때는 차라리 부도를 내고 피해를 최소화해서 재기를 노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금전적으로는 확실한 이득이지요. 하지만, 불명예스럽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악착같이 버텼고 마침 저를 믿어주는 사람들 덕에 조금씩 되살아날 수 있었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돈 버는 재능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마산 사람

한철수 고려철강 회장. /김구연 기자
한철수 회장은 마산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졸업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녔지만 졸업하고 바로 마산으로 돌아와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그에게 마산은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이 나온 곳이자,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되돌려줘야 할 곳이다.

"지역사회에서 내가 받은 만큼 지역에 돌려줄 방법을 고민할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 안 된다면 다른 사람과 힘을 모아서라도 해야 할 일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하면서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인터뷰 중에 마산이 가진 정신에 대해서도 짧게 풀었다.

"마산 정신이라는 게 뭘까요. 바로 3·15정신 아니겠습니까. 3·15정신이라는 것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그런 쪽에서 제가 할 역할은 뭘까 항상 고민합니다."

한철수 회장이 지역에서 거둔 성과, 그리고 입지나 지분 등을 고려할 때 그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행정이나 정치 쪽 구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런 말 정말 많이 들었지요. 40대였다면 모르겠습니다. 정치나 행정이라는 게 내가 가지지 못하면 스스로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뭔가 여유가 생기면 봉사하는 자세로 할 일이 아닌가 했지요. 그때 지금처럼 가졌거나, 지금 그때처럼 젊거나 했다면 모를까 이제 그쪽으로는 때가 지났습니다. 그리고 정치·행정이 아니더라도 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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