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함안 여락원 이란 원장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도착을 알리며 신호를 멈췄다. 그러나 동네 한가운데였고 진짜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먼저 도착한 사진기자 차가 보였다. 다행히(?) 혼자 헷갈리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취재할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무슨 다리 한가운데였다. 차에서 내린 박일호 기자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징크스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쨌든 일과가 누구보다 바쁜 사진기자에게는 참 민망한 일이다. 다시 방향을 정하고 길을 재촉했다. 함안군 장명마을로 접어들어 길 따라 들어가면 마을 꼭대기에 있는 ‘여락원’.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보니 그렇게 복잡한 길은 아니었다. 함안 나들목에서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법수면 경계 표지판을 만나는 곳에서 다시 왼쪽으로 들어가면 장명마을이 나온다.

여락원에 도착하자 원생들이 수련하는 곳으로 보이는 넓은 방으로 안내됐다. 잠시 기다리자 한복을 입은 이란(53) 원장이 들어왔다. 방 가운데 한쪽 벽에 마련된 자리에 이란 원장이 앉았다. 자리 옆에는 징이 놓여 있다.

“열반(涅槃)에서 ‘열’, 음악·즐거움에서 ‘락’을 딴 이름이에요. ‘열악원’이라고 하면 이상하니까 자연스럽게 ‘여락원’이라고 했지요."

함안 여락원 이란 원장./박일호 기자

이름 대로 풀자면 ‘즐겁게 깨달음을 얻는 곳’, ‘음악을 통해 깨달음에 다가가는 곳’ 정도가 되겠다. 처음에는 막연했던 이 의미가 제대로 그려진 것은 이란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한참 시간이 흘러서다. 사실 복잡한 내용은 아니었는데,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한 편견 때문에 이해가 늦었다. 그 뜻은 천천히 풀고, 이란 원장이 ‘여락원’보다 먼저 설명하려 했던 개념은 ‘율본(律本)운동’이다. 그는 자신을 율본운동 창시자라고 소개한다.

“율은 벌률이지요. 하늘이 품은 기운, 우주를 지배하는 흐름을 뜻해요. 본은 물론 근본을 말하고요. 우주, 자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기본 흐름을 알자는 게 ‘율본운동’이에요.”

역시 호락호락한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인터뷰 중간에 의미가 그려졌다.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 섞여서 그렇지 이란 원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 복잡하지 않았다. 먼저 율본운동 시작을 묻자 그는 13년 전 기억부터 꺼냈다. 넓은 방은 이란 원장 목소리만 더욱 뚜렷해졌다.

불혹에 느닷없이 다가온 신내림

의욕적인 여성이었다. 불혹을 앞두고 숙박업 사업을 벌였다. 사람이 먹고 자고 씻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수완도 있었고 자신감도 따랐다. 다만, 때가 좋지 않았다.

“사업을 벌이고 1·2년 만에 IMF를 맞았어요. 그것으로 끝이었지요. 사업을 더 버텨갈 수가 없었어요.”

세상은 점점 막다른 곳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몸과 마음이 약해져서이었을까. 의미를 알 수 없는 꿈이 갈수록 잦아졌다. 꿈에 대한 답이 필요했고 결국 무속인을 찾았다.

“그러니까 신내림이었던 셈이지요. 보통 신내림을 받으면 몸살을 하게 되고 많이 앓고, 신내림을 거부하다가 더 아프고 그러는데 저는 그런 과정은 없었어요. 꿈만 계속 반복하면서 꿨지요. 신내림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뭐 다른 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요.”

함안 여락원 이란 원장./박일호 기자

그렇게 불혹이 되면서 무속인으로서 삶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느 무속인과 다를 바 없었다. 남들 인생 봐주고 꽉 막힌 액운 떼주고 그런 일이었다. 하지만, 이란 원장에게 이 일은 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친 것 같았다. 다른 길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술집에서 일한다는 아이들을 만나게 됐다.

“애들이 너무 아프다잖아요. 몸도 마음도 상처받은 아이들이었어요. 병원에 다닌다고 해결되는 아픔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징을 치면서 그 아이들 얘기도 듣고 그렇게 몇 차례 만나다 보니 아이들이 낫는 것이에요.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지요. 소리가, 징소리가 뭔가 힘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 신이 노하셨구나 여기면 그것은 신화(神話) 영역이다. 공기 속 전기 입자가 서로 어쩌고저쩌고 읊기 시작하면 이는 과학이 된다. 징소리를 통해 치유되는 아이들을 보고, 못된 귀신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다면 무속(巫俗)에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란 원장은 소리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과학자처럼 설명할 수 없었던 그에게 명제를 확인할 방법은 경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징을 들고 아픈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함안 여락원 이란 원장./박일호 기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

이란 원장이 말하는 ‘율본운동’은 두 단어로 구체화된다. 바로 ‘소리’와 ‘자연치유’다. 두 가지 모두 낯설기는커녕 상당히 익숙한 개념이다. 소리가 동·식물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이미 상당히 검증됐다. 자연치유 능력은 또 어떤가. 아플 때 스스로 병원을 찾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다. 대부분 생물은 스스로 견디고 치유해낸다. 사람이라고 그 범주를 벗어날 리 없다. 어깨가 아플 때 어깨를 돌리고, 목이 아플 때 목을 돌리고, 배가 아프면 배를 문지르는 것 역시 자연치유 행위다.

“율본 운동은 우리 몸에 있는 자연 치유 메커니즘을 믿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사람, 아니 생물이라면 모두 지닌 능력이지요. 그런데 이 능력을 현대인들은 잊고 있어요. 아프면 병원부터 찾기 시작하지요. 도움 없이 스스로 고쳐낼 수 있는 병인데도 말이지요.”

여락원에 도착해서 이란 원장을 만나자마자 수련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그런 것 없다고 답했다. 무슨 동작 같은 게 없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기공운동이나 태극권 동작, 물구나무서기, 하다못해 좌선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던진 질문이었다. 그가 내놓은 답은 같았다.

“아직 여기 수련을 잘 모르고 오셔서 그런 질문을 하나 보네요. 우리는 특별한 동작이나 그런 거 없어요.”

함안 여락원 이란 원장./박일호 기자

넓은 방에 원생들이 앉아 있으면 그들 앞에서 이란 원장이 하는 일은 징을 치는 것뿐이었다. 높고 낮게, 여리게 세게 징을 두드리는 게 전부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원생들은 자기가 필요한 동작들을 알아서 할 뿐이다. 그런 동작들은 정형화된 게 아니다. 사람마다 몸 상태가 다른 것처럼 징소리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이라고 했다. 3시간 정도 이어지는 수련은 그게 전부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단순한 과정을 거쳐 아픈 사람들은 원하는 성과를 거둔다고 한다.

“인위적인 운동은 배제해요. 최대한 자연 치유 메커니즘에 맡기는 게 목적이지요. 징은 어떤 타악기보다 다양한 주파수를 낼 수 있는 악기라는 장점이 있어요. 병이 났다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고유 진동수를 잃었다는 말이에요. 율본운동은 그 잃어버린 리듬을 찾는 과정이고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 몸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 그런데 오랜 시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기능을 잃었다. 율본운동은 그 기능을 되찾자는 게 목적이다. 다만, 긴 시간 묵힌 능력을 살리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그 도움을 주는 매개체가 바로 징소리다. 징이 지닌 다양한 음역대 소리를 공급함으로써 헝클어진 몸속 리듬을 회복하자는 게 율본운동이 그리는 큰 얼개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란 원장은 자연 치유 능력 회복을 거드는 응원단장인 셈이다.

몸과 마음 다친 청소년 치유하고 싶어

이란 원장에게 느닷없이 닥친 무속인 삶은 뭘까. 올해 10년째인 율본운동은 무속인으로서 삶이 이어진 것일까 단절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는 신내림에 대해 자부심이 있어요. 사회 통념이 저를 어떻게 보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든 이 길을 통해서 또 다른 길을 알게 된 것이잖아요. 하지만, 율본운동을 무속이나 종교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반대지요. 오히려 과학적으로 접근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율본운동을 시작하면서 무속행위를 하지 않아요. 수련원들에게도 종교적인 부분은 서로 얘기하지 않기로 해요. 당연한 것이에요.”

함안 장명마을에 여락원 자리를 마련하고 이란 원장이 부딪혔던 가장 두꺼운 벽은 오해였다. 자연 치유 능력에 대한 의심은 오히려 한참 뒤에 일이다. 외딴곳, 넓은 방에서 원장이라는 사람은 징을 두드리고 있고, 원생이라는 사람들은 소리에 몸을 맡겨 몇 시간씩 흔들거리고 있으니 생길 수 있는 오해라는 것은 뻔했다.

“사이비 종교 아니냐는 말, 정말 많이 들었지요. 그 오해를 푸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일단 그 과정을 지나니 오히려 자연 치유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너그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함안 여락원 이란 원장./박일호 기자

지금은 장명마을에 사는 어르신들도 종종 여락원에 들려 몸을 관리한다고 한다. 이란 원장에게 작은 보람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청소년들에게 느낀다. 몸과 마음이 다친 아이들이 스스로 병을 극복할 때 느끼는 보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는 한참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에 넉넉한 사랑을 주지 못했던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다.

“제가 이 세계에 39살에 들어왔어요. 큰애는 중학생이었고 작은애는 초등학생이었지요. 엄마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 죄책감이 항상 남아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정하고 자식들을 챙길 수 있을 때가 되니 애들은 또 사랑이 필요한 시기가 지났더라고요.”

다행히 두 아들 모두 잘 자랐다. 큰아들은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 음악 치유를 전공하는데 이란 원장이 보기에는 율본운동과도 상당히 닿아 있는 분야다. 작은아들도 대학에 입학해 큰 걱정은 덜었다. 결핍을 딛고 늠름하게 자란 아이들은 이란 원장에게 늘 고마운 존재다. 그래서 이란 원장이 품은 꿈은 다시 청소년을 향한다.

“이곳을 찾은 아이들이 ‘원장님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때 가장 행복해요.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큰 기쁨을 느끼지요. 앞으로 얼마나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력이 된다면 청소년을 위한 치유센터를 짓고 싶어요. 청소년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이지요.”

근대 들어 현대의학이 일군 성과는 찬란하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지는 가늠할 수 없다. 의학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그 혜택을 보는 사람도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성과에 기대느라 사람이 스스로 지닌 능력을 잃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잊혀가는 능력을 다시 찾고 해석하는 움직임도 다양한 분야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란 원장이 말하는 율본운동도 넓게는 그 범주 안에 들어 있다.

“복잡한 게 아니에요. 이것 하나만 강조할게요. 내 몸이 나를 치유하는 가장 훌륭한 의사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에요. 여락원에서 그 원리를 체험할 수 있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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