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박영빈 경남은행장

그는 활달한 사람이다. 목소리에 흥이 넘친다. 근엄하다거나 점잔 빼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그는 노래 부르기를 즐긴다. 며칠 전 그와 저녁을 먹은 후 들렀던 한 카페에서 아도니스의 <정>과 쟈니리의 <사노라면>을 정말 맛깔나게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의 노래를 들은 동석자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지난해 12월 마산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경은 가족 한마음 대축제’에서도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와 페이스 페인팅으로 분장한 채 무대에 깜짝 출연,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와 버스커 버스커의 <서울사람들>을 열창해 직원과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경남은행 박영빈 은행장 이야기다.

박영빈(58) 은행장은 3월 23일로 취임 1주년을 맞았다. 2010년 12월 31일부터 직무대행으로 있었던 기간까지 합치면 꼬박 1년 3개월간 경남은행을 이끌어왔다. 전임 은행장 시절에 발생한 4000억 원대 지급보증 금융사고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구원투수격으로 등판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박영빈 경남은행장./김구연 기자

지역 밀착, 고객 밀착을 위해 감동 다큐영화 <울지마 톤즈>를 무료상영해 경남과 울산에서 5000여 명 이상이 관람했고, 연극 <용띠 위에 개띠>, 오페라 <투란도트> 공연, 경남메세나협의회 등을 통한 사회공헌, 고교 졸업생 채용 등을 통해 친밀감을 높였다. 취임 후 6개월동안 수신고가 2조 5000억 원이 늘어났다. 취임 1년간 여·수신이 최근 몇 년치 보다 많은 3조 원 이상 증가했다.

비결이 뭘까?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고교 시절 나는 ‘날라리’였다

-얼마 전 카페에서 아도니스의 <정>과 쟈니리의 <사노라면>을 부르는 걸 봤습니다. 완전 가수던데요? 애창곡은 뭡니까?

“애창곡은 없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부릅니다. 딱히 애창곡이라고 할 만한 건 없어요.”

-그만큼 아는 노래가 많다는 겁니까?

“노래는 좀 많이 알죠. 요새는 일한다고 바빠서 제목은 다 까먹었지만 노래책 보면 웬만한 건 다 부를 수 있죠.”

-소싯적에 음악 활동을 했나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어요. 음악색이 있다는 이야기도 좀 들었죠. 고등학교 때 밴드, 그룹사운드를 좀 했죠.”

-경남고등학교면 인문계인데, 거기도 그룹사운드가 있었나요?

“공부 안 하는 날나리들이었지 뭐.”(웃음)

노래를 부르고 있는 박영빈 경남은행장.

-공부 안 하는 날라리가 어떻게 연세대 법대까지 갔죠?

“그때만 해도 경남고가 좀 좋은 학교였나 봐요. 웬만하면 연·고대는 갔으니까.”(웃음)

-태어나신 곳은 부산 어딥니까?

“태어나기로는 중구 영주동서 났는데, 아버지도 은행원이고 어머니도 은행원이라서 살기가 좀 괜찮았나 봐요. 부산의 부촌이라는 대신동에서도 살았고, 부용동에서 살았어요. 아버지 어머니, 외할아버지도 은행원이고 나도 은행원이고, 딸도 은행원이니 4대가 은행원인 셈이죠.”

4대(代)가 은행원인 금융 명문가 출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계시고…,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셨죠. 외할아버지는 옛날에 서울신탁은행 전무를 하시다가, 성업공사, 요새 같으면 자산관리공사 사장하시다가 대한투자신탁이라는 회사를 처음 만드신 분이었죠.”

-금융 명문가네요?

“명문가는 아니고 뭐, 어쨌든 거기서 쭉 내려왔죠.”

-그런데 어떻게 처음부터 상대 쪽으로 안 가시고 법대로 가셨나요?

“원래 상대를 가려했는데 점수가 1~2점 모자라서…. 어! 이런 건 쓰면 안 되는데….”(웃음)

-법대에서 고시 공부는 안했나요?

“고시공부 했었죠. 그런데 원래 공부하는 체질이 아니라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2학년이 되어 남들이 고시공부를 하기에 나도 마음먹고 시작했죠. 그때부터 도서관에서 12시까지 공부하고 연희동 집까지 걸어왔는데, 하루는 집에서 난리가 났더라고요. 졸지에 군 입대 영장이 나왔던 거죠. 한 달 만에 군대를 갔어요.”

-어디서 근무하셨나요?

“성남에 있는 육군 항공단에서 근무했죠. 당시 교련으로 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받는데, 도끼만행 사건이 나서 2개월을 더 복무했어요. (이 때부터 정색을 하며) 군대에 가보니 중졸, 고졸 친구들이 많았는데 같이 생활해보니 나보다 훨씬 똑똑하더라고…. 그 친구들도 집이 여유가 있어 공부를 했더라면 나보다 훨씬 잘 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상당히 충격을 받았죠. 내가 세상을 모르고 살았던 거지. 좋은 부모 만나 가지고 좋은 학교 다니니까 내가 똑똑한 줄 알았던 거죠.

그 때부터 스스로에게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군대 제대한 뒤, 사법고시는 늦었다고 보고 행정고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해 6월부터 서너 달 동안 죽자 사자 공부를 했죠. 9월 말에 시험을 봤는데 행시 1차에 합격했죠. 뿌듯하기도 하고 좀 우쭐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행정관료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나 자신에 대한 테스트였던 거죠. 그 때 행시 1차 동기였던 사람이 박완수 창원시장이예요.”

인터뷰 하고 있는 조재영 경제부 차장, 김주완 편집장, 박영빈 경남은행장(좌로부터)./김구연 기자

-아! 박완수 시장과? 박 시장도 아시나요?

“알고 계시죠.(웃음) 박 시장이 나이도, 나보다 딱 하루 먼저 태어났더라고요. 내가 54년 9월 23일인데, 박 시장은 5월 22일이라. 그래서 영원한 형님으로….”(웃음)

삼성그룹 합격했지만 안 간 까닭

-그래서 한국개발금융에 입사했군요. 금융 명문가인데 왜 은행에 취직하지 않고?

“사실 어릴 땐 은행이 굉장히 좋은 줄 알았는데, 그 당시엔 은행이 별로 안 좋은 직장 취급을 받았어요. 그래서 삼성 하고 몇 군데 취직 시험을 쳤죠. 내가 대학 다닐 때 공부는 안 했는데, 성적은 아주 좋아요. 시험 칠 때 바짝 공부를 해가지고….”

-한 마디로 공부하는 요령을 알았던 거로군요.

“하하, 공부하는 요령만 아는 거죠. 시험 치고 나면 다음날 다 잊어먹어.(웃음) 그래서 졸업 성적은 반에서 아마 1등을 했을 거예요. 공부 억수로 잘하는 것 같은데 정작 실력은 없어.(웃음) 어쨌든 삼성에도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삼성물산으로 가고 싶었는데, 내가 법대 나왔다고 당시 동방생명, 지금의 삼성생명으로 발령을 냈어요. 그래서 안 갔어요. 그러고 나서 한국개발금융(KDFC)에 갔는데, 외국계 회사였죠. 당시 삼성이 월급 7만 원 줄 때 KDFC는 30만 원 줬어요. 그래서 들어갔더니 완전 미국식으로 9시 출근에 5시 퇴근, 출퇴근도 택시로 시켜주고 억수로 좋았어요. 그런데 그게 나중에 장기신용은행으로 바뀌었어요. 은행에는 안 가려 했는데 은행으로 바뀌니까, 그럴 바에야 이왕이면 좋은 은행으로 가자 싶어 나중에 한미은행이 생기면서 그리로 옮겼죠.”

박영빈 경남은행장./김구연 기자

-한국개발금융에 몇 년이나 계셨나요?

“3년 있었죠. 한국개발금융-장기신용은행 있을 때 재미있는 게 있어요. 내 위에 결제라인이 있었는데, 그 때 함께 있었던 네 명이 모두 은행장이 되었어요. 내가 제일 졸병이었고, 그 위에 과장, 그 위에 부장, 상무가 있었는데, 내가 경남은행장 됐고, 내 위 과장이 강신철 전 경남은행장, 그 위 부장이 공종현 장기신용은행장, 그 위 윤병철 상무가 하나은행장 하고 우리금융그룹 회장도 하고…. 정말 이런 경우는 드물죠.”

-그때 인맥이 이후에 도움된 게 있습니까?

“인맥 자체가 도움이 되었다기보다 제가 정말 좋은 라인에서 일을 배웠죠. 강신철 과장님은 굉장히 로지컬하시고, 공종현 부장님도 대단한 분이었어요. 스케일도 크시고…, 그 위에 윤병철 상무는 잘 알다시피 대한민국 금융의 가장 태두시죠. 그런 분들 아래서 졸병 시절 기본 바탕을 배운 게 나중에 도움이 많이 됐죠.”

-가족은 어디 계십니까?

“아내하고 딸 둘인데, 아내는 (서울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오늘도 내려와 있어요. 큰 딸은 한양대 건축과 졸업하고 지금 영국에서 파인아트 하고 있고요, 둘째는 이대 졸업하고 서울에서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둘 다 영어를 잘해요. 토익 만점이 우리 집에만 둘이 있죠.”(웃음)

문화예술에 눈뜬 런던 지점장 시절

-경남은행장 취임 후 문화예술 공연을 많이 하시는데, 특별히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가 한미은행 런던지점장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클래식 음악도 몰랐고, 그림 볼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영국에는 그게 생활화되어 있으니까. 종교가 그렇듯 예술도 한 번 발을 들여놓으니까 확 빠지더군요. 한 번은 아내와 파리 여행을 갔는데, 오르세이 미술관에서 인상파 작품을 감상하게 되었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인상파라는 게 인상 쓰는 놈들인가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중고등학교 미술 책에 나오는 그림 원본들이 다 있더라고요. 마네, 모네, 밀레, 고호, 고갱, 드가, 르느와르…. 와! 진짜 좋다는 게 느껴지데요. 그 때 빠져서 두 바퀴, 세 바퀴 돌며 이름을 안 보고도 알아볼 정도가 됐어요. 그걸 맞춰서 기분 좋은 게 아니라 옛날에 못 느끼던 걸 느끼게 된 게 좋았어요.

내가 취임하고 나서 우리 경남은행 본점 1층에 갤러리를 만들었는데요. 은행장 맡고 나서 알고 보니 우리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그림이 800점이나 되더라고요. 그게 다 창고에서 자고 있더라고. 이게 말이 안 된다. 갤러리 자리가 원래 PC 고장 난 것 쌓아놓던 곳이었는데, 그걸 다 치우고 갤러리로 만들었죠. 문화는 고객과 더불어 해야 합니다. 마음, 감성 이입이 되면 장사는 저절로 됩니다. 부임해서 와보니 금융사고 문제, 지방은행 통합 문제로 직원들 사기가 확 죽어 있었어요. 직원들 사기부터 불러일으키고자 TV광고를 만들었고, 고객들에게도 경남은행이 어려움 딛고 일어서 열심히 하겠다는 모습 보여주고자 한 거죠.”

박영빈 경남은행장./김구연 기자

-<울지마 톤즈> 무료상영 행사는 직접 기획한 건가요?

“울지마 톤즈는 사실 처음에 직원용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다 기왕이면 고객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취미는 뭔가요?

“노래 부르고 뭐. 그랬는데 지금은 노래를 다 잊어버렸어요. 제가 94년부터 97년까지 한미은행 비서실장 겸 공보실장을 했는데, 그때 기자들과 하도 술을 많이 먹어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요. 노래 제목이 생각이 안 나요.(웃음) 음악은 클래식에서부터 흘러간 옛 가요, 최근에는 젊은 직원들과의 소통을 위해 최신 K팝까지 찾아 듣고 있어요. 쉬는 날에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미술작품이 전시된 갤러리를 찾곤 하는데요. 지난해부터 경남메세나협의회 회장직을 겸하게 돼 미술작품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졌어요.”

-담배는 안 태우시나요?

“담배는 원래 태웠는데, 비서실장 할 때 하루는 행장님과 함께 차를 탔는데 ‘박 실장 담배 태웠어요?’ 하고 묻는 거예요. 아! 행장이 싫어하는구나 생각하고 그날 바로 끊어버렸어요.”

-특별히 체력유지나 건강관리를 위한 운동은 좀 하십니까?

“아침마다 무조건 6시에 일어나서 헬스 갑니다. 15년 동안 해왔어요. 그런데 행장 맡고 나서 출장 등 업무 때문에 불규칙해지니까 한 번은 무리를 했어요. 그러다가 족저근막염이란 병에 걸려버렸죠. 발바닥과 뒤꿈치가 아파요. 마라톤 선수에게 잘 생기는 병이라는데, 그 바람에 운동을 못해요. 대신 아침마다 윗몸 일으키기를 200회씩 해요. 식스팩이 생겼었는데 경남은행 와서 바빠서 다시 묻혀버렸어요.(웃음) 그래도 지금 만져보면 단단합니다.”

-골프는요?

“합니다. 평균 타수는 80대 초중반쯤.”

더 이상 욕심은 없다

-금융계에서 최고, 행장까지 되셨는데 더 목표가 있나요?

“더 목표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죠. 나를 던지면 기회가 오고, 기회가 오면 거기에 맞춰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인생의 낙은 뭡니까?

“나이 좀 들어 위에 올라가면 경쟁도 치열해지고 자리가 잘 안 만들어집니다. 욕심 낸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 국회의원 한 번 더하려고 하는 정치인들 보면 추하더라고요. 차라리 던질 땐 던져버리는 게 좋죠. 저도 마음 같아서야 60~70까지 일 하면 좋기야 하겠죠. 일 안하게 되면 유유자적 등산 다니고, 유럽서 가져온 그림책 보고, 음악 시디 듣고 그렇게 살면 되죠.”

-은행원들의 가장 큰 꿈이 은행장일텐데,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자신만의 비결이 있나요?

“제가 일할 때는 성질이 좀 안 좋아요. 일만 보면 짐승이나 맹수처럼 달려들죠. 그런 기질이나 집념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학식이 높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밖에 나가면 나름 친화력은 좀 있는 것 같아요. 주위에서 도와주는 분이 많죠.”

김주완 편집장, 박영빈 경남은행장./김구연 기자

-직원들이 좀 피곤해하겠네요.

“아, 피곤해하죠. 그래서 항상 미안하죠.”

-좋아하는 직원 스타일은?

“일에 대해 집념 가지고 달려드는 직원. 월급쟁이는, 나도 어릴 땐 그랬는데, 나에게 일이 많이 주어지면 피곤해했어요. 하지만 남에게 주는 일도 내가 하겠다는 자세,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직원을 좋아하죠.”

-인터넷, SNS 이런 건 안 하시죠?

“제가 그게 약해요. 완전 독수리 타법이죠. 나중에 비서 없을 땐 정말 아쉬울 것 같아요.”

-텔레비젼 프로그램 중에 즐겨보시는 게 있나요?

“잘 안보는데, 본다면 역사 다큐, 그리스 로마 등 고대사 관련 프로그램을 좋아하죠. 일전에 아내와 함께 고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못 본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게 계기가 되어 경남은행장 취임 후 ‘지역민을 위한 영화(울지만 톤즈) 무료 관람 행사’를 열었죠.”

-롤모델이나 존경하는 인물은?

“이병철 회장입니다. 제가 처음 삼성 시험 쳤을 때 면접을 직접 보시더라고요. ‘기업의 핵심은 인재다’, ‘내가 뽑은 인재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아름답고 고맙다’라는 고 이 회장의 말처럼 인간 중심 경영관과 인재관리, 그리고 인재양성 중요성에 백분 공감합니다. 은행은 제조업과 달라 사람이 모든 걸 좌우하거든요.”

-인생의 좌우명이 있다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 후에 간절히 바라고 간절히 구한다면 하늘은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거죠.”

-인간 박영빈을 어떻게 평가받고 싶나요?

“업무에는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면서도 업무 외적으로는 맏형처럼 편안한 존재이고 싶네요.”

인터뷰를 마친 후 박 은행장은 강풀의 만화책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경남은행이 펴낸 <경남의 둘레길>, 그리고 영화배우 감우성이 쓴 <아주 소박한 와인수첩>이라는 책을 챙겨줬다. 그는 강풀 만화 애독자여서 책을 사서 쌓아놓고 아는 사람들에게 선물한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친 후 고객 업체 방문 일정이 있다며 서둘러 은행장실을 빠져 나갔다.

한 번의 저녁 식사와 간단한 술자리, 그리고 이날 인터뷰에서 느낀 그의 성공 비결은 넘치는 끼와 흥, 그리고 노는 것만큼이나 일을 즐거워하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그의 체질인 듯 했다. 그래, 역시 일은 즐겁게 해야 한다.

<박영빈(朴榮彬) 은행장 프로필>
1954년 9월 23일 부산 출생
1973년 경남고등학교 졸업
1980년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2010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1980년 (주)한국개발금융 입사
1993년 한미은행 분당 이매동 지점장
1994년 한미은행 비서실장
1997년 한미은행 런던 지점장
2004년 경남은행 부행장
2009년 우리투자증권 전무
2010년 우리투자증권 부사장, 우리금융지주 전무, 경남은행장 직무대행
2011년 경남은행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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