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이승삼 창원시청 씨름단 감독

풍기는 이미지, 외모 하나만으로 대중에게 각인된다는 게 어떤 것일까. 수많은 장사들이 뒹굴었던 씨름판에서 털보는 오직 한 명, 이승삼 장사다. ‘털보’라는 별명 하나로 모래판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잊힌 다른 장사와 견줬을 때 분명 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징 때문에 화려한 기술 씨름으로 세 차례나 한라장사에 올랐던 실력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다른 면에서 분명 손해다. 털보 이승삼 장사의 다른 이름은 덩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화려한 기술 씨름의 선두, 뒤집기 달인이다.

'씨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누굴까?

누구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만기 장사(현 인제대 교수)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테고, 또 누구는 '포스트 이만기'로 불리며 지금은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더 어울리는 강호동을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40~50대 중년층에 물어보면 빼놓지 않고 나올 이름이 바로 '털보 이승삼'이다. 기술 씨름을 구사하며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선수를 모래판에 눕히는 실력에다 대학 시절부터 줄곧 길러 온 턱수염까지 잊으려야 쉽게 잊히지 않는 인상이다.

이승삼 창원시청 씨름단 감독.
이만기, 강호동 장사가 천하장사 타이틀을 획득한 데 반해 이승삼 장사는 천하장사 타이틀이 없다. 한라장사만 3차례(17대, 21대, 36대) 지냈을 뿐이다.

프로 은퇴 이후 유명 씨름단의 감독 제의를 수차례 거절하고 고향을 지키는 이승삼(51·창원시청 감독) 장사를 추위가 매서웠던 12월 어느 오후 만났다.

레슬러가 꿈이었던 소년 장사

이승삼 감독이 약속 장소로 정한 곳은 그의 형님이 운영하는 창동의 한 고깃집이었다. 점심때는 원래 장사를 하지 않지만, 동생의 인터뷰 자리에 형은 가게 문을 열고 직접 고기를 구워주는 친절도 마다치 않았다. 가게 곳곳에 이 감독의 옛날 사진을 붙여놔 인터뷰 장소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 감독의 형은 "승삼이가 중요한 손님이 오면 꼭 여길 약속장소로 장해 나를 귀찮게 한다"고 귀띔해줬다.

"여기가 내 아지트에요. 여기서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해결이 된단 말이지. 오늘 인터뷰도 시원시원하게 한 번 가봅시다. 우선 식사부터 들고요."

지글지글 맛있게 구워지는 고기 냄새에 후각을 뺏기고, 이 감독이 들려주는 숨은 씨름 이야기에 청각마저 빼앗겨 이래저래 바쁜 인터뷰였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꿈은 '프로 레슬러'였다.

이승삼 창원시청 씨름단 감독 /김구연 기자

그는 아침에 등교하면 분필로 칠판 한편에 '프로레슬링 세계챔피언 이승삼'이라고 적고 일과를 시작할 정도로 당시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에 빠져 살았다.

중학교 3학년 당시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소년 이승삼은 자신보다 작은 체구의 친구에게 매일 씨름만 하면 지는 게 싫어 무턱대고 씨름부를 찾아갔다.

샅바를 매고 일주일 만에 그 친구를 이긴 이승삼 감독은 그 작은 승리에 도취해 40년 가량 단 한 번의 외도도 없이 씨름인으로 살고 있다.

성호초를 졸업하고 마산중학교에 진학한 이 감독은 중학교 1, 2, 3학년이 모두 출전하는 중학생 천하장사 대회 3위에 오르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키가 문제였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초등학교 시절 자신보다 훨씬 작았던 친구들이 쑥쑥 키가 크는 것에 비해 그의 성장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이 감독은 "예전 프로필을 보면 173㎝로 돼 있는데 그게 고등학교 1학년 때 잰 키다. 근데 요즘 신체검사를 하면 173㎝이 안된다. 키가 줄어들었나 몰라"라며 웃었다.

이승삼 창원시청 씨름단 감독 /김구연 기자
신체적인 단점을 극복하고자 그가 택할 거라고는 '꾸준한 훈련'밖에 없었다.

그는 "그때는 정말 쉬지 않고 운동만 한 거 같다. 하루 6 타임씩 훈련을 했는데 외출이나 외박을 줘도 놀러다니지 않고 운동만 해서 감독님께서 막 뭐라 그랬다. 그게 습관이 되다 보니 대학에서도 프로에서도 운동만큼은 참 성실하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졸업반 때는 이승삼을 붙잡기 위한 대학들의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이봉걸 장사가 졸업한 충남대가 적극적이었지만, 그의 선택은 경남대였다. 70년대 대학 씨름은 거의 경남대의 독무대이다시피 했다. 실제로 지난 1972년 열렸던 전국학생 장사씨름대회 8강에는 김성률, 이채하, 백승만, 황경수, 천평실 등 5명의 경남대 선수가 진출할 만큼 경남대 씨름부의 명성은 자자했다.

항상 경남대 선배들의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하곤 했던 그에게 다른 선택은 무의미했다.

늦깎이 후배 이만기

그의 씨름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2년 후배인 이만기 교수다. 둘은 마산중학교에서 시작, 마산상고-경남대-현대씨름단에서까지 한솥밥을 먹은 2년 선·후배 사이다. 고교 시절까지 이만기는 그저 그런 선수였다.

이승삼 감독은 "이만기는 고3 때부터 씨름에 눈을 뜬 늦깎이 선수였다"면서 "이 교수가 경남대에 진학해 샅바를 잡아보니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로 커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중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대회가 열렸다. 이승삼 감독은 당시 경남대 4학년 재학 중이었고, 기량도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는 "당시 마산에서는 내가 우승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면서 "사실 이만기는 팀의 다크호스 정도로 여겨 다들 경계하는 선수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승삼 창원시청 씨름단 감독 /김구연 기자
하지만, 주인공은 바뀌었다. 이승삼은 체급장사 16강전에서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정작 천하장사 시합에는 출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만기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이준희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더니,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최욱진(당시 경상대 선수)마저 3-2로 누르고 초대 천하장사 타이틀을 획득했다.

당시 민속씨름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제1회 천하장사대회가 열린 장충체육관에는 대회 기간 2만 7000여 명의 관중이 몰렸고, 초대 천하장사에 오른 이만기는 스포츠 단일대회 개인경기 상금 사상 최고인 1700만 원을 받았다. 그해 프로야구 평균 연봉은 1292만 원, 최고 연봉자 OB(두산) 박철순의 연봉이 3200만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액수였다. 이만기의 우승으로 마산도 들썩거렸다. 이만기가 마산 시내를 카퍼레이드 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이승삼은 깁스에 의지한 채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씨름부 환영행사에서 축 처져 있던 내게 당시 이순복 총장님이 '빨리 끊는 냄비는 빨리 식는다'며 직접 격려까지 해줘 다시 마음을 다잡고 씨름에 집중하게 됐다"고 이 감독은 당시 상황을 전했다.

절치부심 끝에 이 감독은 비록 천하장사 타이틀은 획득하지 못했지만, 17대, 21대, 36대 한라장사에 오르며 1991년 3월 17일 모래판을 은퇴했다. 은퇴 후 울산에서 사업을 준비 중이던 이 감독은 모교인 경남대에 인사차 들렀다가 박재규 총장에게 지도자 제안을 받는다.

당시 이 감독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동생인 정희영 여사의 남편 김영주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의 도움으로 현대차 사원아파트 앞에 독점으로 슈퍼를 할 기회를 잡았다.

이 감독은 "김영주 회장님은 이만기가 우승해 인사차 들러도 '털보는 언제 트로피 가져 올 거야?'라며 유독 나를 아끼신 분"이라며 "그분의 배려로 그때 슈퍼마켓을 했으면 내 인생을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이승삼 창원시청 씨름단 감독 /김구연 기자

3월 은퇴하고 2달 뒤 그는 경남대 씨름부 감독이 됐다. 박재규 총장의 설득에 진 것이었다. 그는 "은퇴 전 연봉이 2500만 원이었는데, 경남대 감독 월급은 80만 원에 불과했다"면서 "하지만, '후배들 한 번 키워봐야지'라는 총장님의 말을 귓속을 맴돌아 도저히 마산을 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이후 울산코끼리씨름단을 비롯해 각종 씨름단에서 감독 제의가 잇따랐지만, 그는 때로는 자의에 의해, 몇 번의 타의에 의해 이적이 불발됐고, 경남대 감독에 이어 현재는 창원시청 씨름단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최근 씨름판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치 않았다.

씨름판 이끌 멋진 놈 하나 키울 것

"요즘 씨름판에는 도통 판세를 이끌 스타 플레이어가 보이지 않는다. 기술보다는 이기는 방법만을 고집하는 저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의 생각 탓이다. 나 자신도 모제욱(현 경남대 감독) 이후 이렇다 할 스타를 배출하지 못했는데 조만간 멋진 놈을 하나 키워낼 테니 지켜봐달라."

이 감독은 "한국씨름의 전설로 불리는 김성률 장사에게 씨름을 배웠고, 황경수, 이만기, 고경철 등 자타가 공인하는 씨름꾼의 장단점을 알고 있으니 내가 먼저 나설 것"이라며 "레슬링이나 유도, 태권도 등 다른 종목에서 씨름에 접목할 만한 장점을 찾아 씨름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창원시청 첫 단체전 우승 이후 선수들에게 행가레 받는 이승삼 감독.

이승삼 감독은 '씨름 선수의 손상 및 치료실태에 따른 심리사회적인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경남대 체육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한 학구파 씨름인이다. 마지막으로 이승삼 감독은 한 종편채널이 제기한 강호동 야쿠자 연루설에 대해 '비열하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핏대를 높였다.

그는 "방송에서 의혹을 제기한 시기는 호동이가 고교 3학년 때로 일양약품으로 진학이 결정돼 있었다. 감독이 일본에 데리고 간 건 맞지만, 야쿠자를 만난 일도 결단코 없다"면서 "아마 그 이듬해 호동이가 천하장사에 등극했는데, 그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돈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감독은 또 "20년도 지난 일을 그것도 당시 보도된 내용을 마치 새로운 사실인 양 포장하는 것은 비열하고 야비한 짓"이라며 "그런 식의 보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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