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21) 경북 문경 새재가는 길

오늘은 문경 들머리에 있던 마포원(馬浦院)의 옛 자리 마원리에서 길을 잡습니다. 마원리 초입에는 정월 대보름이면 술이라도 한 잔 받아먹었음직한 오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구한말에 제작된 지형도에는 이곳 마원리가 가촌(街村)으로 표시되어 있어 예부터 교통의 요충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동지지>에는 옛길은 문경으로 들지 않고 잣밭산 곁으로 오리터까지 곧바로 난 길을 따른다고 나옵니다. 바로 이 책에 "초곡(草谷)에서 홀전(笏田)에 이르기 10리, 마포원(馬浦院) 10리인데, 이것은 문경으로 들지 않고 직행한다"고 한 데 근거한 것입니다. 이 길은 마원에서 오리터까지 곧장 질러가는 길을 이르는데 지금은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보다 앞서 만든 문경지도(규 10512 v.5-10)에는 마원에서 문경현의 읍치로 길을 잡아 관혜산(冠兮山) 북쪽의 모항현(毛項峴)을 넘어 새재로 이르는 길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관혜산을 지금은 잣밭산이라 하는데, 그 맥은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主屹山: 1106m)에 닿아 있습니다.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 바로 앞에 말라죽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최헌섭

옛 지지를 뒤져보면, 관혜산은 문경의 옛 이름인 관문현(冠文縣)을 경덕왕이 고쳐 부른 관산(冠山)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곳 관혜산에는 사직단(社稷壇)을 두어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었습니다. 대개 지방의 경우 사직단을 읍치의 서쪽에 둔다 했으니 이곳은 그러한 입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이곳 관혜산은 주흘산(主屹山)에 붙여 봄가을에 소재관이 나라에서 내린 향축을 받들어 소사(小祀)를 행한 곳이라 나옵니다.

고개를 돌면 고려 때 지어 초곡원(草谷院)이라고도 했던 옛 화봉원(華封院) 터를 지나 진안리 오리터에 듭니다. 그 지명이 진안(陣安)인 것은 전란이 있을 때 진을 둔 그 안이기 때문이며, 오리터인 것은 문경현에서 5리 되는 곳에 오리정(五里亭)을 두고 현감이 갈릴 때 이곳에서 영송(迎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리터를 지나 이화령과 갈리는 곳에는 문경도자기전시관이 있는데, 옛적 문경 일원에서 왕성하게 생산된 분청사기를 비롯한 문경의 도자기를 알리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전시관의 뒤에는 망댕이가마라고 하는 문경 지역의 특징적인 가마가 복원 전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곳을 지나 새재로 접어들면, 하초리(下草里) 들머리에서 열녀윤씨일심각(烈女尹氏一心閣)이라 새긴 정려각을 만나게 됩니다. 열녀 윤 소사(召史: 양민의 아내나 과부)는 조막룡(趙莫龍)의 처입니다. 남편이 병자호란(1636년)때 쌍령(雙嶺) 전투에서 전사하자 삼년상을 마치고 친정아버지가 재가를 권하자 목매어 자진하니, 인조(仁祖) 임금이 열행을 기려 열녀문(烈女門)을 내렸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비문에는 '순치(順治)11년 8월(효종 8년 1654년)'이라 적혀 있어 명정된 때와 빗돌을 세운 때에 약간의 시차가 두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옛길의 표지임을 새기며 멀리 새재를 눈에 담고 길을 서둡니다.

새재에 들다

예서부터 본격적으로 새재도립공원에 들어서게 되는데, 새재 일원은 최근 걷기 바람을 타고 가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집단시설지구를 벗어나면 신길원충렬비각(申吉元忠烈碑閣)을 만납니다. 신길원은 임진왜란 당시 문경현감으로 적은 군사로 적을 막아 싸우다 순절한 인물입니다. 그는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상주를 거쳐 문경으로 쳐들어오자 맞서 싸우다 잡히고 말았지만 항복하지 않고 관인도 내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적이 현감의 몸을 수색하자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주지 않으므로 적이 오른손을 잘랐고, 왼손으로 관인을 쥐자 그마저 자르니, 관인을 입으로 삼켜 지키려 하다가 왜적이 내리친 칼에 목 잘려 순국하였습니다.

뒷날 <삼강행실도>에 실려 충절의 귀감이 되었고, 공의 순절은 병자호란 당시 창원도호부인을 지키다 같은 길을 따른 황시헌(黃是憲) 공의 충절과 닿아 있습니다. 이 빗집을 지나면 바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문을 연 옛길박물관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옛길의 역사와 문화를 새기고 새재길 걷기에 나섭니다.

문경새재 옛길을 찾은 걸음이들.

주흘관(主屹關)

   
 

머잖아 닿게 되는 곳은 영남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입니다. 일제강점기 사진에는 주흘관 입구 길가에 오래된 감나무 두 그루가 마주 있었는데, 지금은 한 그루 남았던 나무마저 생명을 잃고 자리만 지키고 있어 길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주흘관은 새재 들머리를 막고 있는 관문(關門)으로 숙종 34년(1708년)에 쌓았고, 영조 때에 조령진(鳥嶺鎭)을 두고 문경현감이 수성장을 겸하였다고 전합니다. 이곳에는 문경 함창 예천 용궁 상주 등 5읍의 군량창이 있었으며, 성을 지나는 관문은 무지개꼴로 이루어져 이리로 대로(大路)가 통했습니다.

성황사(城隍祠)

관문을 들어서면, 동쪽 성벽에는 병자호란 때의 주화파 최명길(崔鳴吉)과 관련한 설화를 간직한 여신각(女神閣)이라는 성황사가 있습니다. 1975년 12월에 고쳐 세우기 위해 건물을 뜯을 때 나온 상량문에는 1700년께 세우고 1884년에 진장 황치종(黃致鍾)이 두량하여 수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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