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영화는 '스크린 바깥'의 감독의 말 때문에 영화 그 이상(혹은 그 이하)의 무엇이 된다. 프랑스 칸영화제 진출로 떠들썩했던 임상수 감독의 신작 〈돈의 맛〉이 그렇다. 임 감독은 각종 인터뷰에서 재벌권력과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비판하기 위해 〈돈의 맛〉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정치적) 목적의식이 분명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프로파간다'와 무엇이 다를까. 구소련의 체제홍보 영화든, 노동자 투쟁을 선동하는 〈파업전야〉식 영화든 구체적인 진실 자체보다 특정 결론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영화는 무언가 도식적이고 공감대도 미약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인정해보자. 자, 그렇다면 감독의 의도대로 세상은 재벌에 분노하고 있으며 돈의 지배에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는가?

지난 4월 〈돈의 맛〉 제작발표회에서 임상수 감독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불법과 부정, 살인과 섹스, 탐욕과 이기, 영화는 내내 가진자들의 추악한 모습을 들춘다. '걸신들린 것처럼 돈 달라'고 요구하는 정계·재계·법조계 등 있는놈들, 배운놈들을 '순 날강도' '찌질이'라고 통렬하게(?) 욕해댄다.

감흥이 절로 생기는가?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진놈들이 '나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돈의 맛〉은 그럼에도 마치 새롭고 엄청난 진실을 폭로하는 양, "재벌은 나쁜놈들"이라고 외치고 또 외쳐댄다.

이런 전략이 효과가 있었다면 진즉에 재벌은 개혁됐을 것이고, 이명박 정부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대다수가 재벌과 특권층에 비판적임에도 여전히 그들이 '공고한 권력'(임상수)을 누리고 있는 현실 아닐까. 왜 이것이 가능한지, 우리들의 이중성은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재벌 지배의 모순과 '나'는 무슨 상관있는지 사유를 끌어내지 못하면 허무한 메시지에 그칠 수밖에 없다.

〈돈의 맛〉도 나름 회심의 수단을 동원하긴 했다. "돈에 중독된 거지. 근데 그게 모욕적이더라고"(윤 회장) 같은 재벌 자신의 반성적 성찰이 그것이다. 윤 회장(백윤식 분)의 이 말에 딸 나미(김효진 분)는 "아빠가 그런 분인지 몰랐어요"라며 감동적인 표정을 짓는다.

임상수 감독은 진정 대단한 발견을 했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재벌 가족들의 어처구니없이 단순한 감성을 그런 식으로 폭로하고 싶었던 걸까? 무엇이든 공감 안되긴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론 칸에서 이 영화를 본 영국의 한 유명 영화평론가 말마따나 "매우 바보 같고 약간은 우둔한 영화"임을 확인시켜준 장면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돈이 주는 '모욕'을 거의 매일매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욕적이면 어때? 그것만 벌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아넘길 것이고, 경쟁자를, 동료를, 인간을 짓밟는 짓도 감당할 것이다. 이미 누릴 만큼 누린, 윤 회장 같은 이가 잠깐 개과천선해봤자 감동 먹을 사람은 임상수 감독 정도 말고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감독의 말 중 인상적이었던 게 있다. "그쪽 분들(재벌)이 본다면 뜨끔할 겁니다." 과연 그럴까. 참고로 〈돈의 맛〉의 투자·배급은 재벌그룹 영화사인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맡았고, 제작사 측은 대기업 비서실·홍보실 직원들을 따로 불러 '감독과 대화' 행사까지 가졌다.

재벌의 돈으로 만들고 판매하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 느끼는 '재벌 비판' 영화. 〈돈의 맛〉이란 영화 '바깥'의 세상이 오히려 더 영화스럽게 느껴지는 201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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