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한국테니스계의 살아있는 전설 전창대 창원시청 테니스팀 감독

“1979년 한국 테니스는 전창대(19․명지대 1년)의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창대는 10대 돌풍을 몰고 온 주역, 노장을 몰아내고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킨 주역으로서도 주목을 받은 선수였다.”

당시 한 스포츠신문에 실린 머리기사의 일부분이다.

1979년은 한국이 1960년도부터 출전한 데이비스컵에서 20년 만에 사상 첫 아시아 동부지역 준결승 진출의 쾌거를 달성한 해였다. 당시 한국 대표팀에는 전창대, 전영대, 김춘호 등 19살 동갑내기가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전창대는 데이비스컵 예선인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며 그해 ‘한국의 슈퍼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데이비스컵 관련 기사.
당시 데이비스컵 관련 기사.

18세에 최연소 태극마크 달고 ‘전창대 시대’ 구가

그로부터 31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녹음이 한창 짙어지는 5월 중순 창원테니스코트에서 전창대(53) 창원시청 테니스팀 감독을 만났다. 당시 175㎝에 68㎏를 탄탄한 체격을 자랑했던 그 선수는 어느새 구수하고 후덕한 인상의 중년에 접어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아직도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 테니스 코트를 향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매일 아침 8시면 창원시립테니스코트로 출근한다. 그가 감독으로 있는 창원시청 테니스부 선수를 지도하기 위해서다. 선수보다 일찍 나오는 탓에 눈치가 보여 선수들이 출근하길 차에서 잠깐 기다리는 센스도 가끔은 발휘한다고.

테니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한국 테니스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부르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전창대 감독에게 ‘79년 데이비스컵’ 관련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난리가 났죠. 지금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가 월드컵 본선 진출한 것과 비슷한 쾌거였어요. 신문에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나고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기분이더군요. 테니스가 그렇게 인기 종목인 줄 그동안 몰랐으니 내가 제일 놀랐죠.”

전창대 창원시청 테니스팀 감독./김구연 기자

당시 서울 장충코트에서 열린 인도와의 예선 3차전에는 1500여 명의 관중이 코트를 가득 메웠고, 응원석에 미처 자리 잡지 못한 시민들은 코트 넘어 잔디밭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진풍경도 연출이 됐다.

전 감독은 “지금 생각해보면 나무라켓을 사용해 강력한 서비스 포인트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경기보다는 국제무대에 진출한 것 자체로 이슈가 된 것 같다”면서 “한국 테니스 역사를 통틀어도 그때만큼 관심을 받았던 적은 없을 정도로 테니스의 전성시대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약관 스물의 나이에 한국 테니스계를 접수했고, 18세에 최연소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름하여 ‘전창대 시대’가 찾아온 것이었다.

마산동중 2학년 때 테니스라켓을 처음 잡은 그는 타고난 선수 기질이 있었다.

그해 3월 7일 테니스부에 입문해 6월 23일 열린 경남 종별테니스대회에서 단식 2위에 올랐다. 전창대 감독은 정확하게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감독님은 테니스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분이셨는데 정식으로 테니스를 배운 분은 아니었다. 교사 테니스대회에서 나가면 곧잘 우승컵을 가져오곤 하신 걸로 기억한다”며 “정식으로 테니스를 배운 분은 아니었지만 테니스를 워낙 좋아해 항상 테니스장에서 생활하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저 유망주에 불과했던 전창대 감독은 마산고 입학과 동시에 경남을 넘어 전국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고교 감독 역시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운 분은 아니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아마추어 감독에게 배운 전 감독이 국내 테니스계를 평정하자, 국내 테니스계는 발칵 뒤집혔다.

전창대 창원시청 테니스팀 감독./김구연 기자

그는 웃으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수를 하면 안 됐거든요.”

그게 1인자가 된 이유였다.

“당시 감독님은 코트 가운데 앉으셔서 랠리만 쭉 지켜보셨다. 실수를 하면 감독님께 불려가 혼쭐이 났다. 선수들 사이에 ‘미스(Miss)하면 죽는다’라는 말이 퍼졌고, 그때부터 스트로크에만 죽으라고 매달렸죠.”

마산고 1학년 시절 전국종별 3위를 시작으로 한국주니어테니스(16세부) 우승, 일본 주니어 오픈(16세부) 우승 등 제 또래에게선 적수가 없을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주위에서는 그를 두고 16세부가 아닌 18세부에서 뛰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 정도였다.

당시 마산고에는 전창대 뿐 아니라 이우용(전 용인시청 감독), 전영대(건국대 감독) 등이 포진해 있어 고교무대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배정규 감독은 마산고가 전관왕을 차지하자 박정희 대통령상을 받고 장학사로 파격 승진하기도 했다.

그 당시 치러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실업선수, 대학선수 등과 당당히 선발전을 치러 전창대 감독과 동기인 이우룡이 국가대표 4인에 선발됐으니 마산고 위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대우중공업 실업팀에서 선수·코치 생활

전창대 창원시청 테니스팀 감독./김구연 기자

전창대를 두고 울산대, 건국대, 명지대에서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을 펼쳤고, 그는 창단팀인 명지대를 선택했다. 명지대에서 제안한 파격적인 미국 연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약 2달 가까이 생활하면서 테니스를 공부했어요. 그때 처음 알았죠. 외국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연습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걸요”라며 웃었다.

이후 4년간 태극마크를 달고 코트를 누볐지만 그에겐 새로운 동기 부여가 없었다. 대학 3년 때부터는 그때까지 절대 입도 대지 않았던 술도 마시기 시작했다.

“솔직히 운동을 열심히 안 해도 대표 선발전을 하면 꼭 4위 안에는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술도 마시게 되고, 운동 이외의 것들이 눈에 들어온 거죠. 목표가 사라지다 보니 그 이상의 뭔가는 없었다고 봐야죠.”

이후 대우중공업 실업팀에서만 8년 7개월에 걸친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김봉수, 유진선, 송동욱 등 80년대 한국 테니스를 이끌 차세대 주자들에게 자연스레 왕좌 자리를 내주며 길지 않았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대우중공업 실업팀에서 코치 생활을 하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2000년 대우중공업은 모기업의 부도사태로 대우종합기계와 대우조선공업으로 분할되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었다. 회사의 지원이 끊기면서 한국 여자테니스계를 이끌어 온 대우중공업 여자테니스팀은 자연스럽게 해체 수순을 밟았다.

창원 국제여자챌린저대회 만들고 실력파 선수 배출

그런 그를 부른 곳은 고향 경남이었다. 당시 도체육회 사무처장이던 권영민 상근부회장이 팀 창단을 약속했고, 그는 창원시청 테니스팀 초대 감독을 맡아 당시 여자부만 있던 팀에 남자부까지 만들었다. 2001년의 일이다.

그간 최주연, 이은정, 장경미, 유민화 등 여자테니스의 계보를 잇는 실력파 선수를 연이어 배출하며 지도자로서의 입지도 확실히 다졌다. 대표팀 감독직도 몇 차례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고사했다. 대신 지역의 테니스 붐 조성을 위해 창원 국제여자챌린저대회를 만들고 정상급 선수를 유치하는 데 애를 썼다.

전창대 창원시청 테니스팀 감독과 선수들./김구연 기자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창원여자첼린저(총상금 2만 5000달러)는 2003년 ITF 여자챌린저 대회를 시작으로 해마다 열리고 2008년부터는 남자퓨처스( 총상금 1만 5000만 달러) 대회가 동시에 개최되고 있다.

전 감독은 “창원은 국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최고 테니스장(케미컬 12면․10면)을 갖춘 곳이어서 이를 활용한 대회 개최를 준비하게 됐고, 첼린저대회를 통해 창원은 테니스 도시의 위상도 함께 얻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계획을 묻자, 전 감독은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는 그저 평범한 대답을 들려줬다.

전창대 감독도 50을 훌쩍 넘긴 나이인지라 시간이 더 가기 전에 뭔가 ‘이름값’에 걸맞은 역할을 한번 쯤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전 감독은 다가오는 인천 아시안게임(2014년 9월 예정)에서는 대표팀 감독을 한 번쯤 맡고 싶다는 포부를 살짝 드러냈다.

“예전에는 하라고~ 하라고~ 했는데 지금은 시켜줄지 모르겠네요. 정말 기회가 온다면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네요. 여자팀을 오랫동안 맡아 자신 있거든요.”

인천 아시안게임은 이제 2년 남짓 남았다.

선수로 또 지도자로 항상 최선을 다해온 그이기에 그가 꾸는 2년 뒤의 꿈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창대 창원시청 테니스팀 감독./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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