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여영국 경남도의원(진보신당)

4·11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전국 정당 득표율 2%를 넘기지 못해 정당 등록 취소를 해야 했다. 그러나 당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진보신당 당원들은 그대로 남았고 좌파정당 재건설이라는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여영국 도의원(창원5)은 진보신당 창원당협 위원장을 맡으며 4·11 총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창원 성산구에 출마한 진보신당 김창근 후보는 7% 대 득표율을 올리는데 거쳤고 통합진보당 손석형 후보는 낙선했다. 권영길 의원이 당선되면서 진보정치 1번지로 명명됐던 창원 성산구를 새누리당에 내준 셈이었다.

진보신당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통합진보당과의 단일화 무산 책임을 진보신당에 묻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영국 경남도의원./박일호 기자

여영국 의원은 “선거운동 기간 갑갑함을 많이 느꼈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야권단일화 프레임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컸다고 하지만 우리 후보가 독자 행보를 선뜻 못하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조직력 부족이고 당의 역량을 그대로 반영한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외적 요인을 보면 우리 편이 하나도 없었다. 민주노총과 시민사회 내부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지지한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통합진보당 지지에 포커스를 맞췄다. 지역 사회 여론이 그렇게 흐르니까 우리의 명분과 주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도 사라졌다.”

항상 노동자 투쟁 현장에 있었다

여영국 의원이 진보정치 운동에 발을 들여놓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곧 창원 지역 노동운동 역사와 지난했던 정치 지형 변화를 가늠하는 일과 같다.

많은 사람에겐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되기도 한다. 여영국 의원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일별해보면 ‘당연하고 평범한 삶’에서는 한 발짝 비껴난 듯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그가 독불장군식 행보를 해왔다는 건 아니다. 평범한 길을 걷고 싶었지만 시대가 그를 떠밀었으며, 또한 그 시대는 그를 삶의 현장에 붙잡아 두기도 했다.

여영국 의원은 지난해부터 창원대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 보통은 많은 정치인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고, 때로는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기도 한다지만, 여 의원은 학부생으로 이름을 올렸다. 산업비즈니스학과에 입학했다. 화요일과 수요일 저녁 시간에는 어김없이 캠퍼스를 찾아 3∼4시간씩 수업을 받아야 한다. “출석 점수도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몇 개월 동안 총선 때문에 출석할 수 없었다. 선거를 마무리했으니 또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일상이 시작 됐다.

강의를 듣고 있는 여영국 경남도의원./경남도민일보DB

1983년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했으니, 여 의원은 근 30년 만에 대학에 입학한 셈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꼭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이 시기 여영국 의원의 궤적을 살펴보면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여 의원은 졸업하기 전 부산 사상공단에서 잠시 일하다가 83년 4월 통일중공업과 S&T 중공업의 전신인 동양기계주식회사에 방위산업체 특례 보충역으로 입사했다. 여 의원은 “당시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22살 때 노동조합 대의원이 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을 앞두고 민주노조 건설 움직임이 활발하던 때였다.

민주노조 건설 과정에서 1986년 해고되고 구속됐다. 폭력 혐의였다. 이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의 변론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의 변론에 힘입어 그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5개월 형을 살고 풀려났다. 이후 경남노동자협의회 소속 활동가로 87년 민주화 투쟁과 89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3자 개입금지법 위반으로 89년 수배, 그해 10월에 두 번째 구속, 1991년 여름에 석방된다. 석방 후 전해투(전국해고자 복직투쟁 특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된다.

마산 창원지역에서 벌어졌던 굵직굵직한 노동자 투쟁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러나 2010년께 노동운동 현장에서 그에게 주어졌던 모든 직함이 사라졌다. 민주노총 경남본부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직후였다. 든든한 동지였던 아내였지만, 집안 갈등까지 겹치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무기력증과 우울증도 음습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 의원은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대림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농성장을 설치해 그곳에서 100일 동안 생활했고, 그 과정에서 도의원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좌파정당 재구성 논의 급물살 탈 것”

도의회 입성 후 여영국 의원은 진보신당 도의원으로서 여러 활동을 펼쳐보였다. 로봇랜드 등 대규모 민자사업의 문제점을 파헤쳤으며, 묻지마 토목공사를 강행하는 행정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노동 운동 현장에서 있을 때 여 의원은 ‘강성’으로 분류되는 활동가였다. 그러나 의회에서는 부드러웠다. “소수 정당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노력하다보면 두루두루 친분을 유지해야 하고, 의원들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원래 부드러운 사람이다.”

부드러운(?) 의정활동을 펼친다고는 하지만 진보정치의 원칙을 이야기할 때면 여전히 ‘강성’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간 단일화가 무산되고 심상정, 노회찬 의원 등이 진보신당을 탈당할 때도 진보신당을 지켰던 건 진보의 가치를 져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 통합에는 찬성했지만 총선을 앞두고 정치공학적인 계산에 우선한 통합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당원들의 선택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여 의원은 후반기 도의회 활동에 역점을 두는 한편 좌파정당 재건설 논의에도 나서야 한다. “총선에서의 진보신당 성적표와 관계없이 좌파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는 큰 방향이 세워져 있다. 단병호 전 의원 등이 노동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고 있고, 민주노총 내부에도 이에 공감하는 층이 있다. 좌파정당 재구성 논의에 급물살이 탈 것이다.”

여영국 경남도의원./박일호 기자

좌파정당 재구성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4·11 총선 과정에서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유지해야 할 상대인 통합진보당과 앙금을 쌓은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가 완주하게 된 명분과 이유가 있기에 단순한 감정싸움만은 아니었다. 지역 내 공통 사안을 놓고 함께 논의하면서 쌓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겠다. 의식적으로 그런 자리를 만들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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