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20) 경북 문경 (유곡역~새재)

아직 오월인데도 벌써 날씨는 여름임을 실감케 하는 나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낀 연휴에 토끼비리와 새재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옛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두 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판이하게 느껴집니다. 진남교반 일원의 유원지와 새재에는 사람이 넘치는데, 토끼비리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고 간간이 고모산성을 찾는 사람이 눈에 띌 뿐입니다.

새재 아래의 대표적 옛길인 유곡역도의 찰방이 주재했던 유곡역 옛터에서 길을 잡아 나섭니다. 유곡동 아골(아동 衙洞)을 나서서 서낭당고개라고도 불렸던 유곡고개를 넘으면 불정원(佛井院)이 있던 불정동 원골에 듭니다. 지금 서낭당은 사라졌지만 유곡역의 사적을 밝힌 빗돌이 그 허전함을 대신합니다. 불정원이 자리했던 곳에는 원골이라는 빗돌이 서있고, 지금은 주유소가 들어서 옛 원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으니 그 쓰임이 영 달라지지는 않은 셈입니다.

진남교반 일원. /최헌섭

견탄원(犬灘院)

불정원 옛터를 지나면 머잖아 영강가에서 개여울(견탄 犬灘)에 들게 되는데, 옛길은 예서 내를 건너 영강의 동쪽 기슭을 따라 열렸습니다. <대동여지도>에는 이곳까지 배가 들 수 있는 가항천(可航川)으로 그려 두었습니다. 지금도 동쪽의 호계리에는 '뱃나들' '창동(倉洞)' 등의 지명이 남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개여울의 바로 북쪽에는 길손들 쉼터였던 견탄원(犬灘院)이 있었습니다. 고려 말엽을 거치면서 폐허가 되었는데,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기문에 화엄대사 진공(眞公) 스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을 다시 세우고 잔도를 보수한 기록이 전합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역원에 "여울 위에는 전에 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퇴락한 지 오래되어 길손이 쉴 곳이 없다. 화엄대사 진공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다 개탄하여,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띠를 베어 재물과 사람의 힘을 모아서 재목을 찍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 다니는 길손의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고 전합니다. 권근이 지은 이 기문으로 보아 개여울 가까이에 퇴락해 있던 원을 고쳐 지은 때는 조선 개국 직후로 여겨지며, 원은 기와를 얹은 당당한 다락집 형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개여울 가에 이런 원이 서 있다면 참 잘 어울리겠다 싶습니다.

고모성과 진남관

개여울에서 영강의 동쪽으로 난 옛길을 따라 걷다가 오정산 자락으로 잡아들면, 낙동강 하류의 대표적 비리길인 물금의 황산천(黃山遷 황산잔도 또는 물고미잔로), 삼랑진의 작천(鵲遷 까치비리)과 더불어 3대 비리길인 토끼비리에 듭니다. 통영로와 동래로 구간 중 가장 험한 길로 알려진 400여m 구간의 토끼비리는 길로서는 처음으로 2007년에 명승 제31호로 지정되어 많은 이들이 찾고 있습니다.

   
 

여기를 지나면 옛길은 진남문(鎭南門)을 통해 고모산성(姑母山城)에 들게 됩니다. 최영준의 <영남대로>에는 고모산성 아래에 박석(薄石 얇고 편평한 돌)을 깔아 노면을 포장한 구간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 그 자취는 있지 않고, 최근에 다시 깐 박석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고모성은 맞은쪽의 고부성과 더불어 5세기 무렵 신라가 북진을 추진하던 과정에 쌓은 성입니다. 이곳 토끼비리를 사이에 두고 성을 마주 쌓은 것은 이곳을 통과하는 적을 막기 위한 것이니, 고래로 이곳이 교통의 요충이었음을 잘 드러내는 셈이지요. 그러나 천험의 지세를 가려 쌓은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왜군을 그냥 지나게 함으로써 한양 함락을 재촉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런 난리를 치르고 난 뒤, 왜에 대한 방비를 위해 옛 고모성에 덧대어 돌고개(석현 石峴)에서 토끼비리로 성을 이어 쌓아 고개의 방비를 강화하였습니다. 그곳을 지나는 문을 진남문(鎭南門)이라 하고 일대를 진남관(鎭南關)이라 했으니 왜(倭)에 대한 원한과 성의 방비 목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의 안쪽에는 최근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한 주막이 있고, 고갯마루에는 성황당이 있습니다. 이곳 돌고개 성황당은 제대로 격을 갖추고 있어서 고을을 보살피는 성황신을 모신 곳으로 보이며, 이 성황당의 존재는 이곳이 옛길임을 일러주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관문성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두 성 사이로 난 고개는 신현(新峴) 또는 석현(石峴)이라 하는데, 신현은 이곳에 있던 신원(新院)에서, 석현은 고갯마루에 둔 서낭당인 적석(積石)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달리 조선 후기에 그린 문경지도(규10512 v.5-10)에는 고모현(姑母峴)이라 표기하였는데 이는 고개 서북쪽의 고모성에서 연유했습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문경이 지척에 보입니다. 고개를 내려선 마을의 들머리에는 오래된 빗돌이 있어 이리로 길이 통하였음을 일러줍니다. 일행은 고개 아래 신현마을에서 시원한 맥주로 더위를 식히고, 옛길을 덮어쓴 지금의 도로를 따라 가로수 길을 걸어 문경읍으로 길을 다잡습니다. 옛 지도를 살피면, 이곳 신현에는 신원사창(新院社倉)이 있었고 천동(泉洞 샘골) 오동(梧洞) 금곡(金谷)을 거쳐 조령천을 건너 마원리에 있던 마포원(馬浦院)으로 듭니다. 문경으로 이르는 마원리 즈음의 길가 논에는 문경의 특산물인 오미자(五味子)를 재배하고 있어 이곳이 문경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관갑천(串岬遷)이라고도 하는 토끼비리(토천 兎遷)로 길을 잡기 위해서는 영강(穎江)을 건너야 하는데, 옛 다리가 모두 없어져 부득이 굴모리 바로 위에서 수중보를 가로질렀습니다. 지금이야 물이 성하지 않아 건너기 어렵지 않았지만, 지난여름에 건널 때는 길벗끼리 의지하여 어렵사리 건넜습니다. 이런 정황은 옛 글에서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조엄(1719~1777)이 그의 통신사행을 기록한 해사일기(海차日記)에 "신원참(新院站)에 들어가 말에게 죽을 먹이고 견탄에 이르니, 물살이 거센데다 길고 넓었다. 본 고을 원이 냇물 건너는 역군을 많이 준비해 놓지 못하여 간신히 건너다가 인마가 더러 넘어지는 자도 있고, 더러는 떠내려가는 자도 있었다"고 한 것이지요.

토끼비리

토끼비리의 다른 이름인 관갑천의 관갑(串岬)이란 지명은 산지 사이사이를 꿰듯 감입곡류(嵌入曲流)하듯 흐르는 영강에서 비롯한 듯합니다. 관갑천의 다른 이름인 토끼비리는 왕건 관련 유래설화가 있지만 게서 말하는 토끼는 산 속 영물인 그 짐승을 이르는지는 좀 더 숙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낙동강 하류의 벼랑길인 개비리가 개와 관련 없듯이 말입니다.

토끼비리.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산천에는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이르니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 가 있었으므로 토천(兎遷)이라 불렀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속어로 도망간다를 '토낀다'고 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토끼비리를 '왕건이 도망간 벼랑길'로 볼 수는 없을지 따져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관갑천의 위치 구조 규모에 대해서는 앞의 책에 "용연(龍淵)의 동쪽 언덕인데, 토천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사다릿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나 된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바위 벼랑을 깎아 만든 길이 잘 남아 있고, 오랜 세월 동안 거듭된 인마의 내왕으로 침식된 길이 함몰 도로(sunken road)의 형태로 남아 길의 오랜 역사를 전해 줍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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